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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고 본드역을 맡겼다!’. [카지노 로얄]에서 처음으로 본드역을 따낸 다니엘 크레이그가 한 불평입니다. 사실 마틴 캠벨 감독은 007 프렌차이즈를 살리기 위해서 어떤 조치가 필요한지를 기막히게 캐치해 낸 명장입니다. 비록 다니엘 크레이크는 제로 베이스 상태에서 본드 역을 해야 했지만 그 결과 성공적인 리부트, 새로운 제임스 본드 무비의 시작이라는 쾌거를 이룰 수 있었죠.

[카지노 로얄]의 못다한 사족으로서 소진되는 바람에 저평가된 [퀀텀 오브 솔라스]는 제외하더라도 전작인 [스카이폴]은 여전히 변화된 리부트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한편, 클래식 본드 무비의 클리셰에 조심스럽게 접근한 수작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스카이폴]이 전무후무한 대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건 제임스 본드의 가족사를 조명해 캐릭터의 깊이를 더했고,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빌런인 라울 실바에도 무척 공을 들였다는 점입니다.

이렇게 007 프렌차이즈는 제임스 본드라는 캐릭터와 주변 인물들에게도 집중하기 시작했고, 액션만이 아니라 드라마의 비중을 중요시하며, 멍청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로 전락해가던 시리즈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게 되었지요. 다니엘 크레이그가 등장했던 3편의 작품은 사실상 본드의 성장영화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 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그러나 24번째 본드 무비인 [스펙터]에서 샘 멘데스는 완벽한 과거로의 회귀를 선택합니다. 전 사실 [스카이폴]의 리뷰를 쓸 당시 샘 멘데스가 다음 작품에서 과거 클래식 본드스타일로 회귀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방향을 틀어버릴 줄은 몰랐습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작품에서 본드는 시리즈의 전통적인 범죄조직 스펙터와 대면하게 됩니다. 판권문제로 [유어 아이즈 온리] 이후 프렌차이즈에서 사라져 버린 스펙터의 재등장은 올드팬들에게 있어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 소식이었지요. [스카이폴]에서 정체성의 혼란을 딛고 완전체로 거듭난 본드를 다루었으니, 이제는 그에 걸맞은 숙적을 재구성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스펙터]의 기획은 매우 적절하다 할 수 있어요.

[스펙터]의 첫 장면은 그동안 엔딩 크래딧으로 밀려있던 건베럴씬을 다시 원위치 시키면서 시작합니다. 뒤이어 떠오르는 자막은 “죽은 자들이 되살아 나다”입니다. 이는 프리타이틀 시퀀스의 죽은 자들의 날 Dia de los Muertos 퍼레이드를 소개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동안 죽어있었던 스펙터라는 조직과 블로펠드, 그리고 오래전 그 시절의 제임스 본드 그 자신임을 암시하는 중의적 표현입니다.

 

ⓒ 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실제로 샘 맨데스 감독은 매우 ‘의도적으로’ 고전적인 기법의 스토리 텔링을 고집하면서 예전의 007 스타일로 영화를 밀어붙입니다. 영화 속에 숨겨진 은유적 텍스트의 분량도 상당합니다. 잘 살펴보면 모든 것이 허투로 만들어진 건 아닙니다. 이 영화는 어찌보면 [스카이폴]보다 더욱 더 샘 맨데스의 클래식 본드 무비에 대한 애착이 담겨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어딘가 이상한 괴리감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폭발하는 건물 아래로 떨어진 본드가 쇼파로 안전하게 떨어지는 것을 필두로 자신이 살해한 남편의 미망인과 사랑에 빠지고, [스카이폴]에서는 특수장비에 냉소적이었던 Q에게 각종 가젯을 챙겨가는 등 이번 작품에서의 제임스 본드는 사랑에 아파하며, 땀범벅이되어 먼지구덩이를 구르던 그 순정마초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건 로저 무어에게나 어울리는 본드죠.

게다가 악당도 이상합니다. 모든 사건의 흑막이자 막강한 힘을 지닌 스펙터의 존재감이 너무나 부실하게 느껴집니다. 그 수장인 블로펠드란 작자는 더 한심합니다. 스포일러상 더 언급은 못하겠지만 이 사람을 본드와 그런 관계로 엮어서는 안되는 거였습니다. 사실 이번 작품에서 신경써야 할 부면은 본드가 아니라 바로 블로펠드, 더 나아가 스펙터란 조직을 리부트하는 007에 걸맞게 기존의 영화들이 아니라 원작에 기초해 재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P.S에서 따로 언급하겠습니다)

결국 관객들은 숀 코네리나 로저 무어가 활약하던 시대의 007 영화에 다니엘 크레이그가 뛰어다니는 기묘한 광경과 더불어 시리즈 사상 워스트 탑5에 들어갈만한 형편없는 악당이 굴지의 범죄집단 스펙터의 수장이 되어버리는 어이없는 상황을 목격하게 됩니다.

 

ⓒ 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물론 [스펙터]라는 영화 자체는 올드팬들의 감성을 충족시키는 것에 철저히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고는 있습니다. [골드핑거]의 오드잡을 연상시키는 헨치맨 캐릭터가 등장해 [위기일발]과 [나를 사랑한 스파이]의 오마주인 열차 안 격투씬을 펼치며, [썬더볼]의 퍼레이드 장면 오마주한 프리타이틀 시퀀스를 시작하지요. 날개가 잘려나간 비행기의 추격씬은 굳이 말 안해도 [죽느냐 사느냐]에서 차용한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오마주의 향연은 일면 올드팬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영화의 완성도를 보장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스카이폴]에서 애스턴마틴 DB5의 등장씬이 감동적이었던건 그것이 양념처럼 곁들어져 풍미를 돋웠기 때문이지 그 자체가 영화의 메인 디쉬로서 등장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스펙터]는 그 점에 있어 과유불급의 원칙을 너무 간과하고 있습니다.

당위성 없고, 뜬금없는 로맨스에 우연과 운빨이 겹쳐진 사건해결과 같은 것들에서 원칙적으로 본드 영화란 원래 이런 것이었다고 한다면 딱히 할말은 없습니다. 사실 브로스넌 시대까지의 007만 보더라면 크게 틀린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의 시대에서 만큼은 아니죠. 그동안 쌓아왔던 크레이그의 007은 클래식을 지향하는 영화가 아니었으니까요. [스펙터]의 의도가 프렌차이즈의 본질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해도 그 변화가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막 등장했고, 또 앞으로도 계속 등장할 스펙터와 블로펠드를 이 지경으로 데뷔시켰으니, 본드 무비의 장래가 벌써부터 우려되는 건 저만이 아닐 겁니다. [스카이폴]에 이어 레전드급 본드 무비의 2연패를 달성할 수 있었던 기회를 샘 맨데스는 잘 살리지 못한 듯 합니다. 여러모로 아쉬운 결과입니다.

P.S:

1.프리타이틀 시퀀스의 롱테이크는 오슨 웰즈 감독의 [악의 손길]에 대한 오마주로 보입니다. 이런것 만봐도 샘 멘데스의 영화적 지식과 덕력, 연출 감각은 결코 무시할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어쩌면 EON에서 샘 멘데스에 전권을 부여한 것이 이번에는 독이 된 것이 아닌가 싶네요. 여러모로 [슈퍼맨] 덕후였던 브라이언 싱어가 [슈퍼맨 리턴즈]를 만들었을 때의 그 느낌이랄까요.

2.블로펠드에 대해 첨언하자면, 사실 유출된 각본이 나오고 나서 그분이 블로펠드라는 게 확정된 순간 좀 불안했습니다. 그 설정의 경악스러움도 그러했지만, 이건 원작에서 너무 벗어나 버렸거든요. [카지노 로얄]에서 줄곧 이어진 잃어버린 원작의 본드를 데려오는 것에 비하면 이번 블로펠드는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원작처럼 나름의 원칙을 지키며, 차갑도록 냉정한 인물이자 본드에 버금가는 신체능력을 지닌 빌런으로 해석하길 바랬는데요. 이건 뭥미…

3.이와는 별개로 헨치맨 타입의 빌런이 등장하는 건 꽤 반가웠습니다. 이번 작품에서 실질적으로는 빌런이 3명이죠 아마?

4.모니카 벨루치의 비중을 생각하니 또 혈압이 오르는군요.

5.엔딩장면은 분명 [여왕폐하의 007]에 대한 오마주임엔 분명한데요, 이걸 어떻게 써먹을지는 다음 편에서 분명해질 것 같습니다.

6.진정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Q더군요. 이건 뭐 못하는게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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