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전하는 말씀. [블레이드 러너 2049]를 보시기 전에 다음의 작품들을 예(복)습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1.블레이드 러너: 파이널 컷 –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세계관을 설명해 주는 전작이자, 인물의 관계, 주제 의식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습니다. 혹시 기관람인 분들이라도 한 번쯤은 복습하시는 게 좋습니다.
2.Black out 2022 -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프리퀄 격인 단편 애니메이션으로 감독은 그 유명한 [카우보이 비밥]의 와타나베 신이치로가 맡았습니다. 굉장히 흡입력이 강한 작품으로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자주 언급되는 ‘대정전’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3.2036: Nexus Dawn – 역시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프리퀄로서 구 레플리컨트 모델들의 반란과 대정전 사태로 인해 타이렐사가 몰락하고 레플리컨트의 생산이 중단되지만 ‘완벽한 순종’을 모토로 하는 신형 레플리컨트가 생산되는 계기에 대한 내용입니다.
4.2048: Nowhere to Run – [블레이드 러너 2049]의 1년 전 내용으로, 데이브 바티스타가 분한 레플레컨트 사퍼 모튼이 블레이드 러너에게 추적의 실마리를 주게 되는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상의 작품들은 무려 2시간 43분에 달하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세계관과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입니다.
제가 [블레이드 러너]를 처음 접했을 때가 아마 1989년 MBC에서 [서기 2019]년이란 제목으로 방영을 했을 때인 걸로 기억됩니다. 당시 해리슨 포드를 너무 좋아했고, SF 장르라면 환장을 했으니 엄청난 기대를 하며 브라운관 앞에 앉아 감상을 시작했지요. 신문 해설에 ‘미래 지구 세계를 그린 성인용 공상과학 영화’라는 설명이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말이죠.
그런데 왠걸. 영화가 너무 재미없는 겁니다. 추적추적 하루종일 비내리는 미래 세계의 풍경은 그야말로 보는 이를 우울하게 만들었고, 화끈한 액션도 없으며 뭔 말인지 도무지 이해 못할 현학적 수사들만 가득한 대사들이 오고 가는 느낌이었지요. 결국 쏟아지는 졸음을 참지 못하고 베티와 데커드의 마지막 결전이 벌어지는 중간 부분에서 TV를 껐던 기억이 있습니다.
단 몇 분 더 일찍 잠들기 위해 포기해버렸던 그 뒤의 내용에 [블레이드 러너]의 진짜 명장면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건 DVD라는 매체가 생긴 후였습니다. 당시 DVD는 감독의 코멘터리나 삭제 장면 등 VHS 시절 경험하지 못했던 풍부한 보너스가 수록되는 것이 특징이었고, 그러한 장점을 가장 잘 살린 작품이 바로 [블레이드 러너]였습니다.
감독판과 파이널컷이라는 최종 수정판을 거치며 여러 차례 반복 감상을 하면서 [블레이드 러너]에 대한 생각은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죠. 그리고 2008년 충무로 영화제 때 대한극장에서 큰 스크린으로 [블레이드 러너: 파이널 컷]을 보게되면서 이건 정말 시대를 앞서 나가도 너무 일찍 앞섰던 작품이었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그렇게 마니아들에게 먼저 입소문을 타고 ‘저주받은 걸작’이란 재평가를 받게 된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이 마침내 공개되었습니다. 최근 리메이크나 오랜 만의 속편 프로젝트가 꽤 많이 나오는 지라 기대만큼 불안이 큰 것도 사실입니다. 감독은 드니 빌뇌브. 최근 승승장구하고 있지만 그만큼 취향을 많이 타는 연출가죠.
결론부터 말해,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원작의 함의를 깨지 않으면서도 속편으로서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받아낸 작품입니다. 리들리 스콧의 세계관에서 이야기를 진행하지만 영화는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인 것 같으면서도 드니 빌뇌브의 영화스럽습니다. 느리고 정적인 전개, 그리고 스코어로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연출 방식은 명백한 드니 빌뇌브의 트레이드 마크이지요. 영화의 전체적인 톤은 리들리 스콧이 그렸던 몽환적이고 축축하며, 음울한 느낌을 재현했지만 드니 빌뇌브는 여기에 끈적거림과 건조함을 더했습니다.
하지만 위화감은 들지 않습니다. 전작을 굉장히 소중하게 다루고 있고, 실제로 이야기의 틀 또한 전작의 캐릭터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캐릭터의 비중은 데커드가 아닌 라이언 고슬링이 연기한 새로운 블레이드 러너에게 실려 있지요. 신기합니다. 단순히 전작의 느슨한 리메이크에 안주했던 J.J 에이브람스의 [스타워즈 ep.7: 깨어난 포스]와는 달리 [블레이드 러너 2049]는 확실하게 세계관을 확장시키고 있습니다.
비주얼은 전작의 오마주적인 수준입니다. 현대의 헐리우드 기술은 매우 발달했지만 [블레이드 러너]는 이미 아날로그 시절에 구현할 수 있는 디테일의 과잉을 한계치까지 뽑아낸 작품이기 때문에 사실상 본 작품에서 그 이상을 기대하긴 무리입니다. 로저 디킨스의 촬영은 매우 훌륭하긴 하나 전작만큼의 임팩트를 주기엔 아무래도 너무 지나친 주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특히 주목하고 싶은 건 바로 사운드입니다. 전술했듯이 드니 빌뇌브의 연출 방식은 스코어를 이용해 긴장감을 높이는 것인데, 이 작품에서는 사운드 믹싱과 더불어 스코어의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에 스크린 보다는 사운드가 확실한 상영관을 찾으시길 권합니다. 사실 반젤리스의 음악없이 [블레이드 러너]가 완성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웠는데 한스 짐머가 그 어려운 걸 해냈습니다. 완벽합니다. 블루레이가 출시되면 어떤 사운드를 들려줄지 벌써 기대되는군요.
단점도 있습니다. 일단 2시간 반이 넘는 긴 러닝타임은 큰 부담입니다. 게다가 감독의 느린 전개방식은 호불호가 강한 관객에게 반감을 줄 가능성이 큽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도 이미 여러 차례 영화들에서 다루어진 것이기에 본 작품의 테마는 조금 낡은 것 같다는 느낌도 듭니다. 뛰어난 전작의 후속이 갖는 숙명이겠지요. 결국 전작을 능가하는 속편의 반열에는 낄 수 없다는 얘기.
어쨌거나 괜찮은 속편입니다. 매너리즘에 빠진 작품도 아니요, 그렇다고 주눅이 들어 소극적으로 만든 작품도 아닙니다. 전작을 잘 연구했고, 30년의 공백에 대해 충분한 완충작용을 해주는 작품입니다. 어차피 드니 빌뇌브 감독에겐 손해보는 역할이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자신의 야심보다는 전작의 계승 쪽에 무게를 실어준 감독의 선택이 현명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P.S:
1.(강 스포) 숀 영이 나옵니다. 데헷~
2.에드워드 제임스 올모스 나옵니다. 오홋~
3.해리슨 포드의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만 이야기 내에서의 중요도는 매우 높다 할 수 있죠. 한동안 그의 정체가 레플리컨트냐 아니냐에 대한 논란이 있었습니다. 감독은 맞다하고 배우는 아닌 것으로 이해하고 연기했다고… 대충 레플리컨트라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만 이 작품에서도 명확한 답은 주지 않습니다. 아마 이는 영원한 떡밥이 될 수도..
4.3편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흥행여부가 불투명하긴 하지만요.
5.리들리 스콧이 현역이니만큼 그가 다시 메가폰을 잡길 바란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최근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보았듯, 1편의 감독이 항상 더 좋은 속편을 만드는 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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