헐리우드에서 활동하는 여성감독의 비율은 고작 4%. 그나마 페니 마샬이나 제인 캠피온, 노라 애프런 등의 헐리우드 여성 감독들이 드라마나 혹은 멜로물 같은 보편적 장르에서 여성 특유의 섬세함을 장점으로 자리잡아 갈 때 남성들의 전유물이라고 인식되어지던 액션영화로 꾸준히 한우물을 판 여장부가 있다. 바로 캐서린 비글로우다. 그녀의 1991년작 [폭풍속으로]는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액션영화의 상위권에 랭크될 만큼 남자들의 세계를 남자보다 더 확실하게 이해할 줄 아는 연출가다.
[스트레인지 데이즈]와 [웨이트 오브 워터], [K-19: 위도우 메이커]의 연속 실패로 재기불능 상태에 빠진 것처럼 보였을 때 그녀는 7년만에 회심의 역작을 들고 나타나 자칭 ‘세상의 왕’이라며 아카데미 시상식장에서 환호성을 질렀던 전남편 제임스 카메론에게 판정승을 거뒀다. 고작 1100만 달러짜리 영화 [허트 로커]가 3억5천만 달러짜리 [아바타]를 꺾은건 대단히 드라마틱한 승부였다. 남자들보다 더 두둑한 배짱과 거대한 스케일로 범상치 않은 면모를 보여주었던 그녀의 재능이 드디어 만개했다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아카데미 5개부문을 가져간 [허트 로커]는 작품성에 있어서 인정받았지만 본질적으로는 서스펜스와 사실적인 액션을 그럴듯한 드라마와 섞어낸 오락영화다. 캐서린 비글로우의 작품들이 여지껏 그래왔듯 작가주의적인 성향이나 예술성을 지향하는 것이 그녀의 목표가 아니라는 건 자명하다. 오히려 그녀는 [허트 로커]로 상업성과 작품성의 균형잡기에 있어 나름대로의 타협점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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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캐서린 비글로우는 [허트 로커]의 후속작으로 [제로 다크 서티]를 내놓았다. 두번 연속 911사태와 관련된 영화다. 더군다나 [제로 다크 서티]는 빈 라덴 암살작전에 관한 작품으로 이미 [코드네임 제로니모]라는 영화가 한 발 앞서 개봉된 바 있다. 정황상 마치 전남편 제임스 카메론의 [어비스]가 아류작인 [딥 식스]나 [레비아탄]에 낭패를 당했던 과거를 연상케 하는데, 내막을 들여다 보면 조금 복잡하다.
애초에 [제로 다크 서티]는 실패한 빈 라덴 암살작전에 관해 다룰 예정이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하기 직전에 빈 라덴 암살이 성공하고 만다. 계획은 수정되었고 비글로우는 좀 더 포괄적인 범위에서 911 이후 빈 라덴을 추적한 10년간의 과정에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따라서 [코드네임 제로니모]와는 처음 의도와는 달리 본의 아니게 비슷한 테마를 공유하게 된 셈이다.
영화는 빈 라덴 추적에 핵심적인 역할을 맡은 CIA 요원 마야를 중심으로 비밀에 쌓여있는 알카에다의 수장 빈 라덴을 찾아내고 암살하기까지 관련자들의 지루하고도 무미건조한 삶에 대해 묘사한다. 비인간적인 고문이나 테러의 위협, 척박한 사막지대에서 정보의 홍수와 맞닥드리며 임무를 완수하는 워커홀릭의 이야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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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입장에서 불법고문이나 납치를 미화시킨다는 비판도 있지만 기실 [제로 다크 서티]는 미군을 마냥 정의의 수호자로 묘사하지는 않는다. [K-19]에서 러시아 연방의 군인들을 영웅으로 묘사한 바 있는 캐서린 비글로우는 이번에도 역시 정치성에 있어서는 여전히 중립적인 입장이다. 주인공 마야가 빈 라덴을 추적하는 이유도 딱히 애국심이나 개인의 영욕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녀는 일에 중독되어있고, 10년간 이 일을 수행하면서 별다른 연애 한번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마야는 전쟁의 서스펜스에 중독된 [허트 로커]의 제임스 중사와도 비슷한 인물이다. 지루한 추적끝에 빈 라덴을 성공적으로 사살한 직후에도 남는 건 성취욕이나 뿌듯함 보다는 한없이 밀려오는 공허감 뿐이라는 면에서 주제의 방향도 일치하는 점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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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트 로커]에 비해 서스펜스의 농도는 옅어진 대신 심리묘사와 드라마적인 구성은 조금 더 강화되었고 세미-다큐멘터리적인 구성으로 인해 화려한 볼거리가 사라진 면도 없지 않지만 아마도 데이빗 핀처의 [조디악]을 재밌게 본 분들이라면 [제로 다크 서티] 역시 잘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나 빈 라덴 생포작전이 실행된 '제로 다크 서티'(자정 이후 30분을 뜻하는 군사용어)를 묘사한 마지막 30분간의 라스트씬은 숨소리조차 허용하지 않는 실제 상황에 관객들을 데려다 놓은 듯한 극한의 서스펜스를 경험시켜주며 이렇다 할 액션씬 하나 없던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감독의 장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명장면이다.
모처럼 여성을 주인공을 내세운 캐서린 비글로우는 [제로 다크 서티]를 통해 냉전 이후 양상이 바뀐 현대의 첩보전과 그 첩보전 안에 뛰어든 첩보원들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어했던 것 같다. 서방과 중동의 충돌양상으로 변해버린 세계 세력구도의 변화속에서 여전히 안식의 땅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의 이야기, 그것이 [제로 다크 서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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