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던 한국영화계에서 나름대로 분전한 작품을 꼽자면 딱 두편이 떠오른다. 하나는 다른 설명이 필요없을만큼 화제가 되었던 [디 워]이고, 또 하나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해 소리없이 700만관객을 가뿐히 돌파한 [화려한 휴가]다. 사실 한국의 근대사에서 가장 다루기 껄끄러운 소재를 가지고 이정도의 관객을 모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화려한 휴가]는 그 역할을 다했다고 봐야할 것이다. 그럼 [화려한 휴가]는 관객이 만족할만큼 그때 그날의 모습을 제대로 전달하고 있는가?
1. 5.18 민주항쟁의 묘사 |
그 참상을 알고서는 입밖에 차마 거론하기조차 힘든 이 사상초유의 유혈사태를 [화려한 휴가]는 어떻게 다루고 있나. 원래대로라면 [화려한 휴가]는 18금 등급의 작품이 되어야 했다. 그럼에도 12세 관람가의 매우 낮은 등급이 매겨졌다는 것은 그만큼 이 작품이 실제 있었던 일에 대한 묘사를 많이 완화했다는 뜻이다.
ⓒ CJ 엔터테인먼트(주) All Rights Reserved.
5.18 진압과정에서의 디테일은 살리되, 잔혹함은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간 것인데 이러한 타협점이 일부 관객들에게는 매우 못마땅하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화려한 휴가]의 고증은 나름대로 충실한 편이지만, 5.18의 충격을 전달하기엔 다소 약하다는 느낌이랄까. 그러나 한편으로 700만 관객돌파에는 이같은 수위조절이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도 든다.
2. 드라마적 요소 |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블러디 선데이]와는 달리, [화려한 휴가]는 각 캐릭터간의 드라마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특히 강민우(김상경 분)와 박신애(이요원 분)의 애정라인은 극의 애절함을 증폭시키기 위해 선택한 플롯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오히려 극의 흐름을 산만하게 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또한 박철민과 박원상을 비롯한 조연급 배우들의 코믹 연기는 사실상 12세 관람가 치고는 부담스런 폭력장면을 완충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나, 진지한 테마로서의 5.18 항쟁을 다루는 면에 있어서는 마이너스적인 요소다.
ⓒ CJ 엔터테인먼트(주) All Rights Reserved.
드라마적인 요소가 차지하는 비중을 줄이고, 항쟁의 현장을 좀 더 부각했더라면 5.18을 다룬 영화로서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그 점에 있어서 다소 아쉬움으로 남는다. TV드라마 [제5공화국]이 더 설득력있게 비춰지는게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3. 영화사적 가치 |
사실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는 [화려한 휴가]가 처음은 아니다. 장선우 감독의 [꽃잎]이나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은 모두 광주의 그날을 소재로 삼은 영화다. 그러나 이들 작품이 5.18의 정신적 트라우마에 보다 초점을 둔 반면 [화려한 휴가]는 항쟁의 현장 그 자체를 영화에 담았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다. 다만 앞서 언급했듯이 드라마적 요소의 비중을 지나치게 키운 나머지 관객들이 기대했던 사실묘사에 대한 부분은 많이 약해져 있으며, 이는 다음에 나올 작품들이 보완해야 할 문제로 남게 되었다.
ⓒ CJ 엔터테인먼트(주) All Rights Reserved.
사실상 [디 워]의 특수성을 배제한다면, 2007년 최대의 화제작이었음에도 영화의 작품성이 크게 각광받지 못했다는 점은 감정에 치우친 연출의 한계가 드러남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보다 냉정한 시각으로 관객들의 이성에 호소하는 작품이었다면 그 가치가 더 크지 않았을까.
4.기억될 만한 장면 |
극 중 박신애가 강민우를 살리기 위해 군인 한명을 사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문제는 박신애가 사람을 살리는 간호사라는 점인데, 이 아이러니한 장면에서 오열하는 이요원의 연기는 그녀의 필모그래피 중 단연 최고라고 볼 수 있겠다. 다만 그 외의 장면들에서 이요원의 연기는 여전히 어색하며,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는게 문제지만.
5.총평 |
[화려한 휴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주목받을 만한 작품이지만, 여기저기 보여지는 상업적 타협점과 다소 느슨한 연출력의 문제가 전체적인 평가를 깎아내릴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시민들의 입장에서만 이야기를 이끌어 가다보니, 이 사건의 또다른 희생자이자 소모품이었던 군인들의 모습을 단지 피에 굶주린 살인마 정도로 비춰진것도 어딘가 편협한 시각이라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물론 가해자의 입장에 선 그들이지만, 이 비극을 책임질 진짜 배후는 누구인가에 대한 논의조차 없이 군인 대 시민의 대결구도로 5.18을 조명한 것은 본질을 꿰뚫지 못한채 겉핥기에 그쳤다는 평가를 피해갈 수 없을 것이다.
ⓒ CJ 엔터테인먼트(주) All Rights Reserved.
다만 이제야 처음으로 광주항쟁을 정면에서 다룬 작품이 등장했고, 이는 앞으로도 상업 영화에서 민감한 화두를 다루는 노하우를 점점 쌓아갈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아마도 앞으로 제작될 강풀의 [26년]을 원작으로 다룰 영화에서는 기대치를 채울만큼의 작품성을 기대해 본다.
* [화려한 휴가]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CJ 엔터테인먼트(주)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2007/07/21 - 블러디 선데이 - 아일랜드판 '화려한 휴가'
'영화 > ㅎ'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핸콕 - 변종 히어로 영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다 (22) | 2008.08.04 |
---|---|
헐크 - 완급조절에 실패한 두 얼굴의 사나이 (56) | 2008.06.11 |
황금나침반 - 판타지 대작의 계보를 이어나갈 기대주? (57) | 2007.12.22 |
헤어스프레이 - 뚱녀는 즐거워 (25) | 2007.11.29 |
호미사이드 - 밋밋한 웃음, 개성없는 스토리 (0) | 2007.07.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