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년도 더 지나서 정말 오랜만에 글인데…. 타이밍이 참 애매하네요. 우울한 기분을 잠시 내려놓고 시작해 봅니다.
지난 10월 29일, 만화계의 거목이신 박기준 화백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얼마전 타계하신 박기정 화백님의 동생이자, [두통이] 시리즈로 한 시대를 풍미하셨지만 박기준 화백님의 만화에 대한 열정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죠. 이후에는 후학 양성을 위해 단순한 도제식 교육 (徒弟式敎育) 시스템이 아닌 학원을 도입했고, 대학 강단에도 서셨으며 최근까지도 한국만화사의 족적을 정리한 일에 최선을 다하고 계신, 그야말로 한국만화사의 산 역사라고 봐도 무방한 분이십니다.
사실 박기준 화백님은 제 세대에 있어서는 어쩌면 낯설고, 만화가로서는 많이 접해보지 못한 분일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제자이신 故 이상무 작가나 배금택 작가가 오히려 더 익숙하죠.
그럼에도 박기준 화백님은 개인적으로 저에게 참 특별한 작가로 기억되는데, 일화는 이렇습니다. 당시 국민학교 (네, 연식 나오죠?) 3,4학년 때쯤, 방과 후 학교 앞 문방구에서 어슬렁거릴 때입니다.
그 당시 국민학교 앞 문방구는 여느 동네에서 그랬듯이 별의별 물건을 다 갖다 놓고 팔 때였습니다. 심지어 20원짜리 전자오락기도 여러대 있었고, 사행심 조장하는 뽑기는 기본 옵션이었더랬죠. 학교가 마치고 찾아가는 문방구는 그야말로 복합문화공간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루는 문방구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는데, 그날 아마 문방구 쥔장께서 대청소를 하셨나 봅니다. 안 팔리는 재고며 뭐 이것저것 잡다한 물건들을 꺼내 놓고 바겐세일을 하고 있었지요. 저는 별 생각없이 먼지 수북하게 쌓인 만화책 더미에서 쓸 만한 녀석이 없나 뒤적거리고 있었는데, 운명처럼 한 작품에 끌려버렸어요. 그게 바로 이서방문고에서 출간한 [두통이 만세]라는 작품이었습니다.
그 당시만해도 가장 인기있었던 레이블은 단연 현대코믹스와 다이나믹콩콩이었고요, (심지어 클로버문고도 그 때는 한 물 간 시점이었음) 이서방문고는 말 그대로 마이너한 (혹은 절판된) 레이블이었는데, 처음 보는 작가의 생소한 작품이었지만 뭔가 재미있는 명랑물인가 싶어서 냉큼 집어들고 말았습니다.
집에 와서 “저 이 책 사왔어요”라고 말했더니, 의외로 모친께서는 “어? 박기준 작품이 아직도 나오나봐?” 하며 신기해 하시더군요. 부모님 세대에는 굉장히 유명한 작가였다고…
여하튼 집에 와서 읽기 시작하는데. 와~ 이건 뭐 말로 형언하기 힘든 느낌이었어요. 웃음도 있고, 캐릭터도 살아있고, 서사도 풍부한데, 너무나도 감동적인 거에요. 정말 한 백번은 넘게 읽었던 거 같은…..책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작품을 읽고, 나이가 좀 먹으니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옛날에 읽던 책들은 정리할 타이밍이 왔죠. 사촌동생에게 갖고 있던 만화책 전부를 넘겼고, 그렇게 사촌동생 녀석은 훗날 어마어마한 보물이 될지도 모르는 만화책들을 엿바꿔 먹게 됩니다.
그렇게 [두통이 만세]와의 인연은 잠시 끊어졌는데, 세월이 흘러 어렸을 때의 향수가 돌아올 무렵 그 시절 그토록 재미있게 읽었던 [두통이 만세]를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은 요원하기만 하더군요. 솔직히 만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불타오르고, 레트로문화에 집착하게 된 계기가 된 것도 이 작품 덕분이 아닐지…..
도저히 [두통이 만세]의 단행본을 구할 수 없자, 저는 생각을 바꿔서 아예 [두통이 만세]의 원래 제목인 [푸른하늘 저멀리]의 연재본을 찾아 전국을 찾아 다녔습니다. 그래서 결국 의지의 한국인 답게 [푸른하늘 저멀리]의 연재본 전체를 입수하게 되었죠. ([두통이 만세]는 <소년한국일보>에서 197회까지 연재된 작품입니다)
그리고 얼마전 한국만화박물관 프로젝트인 한국만화걸작선 30번째 작품으로 [두통이 만세]가 선정되어 곧 인쇄작업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반가운 소식이고 기쁜 일이죠. 때마침 박기준 화백님의 아드님과 연락이 닿게 되어 지난 29일에 화백님을 직접 만나 뵙고, 여러 말씀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화백님께서 직접 사인해 주신 책도 선물 받았고, 또 저의 부족한 저서인 [한국 슈퍼 로봇 열전: 만화편]도 선물로 드렸습니다. 무엇보다 그간 모았던 [푸른하늘 저멀리] 연재본 자료를 드렸더니 너무 좋아하시더군요. 만화사를 연구하시는 분 답게 집에 수많은 만화자료를 쌓아놓고 계셨지만 어느 날 침수로 인해 대부분의 자료를 폐기할 수 밖에 없었다고…. ㅜㅜ 그만큼 한국만화자료의 보관이 더더욱 시급한 문제입니다.
조금 두서없이 글을 적었습니다만, 한국만화의 연구나 복원, 발견은 이미 늦은 감이 있습니다. 특히나 조악한 품질의 종이 인쇄본으로만 존재하는 자료들은 언제 어떻게 없어져도 이상하지 않죠. 시장논리가 세상을 지배하는 현실이긴 하지만 팔리지 않는 책이라도 조금씩, 한권이라도 더 많이 복간 되어야 합니다. 아직 만화계 1세대 원로들이 생존해 계실 때 말입니다.
P.S: 일전에 이정문 화백께 [설인 알파칸]의 연재자료를 선물로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미 청강대학교를 통해 복간된 바 있지만, 당시의 복간본에는 2부에서 1회 분량이 빠졌고, 4부 <알파칸의 침입자편>이 통으로 누락되어 있었습니다.
직접 해당 연재본을 찾아서 화백님께 전달 드렸지만 여전히 4부의 한 에피소드는 행방이 묘연해서 소위 “완전판”을 내놓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월간 <새소년> 1969년 7월호 본지의 행방을 아시는 분께서는 꼭 좀 제보 부탁드립니다. ㅜㅜ 사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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