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 번져가는 미드 열풍을 보면 필자가 어린시절 자라오면서 봐왔던 미국 드라마들이 기억나곤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필자는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드라마를 좋아했는데, 외부의 자극을 받으면 변신하는 헐크라는 캐릭터가 너무나도 매력적인 이 작품은 당시 필자와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들이라면 누구나 넋을 놓고 바라보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어느덧 헐크는 잊혀졌다.
세월이 흘러 슈퍼 히어로를 스크린으로 불러내는 작업이 하나 둘 진행되기 시작했는데, 2002년 샘 레이미 감독이 만든 [스파이더맨]의 대성공은 드디어 코믹스와 애니메이션의 영역내에 갇혀있던 히어로들의 상품적 가치를 극대화시킨 기폭제가 되었다. 이듬해 대만출신 감독 이안이 마블사의 '헐크'를 다시금 부활시킨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어릴적 [두 얼굴의 사나이]에 열광했던 소년들은 꽤나 큰 기대감을 가졌으리라. 과연 동양인 감독의 시선으로 바라본 미국산 슈퍼 히어로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1.[두 얼굴의 사나이]와 [헐크] |
사실 서두에서 언급한 [두 얼굴의 사나이]는 일부 원작의 팬들에게 있어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당연하게도 코믹스 버전의 헐크에 비해 실사판으로 등장한 헐크의 모습은 (비록 보디빌더 출신의 루 페리노라는 거구의 사나이가 연기했음에도)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였고, 몇십Km를 한번에 점프하는 원작속의 캐릭터와는 다소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인들의 자화상을 표현하는 현실감있는 스토리로 인정받아 '슈퍼히어로'로서의 헐크라기 보다는 드라마속 캐릭터로 성장해 무려 87부작에 달하는 인기 시리즈가 되었다.
ⓒ Marvel Productions/Universal TV. All rights reserved.
아이러니하게도 초반에 원작의 팬들로부터 원성을 들었던 TV판 [두 얼굴의 사나이]의 '헐크'는 원작속의 헐크를 뛰어넘어 팬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따라서 이안 감독의 [헐크]가 비교될 대상은 바로 코믹스의 헐크가 아닌 TV판 [두 얼굴의 사나이]일 수밖에 없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예고편으로 공개된 영상의 헐크는 과거 [두 얼굴의 사나이]를 보고자란 세대(특히 한국의 팬들)에게 있어서는 무척이나 낯선 것이었다.
2.원작으로의 회귀 |
그러나 '헐크'의 원작팬들은 사실상 이안 감독이 내놓은 [헐크]야 말로 원작으로 돌아간 진짜 헐크라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실제로 [헐크]의 화면을 보면 만화책의 지면처럼 화면분할되는 컷을 상당히 많이 채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헐크]의 원작이 코믹스라는 것을 줄기차게 강조하는 이안 감독의 의지이기도 하다. 따라서 총에 맞아도 끄떡없고, 지면 위를 점프만으로도 거의 날아다니다시피하는 헐크의 과장된 초능력은 [두 얼굴의 사나이]의 사실성과는 다를지언정 원작의 설정과는 매우 가까운 것이라 하겠다.
ⓒ Universal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3.이질적인 블록버스터 |
하지만 [헐크]는 기대 이하의 결과를 낳았다. 애당초 [스파이더맨]이나 [엑스맨] 등의 흥행성적을 기대한 것 자체가 무리였다. 많은 사람들은 [헐크]를 유사 히어로 영화처럼 화끈한 블록버스터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았지만 영화시작 1시간이 넘도록 주인공 '헐크'가 등장하지 않는 황당함에 분개해 스스로 '헐크'가 될뻔했다. 지나치다 싶을만큼 세세한 사전설명은 오히려 지루함을 안겨주었으며 주인공의 내면에 잠재하고 있는 분노라는 테마역시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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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반부 들어 등장하는 헐크는 예상대로 원작의 캐릭터와 많이 닮아 있지만 실제 배우가 아닌 CG로 표현되는 캐릭터가 여타의 슈퍼히어로물과는 다른 이질감을 선사한다. 그나마 조금 있는 액션도 심히 빈약할뿐더러 헐크의 힘에 필적할 만한 악당과의 대결도 싱겁게 마무리 된다. 물론 이해는 간다. 이안 감독 자신이 이런 액션 블록버스터에 어울리는 사람도 아닐뿐더러, 제작자인 게일 앤 허드 조차 정체성의 갈등을 겪는 브루스 배너에 초점을 맞추려고 했다니 마치 액션 블록버스터인냥 눈속임한 예고편은 처음부터 그 방향을 잘못 잡았던 것이다.
4.너무나 진지한 슈퍼히어로 |
[헐크]는 확실히 고뇌하는 영웅상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배트맨]이나 [엑스맨] 또는 [스파이더맨]으로 계승되는 히어로 영화의 트랜드에 부합하는 작품이다. 그러나 [헐크]에서는 한가지 빠진 것이 있다. 바로 미국 히어로 특유의 영웅 심리와 오락적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안 감독은 자신의 장기인 드라마를 살리는 대신, 여름철 시즌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볼거리를 없앴다. 이것이 [헐크]가 밋밋하게 보이는 이유다.
ⓒ Universal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또한 마블 코믹스 원작의 특성상 저연령층을 타켓으로 놓고 있는 영화치고는 유머감각이 전무하다 시피하다. 거대한 몸뚱이의 녹색괴물인 헐크는 그 포악한 모습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으로 침울한 캐릭터이며, 또한 지나칠 정도로 진지하다. 그에게서 느낄수 있는 본질적인 감정이 '분노'가 아니라 '슬픔'이라는 사실은 이안 감독이 [헐크]를 너무 감성적인 시각을 바라본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오히려 헐크의 에너지원인 분노라는 감정은 단지 변신만을 위한 장치로 전락했다.
5.배우들 |
[헐크]에는 제법 이름있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한다. 그것도 오락영화와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연기파 배우들이 말이다. [블랙호크 다운]으로 얼굴을 알린 호주배우 에릭 바나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큰 배역에 도전했다. 그가 맞는 브루스 배너는 유약하고 순한 인물이긴 하지만 내면의 슬픔을 분노로 승화시켜 헐크로 변신하는 캐릭터를 비교적 무난하게 선보였다. 다만 배너 역의 전설적인 배우 고(故) 빌 빅스비를 뛰어넘기에는 다소 역부족인 듯 하다.
ⓒ Universal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또한 청춘스타에서 베테랑급 연기자로 성공적인 캐리어를 쌓은 제니퍼 코넬리나 원로의 반열에 들어선 닉 놀테, 샘 엘리엇, 그리고 잠깐이지만 얄미운 캐릭터로 등장하는 조쉬 루카스 등 풍부한 캐스팅을 자랑하지만 실상 이들의 존재감이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헐크]를 '심심한 영화'로 만드는 요인이다. 오히려 [헐크]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스팅은 까메오로 출연한 원작자 스탠 리와 '원조 헐크' 루 페리노의 깜짝 출연이 아닐까.
6.총평 |
이안 감독의 [헐크]는 완성도를 떠나 상업적으로 잘 포장된 작품은 아니다. 이미 많은 관객들이 지루함을 호소해온 만큼 영화적 재미는 여타의 히어로 영화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에 [헐크]가 처음부터 액션 블록버스터를 지향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그다지 실망스러운 작품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여전히 이 작품은 여러모로 심심하긴 하다.
그래서일까. 개봉을 앞두고 있는 속편아닌 속편 [인크레더블 헐크]는 출연진을 전면 교체함과 동시에 감독도 [트랜스포터]의 액션전문감독 루이스 르테리어로 바꿨다. 명실공히 액션 블록버스터로서의 헐크를 선택한 것이다. 과연 제작진들의 이러한 선택이 옳은것인지는 이번 작품을 통해 분명히 나타내게 될 듯 하다.
* [헐크]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Universal Pictures.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두 얼굴의 사나이 (ⓒ Marvel Productions/Universal TV.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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