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2008년의 마무리를 장식할 또 한편의 기대작 [퀀텀 오브 솔라스]의 개봉이 눈앞에 다가왔다. 무려 22편째 시리즈를 맞이하는 초 장수 시리즈인 007. 그 긴 세월만큼이나 여러명의 매력남들이 타이틀 롤인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고, 또 은막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이 시간에는 역대 제임스 본드를 맡았던 배우들을 살펴보면서 기존에 알려진 제임스 본드 외에도 알려지지 않는 007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다.
1.배리 넬슨
최초의 제임스 본드를 숀 코네리를 알고 있는 당신. 틀렸다. 실사 영화에서 최초로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배우는 배리 넬슨이다. 1954년, 당시 미스테리 극장이라는 컨셉으로 CBS를 통해 방송중이던 [클라이막스!]라는 시리즈 물에서 최초의 제임스 본드 소설인 '카지노 로얄'의 판권을 구입해 제작한 60분짜리 동명의 에피소드가 바로 최초의 007 영화가 된 셈이다.
ⓒ CBS Television/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이는 아직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EON 프로덕션과 계약을 맺기 전에 이뤄진 일이었으므로 향후 '카지노 로얄'은 두 번이나 더 영화로 제작되기에 이른다. 아무튼 훗날 22편의 정식 시리즈물과 2편의 외전으로도 제작된 최강의 프랜차이즈의 주인공이 될 제임스 본드의 첫 배역을 맡은 배리 넬슨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화려한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TV용 에피소드 답게 [카지노 로얄]은 액션도, 이국적인 볼거리도 찾아볼 수 없다. 넬슨은 2007년 4월을 끝으로 세상을 떠났다.
2.숀 코네리
EON 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첫 번째 007 프랜차이즈는 애초에 [썬더볼 작전]이 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판권관계로 인해 'Dr.No'가 선택되었고 국내에는 [007 살인번호]로 소개된 이 작품이 사실상 최초의 극장용 제임스 본드 영화가 되었다. 사실상 당시만해도 이언 플레밍의 소설 자체가 그다지 대중적이지 못했던 관계로 제작진은 본드 역을 유명배우에게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거론되었던 배우들을 살펴보면 캐리 그랜트, 패트릭 맥구한, 제임스 메이슨, 데이빗 니븐, 심지어 (비공식적인 기록이긴 하지만) TV 시리즈물 [세인트]로 알려진 로저 무어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감독인 테렌스 영은 조연배우로서 비교적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온 리처드 존슨을 원했으나 장기간의 계약에 부담을 느낀 존슨의 거부로 무산되었다.
ⓒ 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결국에는 덩치가 크면서도 우아한 움직임을 지닌 스코틀랜드 출신의 무명배우 숀 코네리가 본드 역에 낙점되었다. 최초의 극장용 영화에서 정통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를 구축한 코네리의 영향력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여전히 막강하다. 그의 터프하면서도 신사적이고 때론 능글맞은 이미지는 이후의 후임자들이 넘볼 수 없는 '원조 제임스 본드'의 트레이드 마크로 남아있다.
그는 무려 6편의 정규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를 연기했으며, 시리즈를 떠난 후에도 [썬더볼 작전]을 리메이크한 비공식 007 영화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으로 컴백해 올드팬들의 향수를 자극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후임 007이 시리즈를 떠나면서 배우로서의 커리어가 별볼일 없었던 것에 반해 노년을 맞이할 때까지 액션스타의 인기를 누린 것을 보면 숀 코네리 라는 배우가 가진 남성적 매력이 어느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3.데이빗 니븐
[007 살인번호]에서의 캐스팅 명단에 데이빗 니븐의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는 건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TV시리즈 [클라이막스!]의 에피소드와 관련해 판권이 따로 팔려나갔던 '카지노 로얄'은 EON 프로덕션의 권한밖에 있었던 유일한 007 시리즈였다. 1960년에 '카지노 로얄'의 판권을 손에 쥔 찰스 펠트만은 숀 코네리 없이 영화화를 진행한다는건 불가능하다는 판단하에 EON측과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조건에 합의점을 찾지 못한채 단독으로 [카지노 로얄 (1967)]의 제작에 착수하게 된다.
이때 제임스 본드로 캐스팅된 인물이 명배우 데이빗 니븐이었다. 하지만 숀 코네리가 가졌던 제임스 본드의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너무나도 신사적인 품위를 지닌 배우였으며 (심지어 니븐의 트레이드 마크인 콧수염도 그대로다) 따라서 영화상에서도 제임스 본드 '경'으로서 실제적인 일선에서 한발 물러선 상태로 묘사된다.
ⓒ Columbia Pictures Corporation/Famous Artists Productions. All Rights Reserved.
엉망진창의 패러디 영화로 제작된 [카지노 로얄 (1967)]의 내용답게 MI6의 수장에 오른 제임스 본드 경은 모든 에이전트를 '제임스 본드'라 부르기로 결정하며 따라서 피터 셀러스를 비롯한 다양한 배우들이 엉겹결에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그럼에도 [카지노 로얄 (1967)]에서의 '정식' 제임스 본드는 데이빗 니븐이었으며, 숀 코네리 이전에 [007 살인번호]의 캐스팅 후보로 올랐던 이력이 무색할 정도로 데이빗 니븐의 제임스 본드는 희극적인 인물이 되어 버렸다. (카지노 로얄 리뷰 참조)
4.조지 레젠비
숀 코네리가 [두 번 산다]를 끝으로 '더 이상의 제임스 본드는 그만!'을 선언한 이후 차기작 [여왕폐하의 007]의 프로젝트는 EON 프로덕션에게 상당한 고민을 안겼다. 우선 [두 번 산다]의 완성도 자체가 상당히 실망스런 수준이었는데다 이 작품이 그나마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건 원조 007 숀 코네리의 이름값 덕택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이제 그마저 프로젝트를 떠났으니 말그대로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기서 제작진은 모험을 택한다. 테렌스 영과 가이 해밀턴이라는 검증된 감독 대신 피터 R. 헌트를 새 감독으로 영입하고 약 3000명이나 되는 후보군 중에서 연기경력이라곤 전무했던 모델출신의 조지 레젠비를 차기 제임스 본드로 발탁한 것이다! 호주출신의 레젠비는 스코틀랜드 태생의 숀 코네리 와는 풍기는 분위기부터가 달랐다.
그럼에도 조지 레젠비를 발탁한 이유는 그가 각종 격투기의 달인이었다는 점. 코네리보다도 젊고 터프한 이미지를 가졌다는 점, 세계적인 모델 출신답게 슈트빨이 잘 받는다는 장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만능 스포츠맨인 그는 오프닝인 '건 베럴' 시퀀스에서 몸을 틀어 무릎을 꿇으며 방아쇠를 당기는 고난도의 동작을 소화해 내는 등 숀 코네리와는 사뭇 다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 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하지만 그러한 장점들은 '원조 제임스 본드' 숀 코네리의 그림자를 지우기에 역부족이었다. 그의 액션은 실전에는 통했을지 몰라도 카메라 앞에서는 너무 밋밋하게 보였으며 (이래서 배우에게는 '연기'가 생명인 거다), 레젠비 자신만의 개성이 있으면서도 무리하게 숀 코네리 식 본드를 따라가게 하려한 제작진의 판단 미스 덕분에 뚜렷한 캐릭터 구성에도 실패했다.
또한 시리즈가 특수무기에 의존하는 식의 황당무계한 스파이물로 흐르던 것과는 달리 원작에 입각한 사실적인 첩보물을 지향했던 점은 비록 영화의 완성도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으나 시리즈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마는 아이러니를 낳았다. 결국 레젠비는 [여왕폐하의 007] 한편으로 제임스 본드에서 물러 났으며 EON은 차기작 [다이아몬드는 영원히]에서 다시 한 번 숀 코네리를 영입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분들이 아시는 것과는 달리 조지 레젠비는 이 한편으로 제임스 본드와 작별을 고한 것은 아니다. 007의 아류작에서 출발한 첩보물의 연장선인 [돌아온 0011 나폴레옹 솔로 (The Return of the Man from U.N.C.L.E.: The Fifteen Years Later Affair, 1983)]에서 조지 레젠비는 J.B.라는 캐릭터로 등장하는데, 이는 두말할 나위 없이 James Bond의 약자이며, 단지 판권분쟁을 고려한 일종의 편법이었을 뿐이다. 특히 이 작품에서 한 여성 캐릭터는 그에게 "It's just like Her Majesty's Secret Service." 라며 조지 레젠비가 출연한 [여왕폐하의 007]을 은연중에 암시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돌아온 0011 나폴레옹 솔로]는 숀 코네리가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으로 컴백한 1983년도에 나왔다.
5.로저 무어
007 시리즈의 창시자 알버트 R. 브로콜리의 회고록 'When The Snow Melts'에 따르면 [007 살인번호]의 첫 번째 본드 역으로 고려되었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1967년까지 로저 무어는 제임스 본드와 어떠한 연계점도 없는 것으로 되어 있고, 그가 처음으로 본드 역을 맡은 것은 1973년 [죽느냐 사느냐]를 통해서다. 무명이나 다름없었던 숀 코네리나 조지 레젠비와는 달리 무어는 TV시리즈 [세인트]로도 어느정도 이름이 알려진 배우였다. 그리고 숀 코네리 보다 나이가 많았던 무어는 무려 45세에 처음으로 본드 역을 맡았지만 특유의 동안과 핸섬한 이미지로 이를 극복했다.
ⓒ 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하지만 여전히 액션 영화인 007 시리즈의 성격상 로저 무어의 나이는 부담을 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로저 무어의 제임스 본드는 숀 코네리, 조지 레젠비가 보여주었던 터프한 마초적 캐릭터가 아닌 전형적인 영국 신사의 기사도를 풍기는 부드러운 이미지로 변모했다. 이는 기존 팬들에게 있어서 많은 위화감을 주긴 했으나, 재치있는 유머와 핸섬한 플레이보이 이미지를 가미한 무어의 본드는 오히려 원작 속의 캐릭터에 더 가깝게 다가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레젠비와는 달리 무어의 007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은 그가 코네리의 스타일과는 완전히 다른 캐릭터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로저 무어는 무려 7편의 정식 시리즈를 찍으며 최다 007 영화의 출연을 기록했고, (코네리도 7편이긴 하나 그 중 한편은 외전이다) 7,80년대 극장가를 찾았던 팬들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숀 코네리 보다도 먼저 제임스 본드를 떠올리게 만드는 인물로 자리잡았다. 그럼에도 로저 무어가 출연한 작품들은 그 완성도에 있어서 편차가 매우 심하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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