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열전(古典列傳) No.2
한국 최초의 극장용 장편 애니메이션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시는 분은 아실테지만 1967년 1월 21일에 개봉된 [홍길동]이 바로 그 첫 번째 작품입니다. 당시 '소년 조선일보'에 연재중이었던 신동우 화백의 [풍운아 홍길동]을 원작으로 삼아 형인 신동헌 화백이 감독을 맡은 이 작품은 125,300장의 셀을 1년간 수작업으로 그렸는데요 (참고로 1988년작 [아키라]의 경우, 135,000장의 셀이 사용되었음), 제작비만 5,400만원이나 든 (이 금액은 당시 실사영화 10편을 제작할 수 있는 막대한 거금이었음) 블록버스터급 대작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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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거의 맨땅에 해딩하다시피 제작된 [홍길동]이었지만, 상영 4일만에 관객 수 10만 명을 돌파하는 대박을 터트렸고 그 해 극장 상영작 중 흥행 2위의 흥행성적을 달성하는 등 애니메이션의 불모지인 한국의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홍길동]이 보여준 높은 수준의 완성도는 아마 지금 보아도 경탄스런 수준입니다.
하지만 [홍길동]의 흥행성공에도 불구하고 [홍길동]에 참여했던 세기상사는 제 밥그릇 챙기기에만 몰두해 흥행 수익을 고스란히 가져가고 재투자를 하지 않은 까닭에 정작 신동헌 감독 자신은 차기작을 위한 제작비 회수는 커녕, 심한 재정적 압박에 시달리고 맙니다. 신감독은 [홍길동]의 개봉 몇시간 전까지 필름 편집작업을 하는 극도의 인력난에 시달렸지만, 오히려 세기상사는 이를 트집잡아 '납품기일'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계약서에 명시된 보수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제작사의 행태에 심한 배신감을 느낀 두 형제는 세기상사와 단호하게 결별을 선언하고, 극동흥업과 손잡아 제작비 지원을 약속받습니다. 어렵게 제작비를 해결한 이들은 '대영동화제작소'를 근거지로 제작에 돌입하게 되는데, 이렇게 제작된 작품이 바로 [호피와 차돌바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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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극동흥업에서의 제작비 지원규모는 전작인 [홍길동]처럼 큰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총 제작비는 800만원, [홍길동]의 5400만원에 비하면 약 1/7 수준이었지요. 따라서 작화수도 줄일 수밖에 없었는데 [호피와 차돌바위]에 사용된 셀 작화는 약 60000장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홍길동]의 강행군으로 얻어진 노하우가 있었기 때문에 신동헌, 신동우 형제는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서 전작에 결코 뒤지지 않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우선 [호피와 차돌바위]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 홍길동과 헤어진 뒤 차돌바위는 자신의 스승이 되어줄 검술의 달인을 찾아 유랑길에 오릅니다. 그러다 늑대들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준 호피라는 인물을 알게 되는데, 그는 관가에서 지명수배자로 점찍어 놓은 도적이었습니다. 한편, 차돌바위는 자칭 호피라고 사칭하는, 좀 덜떨어진 괴력의 소유자 곰쇠를 만나 그와 함께 동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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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탐관오리인 최진달 대감은 북쪽 오랑캐 마술사 '도마술 장군'에게 이 나라를 바친다는 문서와 함께 금은보화를 실어보내다가 호피에게 습격당해 몽땅 빼앗기고 맙니다. 이제 비상이 걸린 최진달은 한때 호피의 스승이었지만 실상의 파계승인 골반대사에게 해결사 노릇을 부탁하게 되지요. 골반대사와 호피의 첫 대결은 무승부로 돌아가지만, 이를 피해 달아나던 차돌바위 일행과 호피는 '삭풍선생'이라는 괴노인을 만나게 되어 최진달의 진짜 목적과 그 배후에 대해 알게 됩니다.
이제 개과천선하게 된 호피는 삭풍선생에게 자신의 아버지가 최진달의 모함으로 죽게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어 복수심에 불탑니다. 그리고 삭풍선생에게 비장의 기술을 전수받지요. 반면 차돌바위와 곰쇠는 호피가 빼앗은 보물을 마을사람들에게 돌려주러 가던 도중에 그만 최진달의 하수인들에게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제 이들을 인질로 잡은 최진달 일당과 정의의 편으로 돌아선 호피의 한판 대결이 펼쳐지는데, 과연 옛 스승인 골반대사와 호피의 대결은 어떻게 승부가 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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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호피와 차돌바위]는 전작에 못지 않은 흥행성적을 거두었고, [홍길동]에 버금갈 정도로 한국 애니메이션사에 주목할 만한 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홍길동]에서 조연으로 등장했던 차돌바위라는 캐릭터를 주연급으로 내세운 일종의 '스핀오프'라는 점에서 그러한데요, 사실 이런 '스핀오프'의 개념조차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시점에서 이같은 발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흥미로운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한가지는 작품의 내러티브가 풍부하고, 플롯이 상당히 자연스러우며 설득력있게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단지 '동화'만 잘 그리면 되는것이 아니라 스토리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본보기를 보여준 것이기도 한데요, 이같은 작품의 질적인 수준은 사실상 이웃나라 일본과 크게 차이가 없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다시말해 이때만 하더라도 일본과 우리나라는 같은 출발선상에 있었다는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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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제작비의 축소와 여러 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신동헌 감독은 [홍길동]과 마찬가지로 선녹음,후작화 방식을 고집해 미국 디즈니의 대자본 애니메이션들과 비슷한 눈높이에서 작업을 진행시켰습니다. 덕분에 [호피와 차돌바위]는 제 3회 테헤란 아동영화제에 출품되었고 1969년도에는 대만에 수출이 되는 등 대외적으로도 인정받는 작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매우 안타깝게도 신 브라더스는 제작사에게 또한번 뒤통수를 얻어맞아야 했습니다. 일전의 세기상사 때와 마찬가지로 제작사의 횡포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지요. 결국 모든 열정은 열정대로 바치고, 고생을 고생대로 했던 이들에게 주어진 것은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 1,2호를 만들고 흥행에 성공시켰다는 허울좋은 명예뿐이었습니다. 이에 환멸을 느낀 이들은 결국 이 두편의 작품을 끝으로 애니메이션계를 떠납니다.
이는 정말로 한국 애니메이션계에 있어서 돌이킬 수 없는 큰 손실이었습니다. 만약 이들에게 제작비를 대주었던 제작사측에서 미래를 내다보고 좀 더 적극적으로 투자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더라면 '애니메이션 강국'으로서의 위치는 일본이 아니라 한국이 차지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무튼 이런 근시안적인 사고와 제 밥그릇 챙기기의 속물적 관행은 한국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퇴보하게 만든 단초를 제공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열불나는 사실이지요.
[호피와 차돌바위]는 신 브라더스의 내공이 집대성 된 작품으로서 풍부한 액션과 유머,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고유의 토속적인 역사를 소재로 삼았다는 데에 큰 의미를 둘 수 있습니다. 하물며 1995년에 신동헌 감독의 이름을 내걸고 만든 한일합작 애니메이션 [돌아온 영웅 홍길동]은 원기옥을 쏴대는 홍길동을 표현한 왜색짙은 설정만으로도 무릎꿇고 반성해야 함돠. ⓒ 돌꽃컴퍼니. All rights reserved.
그나마 다행인 것은 원본필름이 유실된 것으로 여겨졌던 [홍길동]의 필름을 기적적으로 발견해서 복구가 이루어져 상영회까지 가졌다는 사실입니다. 잊혀진 우리의 보물같은 작품들을 이렇게나마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사스런 일인지 모릅니다. 하나라도 많은 작품들이 제대로 복원되어 다시금 관객들에게 선보일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랄 뿐입니다.
* [호피와 차돌바위]의 리뷰에 사용된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돌꽃컴퍼니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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