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은 커녕 PC통신도 존재하지 않던 필자의 어릴적 학창 시절때 영화관련 정보를 얻는 수단은 '로드쇼'와 '스크린'으로 대표되는 영화잡지 뿐이었다. 지금보면 오류 투성이와 신빙성 없는 추측기사가 눈에 띄긴해도 여전히 영화잡지는 영화계의 최신소식에 목마른 영화팬을 위한 유일한 보고이자 정보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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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PC통신이 등장해 각 업체별로 영화 동아리가 생겼고, 영화 매니아들을 구심점으로 한 일련의 모임들이 하나 둘 이루어져 더많은 내부적 정보교류가 가능해지는 시대가 왔다. 더 나아가 오랜 정치적 억압속에 이데올로기적 희생양이 되었던 문화 컨텐츠가 해방구를 찾아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여주었고, 영화산업은 그 선도적인 입장에 선 위치에 올랐다.
대중매체로서 일반 관객들의 보편적인 수준에서 다루어지던 [스크린]과 [로드쇼]의 기능도 사실상 한계에 다가오는 시점, [로드쇼]의 정성일 편집장이 영화탄생 101년을 맞이한 1995년 월간 '키노'를 창간하면서 영화 잡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20여쪽에 달하는 심도깊은 인터뷰, 지면의 절반에 가까운 영화분석 등 파격적인 시도가 돋보인 국내 유일의 영화 '전문잡지'였다. 1
이후 국내에는 미국판 '프리미어'의 한국 상륙과 '씨네 21', 'Film 2.0', '무비위크' 같은 영화 주간지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고, 2000년대 이후에 미디어 매체로 급부상한 DVD의 보급과 더불어 'DVD 2.0', 'Hivi' 같은 DVD 전문 잡지들도 홍수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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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90년대 후반들어 가속화된 인터넷의 보급으로 영화 데이터베이스가 웹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에 가장 발빠른 움직임을 보여준 것도 '키노'측이었다. 그들은 영화 잡지를 영화 웹진으로 최초 변신시킨 Cy.nema를 Daum 커뮤니케이션에 상주시켰고, 이를 발전시켜 결국 'nKino'라는 독자적인 웹진을 운영하게 된다. 인쇄매체인 '키노'와는 별개로 'nKino'는 김정대, 듀나 등 인기 컬럼니스트들의 주옥같은 코너가 마련된 독보적인 사이트였다.
그러나 2003년 1월, 영화 잡지계의 암운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제 93호를 발행한 '키노'는 갑자기 표지를 흑백에서 컬러로 바꿨고, 이후 불안한 움직임을 보이다가 결국 2003년 7월 통권 99호로 폐간된다. 영화의 상업적 가치보다는 예술, 문화적 가치에 중점을 두었던 국내 유일의 순수 영화잡지가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리다 못해 폐간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제가 처음 영화에 입문할 수 있게 도와준 잡지는 키노였습니다. 키노는 오프라인 매체인 잡지와 대중들이 가장 많이 이용했던 한국대표 영화전문사이트 엔키노를 함께 가지고 있었죠. 영화잡지 키노 같은 경우엔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을 만큼 철학적인 영화 평론이 넘쳐났습니다. 그래서 너무 어렵게 진행되는 영화 분석과 평론 때문에 잡지에 대한 비판 역시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영화잡지 키노의 몰락은 한국 영화인쇄매체 몰락의 전주곡이었음이 확연히 들어나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 무비조이 운영자와의 인터뷰 중
무엇이 '키노'를 몰락하게 만들었을까? 혹자는 '키노'의 전문적인 성향과 지나치게 잘난듯한 논조가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영화 매니아에게 있어서 '키노'만큼 순수한 영화 정보를 추구하는 대안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00호를 넘기지 못하게 폐간을 하게 된 '키노'의 몰락은 깊이있는 영화정보지를 갈망하는 독자들에게 있어 더없이 큰 손실임에 틀림없었다. 2
인쇄매체의 하향세는 비단 '키노'의 일만은 아니었다. 미국 대중영화잡지의 표본이던 '프리미어' 역시 20년의 세월을 뒤로한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최근에는 한국판 '프리미어'와 'Film 2.0'도 사실상 폐간되었다. 혹자는 인터넷 영화포털의 기능이 주간, 혹은 월간으로 발행되는 영화잡지에 비해 훨씬 신속하며 양적인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인쇄매체의 대안이 될 수밖에 없는것이 아닌가 반문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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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어느정도는 맞는 말이다. 웹 2.0 세대의 블로거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우후죽순으로 늘어가는 영화정보 사이트가 넘쳐나는 시대에 네티즌들은 클릭 몇 번이면 손쉽게, 그것도 무료로(!)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대다. 그러나 단지 그것만으로 영화잡지의 존재가치는 사라져 버려야 하는 것일까?
다음은 영화리뷰 전문사이트 무비조이 운영자의 말이다.
(영화 잡지의 폐간 소식이 전해지면서) 어떤 분들은 온라인 영화 사이트 운영자인 제가 더 이익을 보게 되었다고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물론 제가 전혀 손해 볼게 없습니다. 하지만 영화가 문화라는 측면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장기적으로 봤을 때 양쪽 모두 손해라고 할 수 있죠. 결코 이런 몰락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특히 영화가 아마추어가 볼 수 있는 관점과 전문가 집단이 볼 수 있는 관점이 확연히 다른 것을 감안하면 이런 일들은 영화산업에도 심각한 손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화잡지는 전문가 집단을 양성하고 전문가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어떤 문화든 전문가 집단이 자생할 수 없는 문화가 되면 결국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분명 저 같은 아마추어들이 대신 할 수 없는 공간이 존재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영화전문가 집단이 생존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지면 과연 어떤 일이 발생할까요? 3
최근 온라인상에 올라오는 여러 글들을 보면 인터넷 사용자들에게 인기를 끌 수 있는 자극적인 내용과 제목으로 일관하는 경우를 많이 봤습니다. 다수의 정보가 인터넷에서 흘러 다니고 있지만 결국 전문가들이 보여준 풍부한 영화에 대한 접근을 느껴볼 수 있는 경우가 아주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부풀러져 이야기되는 경우도 있고, 오로지 인기 글이 되기 위해 무리하게 자극적인 내용과 제목이 넘쳐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기존 언론에서 제공하던 찌라시라고 폄하했던 글들이 온라인상에서 넘쳐나고 있는거죠.
틀린말이 아니다. 실제로 시사회 기회를 제공해 주고 영화리뷰를 피드백받아 예매권이나 원고료를 돌려주는 P모 사이트의 경우 약 150명 남짓한 선발 블로거를 기준으로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아무리 발로 쓴 리뷰라도 등록하면 예매권이 주어지니 등록되는 리뷰중 상당수는 내용도 볼 것 없이 '이 영화 우왕ㅋ 굿ㅋ 에요~' 다. 가장 기본적인 변별력마저 없는 글들이 인터넷에 떠돌게 되는 것이다.
각종 포털의 영화 코너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기본적으로 웹 컨텐츠 사업은 스폰서와 불가분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만큼 광고의 형태도 대단히 직관적이며 파급효과도 크다. 막말로 영화 포털에 [멘데이트]의 광고가 버젓이 붙어있는데 그 영화를 혹평하는 리뷰를 자체적으로 생산해 메인에 걸어놓을 용자(勇者)가 과연 몇이나 있겠느냐는 얘기다. 4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 한국의 영화 소비자들은 이러한 현실에 안주하며 물들어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 문화소비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의 특징은 한 페이지 이상의 기사에 거부감을 지닐 만큼 깊이있는 내용을 멀리한다는 점이다. 요즘 인터넷의 영화정보들은 이런 소비자들의 취향에 최적화 된 30초짜리 기사와 정보들로 넘쳐 흐른다. 소위말해 정보의 하향 평준화가 이뤄진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 누가 천원씩 줘가며 주간지를 사보겠는가.
당장에는 아쉬울 것이 없을지 모른다. 대충 어떤 영화에 누가 주연을 맡고, 언제 개봉하는지만 알기 원한다면, 거기에 약간의 알바성 뉘앙스가 첨부된 평점 몇 개만 볼 수 있다면 인터넷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어떤 영화, 가령 [다크 나이트]를 보고 눈물 날 정도로 감동을 받았는데, [다크 나이트]의 제작 과정이나 시리즈의 변천사, 비하인드 스토리 등을 알고 싶다면 어디서 이런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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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2.0' 제398호. [다크 나이트] 개봉 특집으로 영화 컬럼니스트 김정대의 레퍼런스급 컬럼을 비롯해 무려 한 권의 절반 정도를 할애한 특집기사가 나갔다. 단돈 천원이라는 파격적인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평론과 상업성의 균형을 잘 잡은 잡지로서 '키노'이후 영화 잡지의 새로운 대안이었으나, 결국 실질적인 폐간에 가까운 무기한 휴간절차에 들어갔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을 수 있는건 고작 몇몇 블로거들의 리뷰와 예고편, 스틸, 그리고 '재미있다 / 니들 알바냐' 와 같은 유치한 설전들 밖에 없음을 알았을 때 밀려오는 아쉬움과 허탈함은 어디서, 어떻게 보상받을 것인가. 단언하건데 인터넷이 정보의 전부가 아니다. 손에 들 수 있는 인쇄매체의 묵직함은 결코 인터넷이 대신할 수 없는 것이다.
영화 잡지가 모두 사라진다면, 앞으로 웹상에서 볼 수 있는 영화 관련 내용은 이런 것들이 상당수를 차지할지도 모른다.
한국 영화계가 시장 논리에 의해 [조폭마누라]처럼 그저 재밌기만 하는 영화만이 살아나게끔 만들어 버렸듯, 안팔린다는 이유로 사장되어 버린 영화잡지의 현실은 오늘날 영화를 문화가 아닌 돈으로만 보는 근시안적인 생각과 너무나도 닮아 있어 더욱 씁쓸하다.
물론 한국의 출판시장이 불황이었던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이제는 일간 신문조차 존재 자체를 위협받고 있는 시대니까 말이다. 그러나 한국의 문화-예술 관련 인프라 자체가 크게 흔들리고 있는 징후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는 지금, 결코 영화 잡지만이 아닌 전체 대중문화에 대한 위기감이 느껴진다. 인쇄매체의 영향력이 과거만큼은 못하더라도 인터넷이 대신할 수 없는 장점을 생각한다면 지금이라도 서로 공존할 수 있는 그 어떤 방향이 제시되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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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명목상으로 몇 개의 작은 영화관련 기관지가 꾸준히 발행되는 것은 정말 불행중 다행이다. 상업적인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영화적 지식을 기반으로 제작되는 이러한 매체들은 비록 발간 주기가 더디고, 지면도 많지 않다는 단점이 있지만 영화매체의 자생력이 아직은 시들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희망이라고 하겠다.
*. 포스트 작성을 위해 의견을 남겨주신 무비조이 운영자님께 감사드립니다.
- 사실 오늘날 영화 잡지가 몰락하게 된 원인 제공을 그들 스스로가 자초한 부면도 없지는 않다. 몇몇 잡지의 경우는 본연의 기능을 상실해 영화 찌라시로 전락한 경우도 있었으며, 심지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틀린 정보를 여과없이 내보내는 것도 있었다. 일례로 모 잡지에서는 [탱고와 캐쉬]의 주연 배우를 패트릭 스웨이지로 버젓이 소개해놓고 있었는데, 덕분에 필자는 아직도 가끔 패트릭 스웨이지와 커트 러셀을 헷갈려 한다. ㅡㅡ;; [본문으로]
- '키노'의 경우 대중적인 접근법에 있어서 다소 서툴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잡지의 방향성 문제이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소수의 취향이 존중받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매니아들의 시장이 죽어간다는 얘기이며 더 나아가 그만큼의 컨텐츠 시장을 상실함과 동시에 문화 소비자들의 취향을 일변도로 바꿔 버린다는 부작용을 낳게 된다. (필자만 하더라도 필요한 잡지와 DVD 등을 사기위해 해외 주문을 간혹하곤 한다.스스로를 그닥 매니아라고 생각하지 않는대도 말이다) [본문으로]
- 현실적으로 필자같은 블로거들은 결코 대안이 되지 못한다. 당장 먹고살게 급한 마당에 그들이 언제까지 자기 만족을 위해 시간과 돈을 바쳐가며 양질의 포스트를 써낼 것이라 생각하는가. 게다가 작은 광고 한토막만 블로그에 띄워놓아도 상업적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환경속에서 최소한의 지원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 언제까지 개인의 힘으로 객관적이며 양질의 글을 생산할 수 있을 것인지 요즘같아서는 회의감만 들 뿐이다 [본문으로]
- 과거 'nKino' 역시 광고와 온라인 마케팅 등으로 다양한 수익 구조를 가져갔지만 적어도 광고와 아티클 등이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회사였다. 한마디로 편집과 경영은 엄연히 구분되는 영역이었다는 얘기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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