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부 -
6.티모시 달튼
[뷰투어킬]로 다 늙어빠진 노인네의 주책쇼를 보여준 로저 무어가 은퇴를 선언하자, 제작진은 다시한번 고민에 빠진다. 무어는 숀 코네리 만큼이나 오랜시간 제임스 본드로 군림했고, 그를 대체할 만한 배우를 찾는다는 건 결코 쉬운일이 아니었다. (일부 알려진 사실과는 달리) 티모시 달튼은 로저 무어의 뒤를 이을 첫 번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에니메이터 (Brenda Starr)]라는 작품에 출연중이었고, 그 외에도 두편의 영화가 더 계약된 상태였다.
EON측은 다음으로 샘 닐을 영입하기 위해 스크린 테스트를 했으나, 실권을 쥔 알버트 브로컬리에 의해 최종적으로 거부당했다. 다음으로 영입대상이 된 것은 피어스 브로스넌이었다. 그러나 그는 NBC와 계약한 [레밍턴 스틸]의 출연문제로 눈물을 머금고 본드 역을 거절해야 했다. 달튼의 대안을 찾느라 시간을 보내는 동안 어느덧 [에니메이터]의 촬영이 완료되었고 달튼은 예정대로 007의 차기작 [리빙 데이라이트]에 합류할 수 있었다.
ⓒ 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사실 티모시 달튼이 제임스 본드를 제안받은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는 코네리가 본드 역을 고사한 직후에 [여왕폐하의 007]에 캐스팅 제의를 받았으나, 그 역을 맡기엔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스스로가 배역을 고사한 바 있었다. 1970년대 후반에 다시한번 본드 제의를 받은 그는 자신이 생각했던 본드와 제작사가 요구한 본드의 이미지가 상충된다고 생각해 역시 거절하게 된다. 이후에도 그는 [유어 아이즈 온리]와 [옥토퍼시]의 제작때에도 연달아 본드역을 제안받았으나 성사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다섯 번째 제안을 받은 [리빙 데이라이트]에 와서야 제임스 본드 역을 승낙했다. 12년간 장기집권한 로저 무어의 영향력이 제법 만만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야성미가 흐르면서도 지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갖춘 달튼은 그러한 우려를 잠재우며 성공적으로 데뷔, 새로운 제임스 본드의 시대를 알렸다.
달콤한 로맨티스트의 느낌이 강했던 무어와는 달리 현실적이면서 '첩보원'의 이미지에 최대한 가깝게 포장된 달튼의 제임스 본드는 원작에 근접한 리얼리티를 살리면서도 정극 배우의 이력에 걸맞은 훌륭한 연기력을 선보이며 팬들의 기대치를 한껏 높혀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차기작 [살인면허]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뛰어난 연기력에 비해 어설프기 짝이 없던 달튼의 액션과 엇박자를 이루는 각본의 부실함 속에 [살인면허]는 상당한 혹평에 시달려야 했다.
할 수 없이 달튼은 2년뒤에 개봉될 차기작 007을 통해 [살인면허]에서의 불명예를 씻을 기회를 노리게 되지만 그에게 3번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썬더볼 작전]의 판권을 가지고 있던 케빈 맥클로리가 [네버 세이 네버 어게인]의 성공에 고무되어 90년대 들어 또 한번의 리메이크작을 만들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이로인해 EON 프로덕션과 맥클로리 사이에 소모적인 소유권 분쟁이 발생하여 차기작의 제작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된 것이다. 결국 전임자의 그늘에서 벗어나는데 성공했으면서도 그 기회를 채 살리지도 못한채 티모시 달튼은 단 두편만에 007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불운의 제임스 본드가 되고 만다.
7.레그 가드니
[살인면허]가 개봉되던 해인 1989년 제임스 본드 시리즈의 작가 이언 플레밍의 생애를 다룬 [골든아이(1989)]란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것은 1995년작 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다) 실제 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해군 정보부에 근무한 경력을 가진 플레밍이 어떻게 스파이 소설의 금자탑을 이룬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쓰게 되었는지를 조명한 이 작품에서 잠깐 제임스 본드가 등장하게 되는데, 여기서 본드 역은 [골든아이(1989)]의 각본을 쓴 레그 가드니가 맡았다.
8.피어스 브로스넌
브로스넌이 제작자 알버트 브로컬리를 처음 만난건 [유어 아이즈 온리]의 촬영때였다. 그의 당시 아내가 영화에 출연했기 때문이다. 브로컬리는 당시에 "그(브로스넌)가 연기를 할 수만 있다면....(로저 무어의 뒤를 이을) 내 사람이 될텐데" 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무어가 은퇴를 선언했을 때 브로스넌에게는 본드 역을 맡을 수 있는 찬스가 있었다. 그러나 NBC의 [레밍턴 스틸]에 발이 묶인 그는 눈물을 머금고 007을 포기해야만 했다.
한편 브로스넌을 대신해 본드 역을 가져간 티모시 달튼은 [살인면허]의 실패를 만회할 차기작 [여인의 소유 (The Property of a Lady)]에 출연하기로 되어있었다. 그러나 007 프렌차이즈의 소유권에 대한 법적 잡음이 거세지면서 [여인의 소유] 프로젝트가 사실상 중단되어 무려 6년이나 제임스 본드는 세상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더불어 냉전시대의 종식으로 인한 세계적 정세의 변화도 007 시리즈를 한껏 위축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결국 헐리우드는 냉전의 산물인 제임스 본드 보다는 톰 클랜시의 잭 라이언 시리즈 같은 포스트 제임스 본드 세대의 첩보물에 더 많은 관심을 쏟았다.
[007 살인면허]이후 무려 6년만에 나온 [골든아이]는 원래 티모시 달튼을 위해 쓰여진 각본이었다. 그러나 달튼은 이 역할을 고사하였고 이에 EON은 그동안 눈독을 들여왔던 피어스 브로스넌에게 본드 역을 제의, 계약에 전격적으로 합의하게 된다. 브로스넌은 3번의 시리즈에 출연하는 것과 나머지 한편은 그때가서 출연여부를 결정하는 옵션계약을 체결했고 실제로 그는 4편의 제임스 본드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 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제법 긴 공백이 있었음에도 브로스넌이 출연한 [골든아이]는 007 역대 최고의 흥행기록을 갱신했고, 이후 제작된 세 편의 작품도 내리 흥행에 성공하는 등, 숀 코네리 이후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제임스 본드로 평가 받는다. 역대 제임스 본드 중 소설속의 캐릭터와 가장 유사한 이미지를 보여주었다는 것도 브로스넌의 장점으로 손꼽힌다. 역대 제임스 본드의 장점만을 뽑아 섞어놓은 듯한 그의 완벽한 캐릭터는 [골든아이]이후의 작품들이 비교적 허술한 플롯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즈를 성공시키는데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그가 너무 늦은 나이(42세)로 본드 역에 데뷔했다는 것은 로저 무어의 경우처럼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어쩔 수 없이 액션의 상당부분은 특수무기와 2000년대 들어 눈부신 성장을 이룬 CG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브로스넌의 마지막 작품 [어나더 데이]는 007 본연의 맛이 사라진 평범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로 변질되고 말았다. 결국 50세를 눈앞에 둔 시점에서 그는 [카지노 로얄]의 출연을 포기했고, '제이슨 본'이라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한 시점에서 변화를 필요성을 직감한 EON의 관계자들은 시리즈의 리부팅을 위해 큰 모험을 감행한다.
9.다니엘 크레이그
[어나더 데이]의 차기작에서 누가 본드가 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한동안 지속되었다. 이미 계약이 완료된 브로스넌이 한 번 더 본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제임스 본드를 섭외할 것인가를 놓고 많은 의견이 오고 갔지만 결국 브로스넌은 은퇴를 선언한다. 휴 잭맨, 이완 맥그리거 등 많은 배우들이 물망에 올랐으나 2005년 10월 23일, 다니엘 크레이그가 총 5편의 007 영화에 출연하는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
이 캐스팅을 두고 팬들은 경악했다. 기존의 본드와는 달리 다소 험상궂은 외모의 크레이그는 [로드 투 퍼디션]에서 악역으로 출연한 경력도 있었으며, 무엇보다 '금발머리'였다. 일부 과격한 팬들은 안티-크레이그 사이트(craignotbond.com 지금은 폐쇄)를 개설해 다니엘 크레이그의 캐스팅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할 정도로 크레이그의 캐스팅은 상당한 논란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동료 배우들은 다니엘 크레이그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보냈다. 가장 두드러진 점은 5명의 선배 제임스 본드 중 무려 4명 (숀 코네리, 로저 무어, 티모시 달튼, 피어스 브로스넌)이 크레이그의 캐스팅에 대해 호평을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크레이그 이전에 제임스 본드 역으로 유력하게 고려되었던 (그러나 본인 스스로가 고사했던) 클라이브 오웬 조차 BBC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얄팍하거나 거치레가 아니다. 그들(EON)은 정말로 진지한 배우를 캐스팅한 것이다 (He is not shallow or posing, they have cast a really serious actor)"라며 크레이그의 캐스팅에 대해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 EON Productions/MGM-UA Studios. All Rights Reserved.
아니나 다를까, [카지노 로얄]이 개봉된 시점에 크레이그를 둘러싼 온갖 잡음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특수장비 하나 없이 오로지 몸빵으로 버티는 터프한 제임스 본드의 모습은 21세기 첩보물의 이정표를 세웠던 제이슨 본 시리즈에 대항할 만큼 높은 리얼리티를 선사했다. [여왕폐하의 007]과 [살인면허]에서 시도했다가 번번이 실패했던 리얼리즘의 제임스 본드를 비로소 완성시킨 것이다.
다니엘 크레이그의 장점은 브로스넌으로 오면서 평면적인 캐릭터로 전락한 제임스 본드에 감정적 깊이를 더했다는 점이다. 티모시 달튼 처럼 꾸준히 정극 연기자로 연기력을 쌓아온 그의 경력이 알려주듯 크레이그에게는 진지한 제임스 본드를 소화해낼 만한 충분한 역량이 있었으며, 이에 더해 달튼에게는 없었던 재능, 즉 액션에 걸맞은 훌륭한 근육질 몸까지 크레이그는 갖췄다.
천부적인 재능을 발휘한 다니엘 크레이그는 이제 제임스 본드로서만이 아니라, 어떤 역할이 주어져도 충실하게 해낼 수 있는 알짜배기 배우로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개봉될 [퀀텀 오브 솔러스]를 통해서 [카지노 로얄]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다른 모습을 보여줄 예정이다.
10.다코 벨그레이드
패러디 무비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는 제이슨 프리델버그-아론 셀처 콤비의 [에픽 무비] 중에서 제임스 본드가 잠시 스쳐지나가는데 여기서 다코 벨그레이드라는 단역배우가 본드 역을 맡았다. [에픽 무비]에서는 제임스 본드라는 이름조차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캐스팅 크래딧에 제임스 본드로 나와 있어 소개했으니 참조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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