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뉴먼이 주연한 [엑소더스]의 OST가 흐르고 영화속 명장면, 명배우들의 얼굴이 하나씩 스쳐간다. 이윽고 광고가 이어진다. 10분남짓 지루한 광고를 보고나면 드디어 시작한다. '주말의 명화'가.
지금으로부터 불과 10년전까지만 하더라도 안방극장의 주말영화 프로그램은 공중파 TV방송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 같은거였다. 극장은 엄두도 못내고 비디오 렌탈료 1000원이 아까워 주말을 기다리는 나같은 지지리 궁상도 있었을거고 딱히 주말의 늦은밤에 딱히 할 일이 없어 TV앞에 앉은 이들도 있었을 것이고, 여튼 '주말의 명화'는 1969년 8월 9일 [바렌티노]를 방영한 이래 40년이 넘는 장수 프로그램으로 자리잡아 왔다.
그런데 그 '주말의 명화'가 어제부로 폐지되었단다. 그것도 마지막을 장식한 영화가 [조폭 마누라 3]란다. 헐... 명색이 주말의 '영화'도 아니고 '명화'인데 [조폭 마누라 3]가 언제부터 명화로 불리게 되었나. 인기없는 프로그램의 최후란 이런것인가. 그저 씁쓸하기만 하다. (참고로 '토요명화'의 마지막 프로는 피터 하이암스 감독의 [레릭]이었다. 그나마 좀 낫다.)
ⓒ 쇼박스. All Right Reserved.
이번 '주말의 명화' 폐지는 많은 점들을 생각나게 한다. 우선 문맹자들과 시각 장애인들이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되었다는 것이다. '주말의 명화' 폐지의 주요 원인은 시청율의 하락,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인터넷 다운로드와 24시간 영화를 방영하는 케이블 TV의 보급이 맞닿아 있다. 문제는 인터넷 다운로드나 케이블 TV의 영화는 더빙이 아닌 자막으로 영화를 봐야 한다는 것.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자막을 읽는데 어려움이 많은 컨텐츠 소비자에게 있어서는 안타까운 노릇이다. 단지 시청율이 안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더빙영화의 생산량을 줄여 버리는건 문제가 있는거 아닌가?
이는 곧 더빙 퀄리티의 저하와도 관련이 있다. 최응찬, 유강진, 배한성, 양지운, 박일 등 이른바 골든 제네레이션 이후 등장한 성우들의 퀄리티가 예전에 비해 한참 못미친다는 지적은 외화 더빙의 급감과도 무관하지 않다. 자국어 보존 차원에서 더빙 컨텐츠의 비중을 점차 늘려가는 일본과 중국의 움직임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얼마전 일본서 발매된 [세븐] 블루레이만 보더라도 일본의 무시못할 더빙 컨텐츠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데, 거기에는 무려 일본어 더빙만 4개의 트랙- DVD 판, 후지 TV판, 아사히 TV판, 토쿄 TV판-이 수록되어 있다.
더욱이 사라진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는 다운로드, 케이블 TV 혹은 DVD, 블루레이와 같은 부가판권시장만으로는 도저히 접할 수 없는 작품들을 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 리노 벤추라가 주연한 1983년작 [제7의 표적 (La 7eme Cible)]을 보고 싶을 때가 있는데, 국내에 DVD의 출시는 물론, 다운로드로도 받아보기 힘든 작품이다. 나는 이 영화를 공중파로만 두 번 접했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기회가 없는 것 아닌가.
ⓒ Gaumont International. All Right Reserved.
또한 약간의 논란은 있을지언정 공중파 TV는 적절한 삭제와 편집을 통해 미성년자가 관람하기 힘든 작품도 감상하기에 무리가 없도록 방영해주는 신기한 재주를 부리곤 했다. 비록 영화 삭제에 대한 거부감이 월등히 많은 요즘 세대에는 안될 말이긴 해도 보수적인 나로선 아직도 TV에서 편집한 '착한 버전'의 영화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곤 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컨텐츠의 소비방식이 변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도 더빙영화의 추억을 간직한 나로서는 이번 '주말의 명화'의 폐지는 더 없이 슬픈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이럴줄 알았다면 집안에 산더미처럼 쌓아두었던 녹화된 비디오를 버리지 말걸 그랬다. (그나마 [대부]시리즈와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 등 몇몇 작품들을 보관해 둔건 천만다행이다)
P.S: 예전에 모 블로거와 작업한 [스타워즈] 클래식 3부작 한국어 더빙 DVD는 이제 초특급 레어템이 되어 버렸다. 만들어둬서 다행이야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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