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종일 직장 상사의 호통과 독촉에 시달리다가 늦은 밤 야근을 마치고 퇴근하면 기다리고 있는건 집사람의 잔소리와 아이의 찡찡거림이다. 만약 당신이 유부남이 아니라면 퇴근후에 기다리고 있는건 가족들이 아니라 공허와 외로움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을 테고. 아마도 대한민국에 사는 샐러리맨의 삶은 위의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을 것이다. 가끔은 현실을 도피해보고도 싶지만 상황이 여의치가 않다. 짜증나는 상사의 면상에 사표를 집어던지는 상상을 하면서 울화통 터지는 마음을 가끔 다스릴 뿐.
제임스 서버의 초단편 소설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에서 주인공 월터는 아내와 함께 외출을 나와있는 동안 온갖 공상을 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는 운전중에 엔진이 8개 달린 해군 수상기의 함장이 되기도 하며, 수술을 집도하는 명의로도 변신했다가 법정에서 지방검사에게 어퍼컷을 날리는 피고가 되기도 한다. 온갖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동안 그가 실제 한 일이라곤 방한화와 개사료를 산 것 밖엔 없다. 마지막엔 자신이 만든 그 공상 속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을 암시하지만 아마도 월터 미티의 무료한 일상과 공상의 반복은 계속 반복될 것임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1939년에 발표된 <월터 미티의 은밀한 생활>은 10년간 계속된 대공황의 여파로 피폐해진 중년 가장들의 처지를 대변한 풍자소설이다. 약 3페이지 분량의 짧은 소설임에도 이 작품은 제임스 서버의 대표작이 되었으며, 1947년에는 노먼 Z. 맥레오드 감독이 동명의 영화 [월터의 비밀 인생]을 만들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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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월터의 비밀 인생]은 원작에서 공상에 자주 빠져드는 중년 남성의 설정만 끌어왔고 주된 스토리는 온전히 창작이다. 우연히 주운 수첩으로 인해 유럽의 숨겨진 보물을 찾는 모험에 뛰어드는 일종의 미스터리 어드벤처물로 변모한 이 작품에서 월터는 자신이 그토록 원했던 극적인 삶을 마침내 손에 넣는다. 흥미롭게도 원작자 제임스 서버는 제작자인 사무엘 골드윈에게 영화를 포기하는 댓가로 1만 달러를 제안하기도 했는데, 나중에 영화가 나오고 난 후 서버는 이 영화를 '증오'하면서 월터를 연기한 대니 케이가 자신이 의도했던 캐릭터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2013년에 리메이크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1947년 작과 마찬가지로 제임스 서버의 원작과는 큰 연관성이 없다. 16년째 '라이프'지의 네거티브 필름 인화부서에 근무해 온 월터는 들어온지 얼마 안된 여직원을 남몰래 짝사랑하는 소심남이다. 살아오면서 특별한 경험을 해본 일이 없는 그는 따분한 샐러리맨의 일상에서 가끔 상상에 빠져 멍하니 서 있는 습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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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회사가 인수합병으로 인해 대규모 정리해고가 예고되면서 월터는 고민에 빠진다. 새로 부임한 이사는 월터를 무능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고, 사진작가 숀 오코넬이 보냈다던 '삶의 정수'가 담긴 25번째 필름은 행방이 묘연하다. 회사에서 25번째 필름을 '라이프'지 폐간호의 표지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자 월터는 필름을 받기 위해 사진을 보냈다던 숀 오코넬을 찾아 지구 반대편으로 먼 여정을 떠난다. 그리고 이 여정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했던 실제 모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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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스틸러가 감독과 주연을 겸한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복합적인 성격의 장르물이다. 25번째 필름이라는 맥거핀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모험과 퍼즐, 로맨스, 그리고 로드무비의 성격을 한데 모아 볼거리와 드라마를 동시에 잡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현실과 상상을 오가는 특수효과의 자연스러움과 그린란드, 아이슬란드, 히말라야의 풍광을 담아낸 비주얼은 제법 세련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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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패러디물은 아니지만 영화의 곳곳에서 다른 작품들에 대한 패러디 요소가 엿보인다. 가령 공항에 도착해 렌트카를 고르는 장면이 있는데, 빨간 차와 파란 차 중에서 빨간 마티즈를 선택하는 장면은 워쇼스키 남매의 그 유명한 [매트릭스]의 패러디다. 그 밖에도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라든가 [인 디 에어], [본 얼티메이텀]의 인용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식의 영화들이 대부분 그렇듯 상투적인 헐리우드식 드라마에 의존하는건 어쩔 수 없는 약점이다. 일상탈출의 수단으로 공상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무기력한 현대인의 삶에 대한 애환이 좀 더 드라마틱하게 소개되었다면 좋았겠지만 그토록 찾아 헤매었던 ‘삶의 정수’가 담긴 순간이 실은 평범한 일상의 한 조각이었음을 알게 되는 마지막 장면은 원작의 시니컬한 결말에 비해 훨씬 더 인간적이고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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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스틸러는 기존에 그가 맡아왔던 소심한 남자의 캐릭터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대신 안정적인 연기를 펼친다. (사실 무기력한 도시남의 멍한 눈빛을 표현하기에 이만한 배우도 드물다) 잠깐이지만 인상적인 숀 오코넬 역의 숀 펜이나 관록의 연기파 배우였던 셜리 맥클레인 등 조연진의 면모도 이채롭다.
매력적인 소재에 비해 너무 무난하게 가는 것이 아쉽기는 하나 일상에서 벗어나 일탈을 꿈꾸는 샐러리맨들에게는 나름 공감대를 불러일으킬만한 성장극이 아닌가 싶다.
잊혀져 가는 아날로그 매체에 대한 향수가 담긴 작품이다보니 영화 자체의 촬영은 디지털이 아닌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디지털 촬영의 선명한 맛은 사라졌으나 필름의 부드러운 질감이 화면 가득 묻어나며 아이슬란드나 그린란드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담아낸 장면들에서는 따뜻하면서도 풍부한 색감을 자랑한다. 디지털 트랜스퍼 기술이 발달된 덕분에 필름 영화에서 자주 발견되는 잡티나 아티팩트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뛰어난 트랜스퍼다. 여담이지만 역시 영화는 아날로그적인 질감이 느껴져야 영화다운 맛을 선사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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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무손실 7.1채널 DTS-HD로 마스터링된 사운드의 경우 블록버스터급 영화의 스케일을 맛볼 수 있는 소리를 들려준다. 비록 이 작품에서의 액션 비중은 그리 크진 않지만 몇몇 상상씬에서의 역동적인 움직임이나 (이를 테면 고무인형을 놓고 직장 상사와 사투를 벌이는 장면) 효과음의 전달력은 매우 뛰어난 편이다. 또한 극중 셰릴이 “Space Oddity”를 부르는 장면을 포함해 (벤 스틸러가 직접 고른) 컴필레이션 스코어들 또한 영화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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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블루레이에는 적지 않은 분량의 스페셜 피쳐가 마련되어 있다. 먼저 "삭제, 확장 및 또다른 장면"에는 약 11개의 추가씬을 수록해 놓았는데, 각각의 장면은 다음과 같다.
▷ Deleted Scenes 삭제 장면
• Morning Routine(아침 일과): 오프닝 씬에서 월터가 시리얼을 먹으며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장면으로 직장인의 챗바퀴 돌듯 반복되는 따분한 일상의 출발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Young Odessa Fantasy(어린 오뎃사 상상하기): 뮤지컬 [그리스]의 오디션을 보겠다던 여동생의 잔소리가 시작되자 월터의 눈에는 그녀가 어린 꼬맹이로 보이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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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ester Fantasy(궁정광대 상상하기): 새로 온 대표이사가 직원들 앞에서 숀의 '25번 사진'을 표지로 사용하겠다는 연설을 하던 중 월터의 눈에는 이사가 광대처럼 보인다.
• Manfree Fantasy(하인 상상하기): 셰릴과의 첫 대화 도중 자신과 그녀의 관계가 하인과 주인처럼 바뀌기 되는 상상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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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pound Lot(견인차량 보관소): 여동생이 오디션 때문에 피아노를 거리 주차장에다가 놓고 가는 바람에 견인된 피아노를 월터가 찾으러 가는 장면. 시간상으로 보면 월터의 첫번째 여정이 끝나고 히말라야로 가기 전으로 보인다.
▷ Extended Scenes 확장 장면
• Extended Arctic Fantasy(북극 상상하기): 이사에게 찍힌 월터가 커피머신 앞에서 멍하니 북극에 다녀온 장면을 상상하는 씬이 추가 됨. 다분히 [버티컬 리미트]를 연상시키는 장면이 들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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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Xmas Walk(벤자민 버튼처럼 변한 월터의 크리스마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패러디씬에서 크리스마스날 셰릴에게 반지를 건네는 장면이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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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lternate Scenes 또다른 장면
• Fly to Greenland Alternate Music(그린란드 비행 장면의 또다른 음악): 월터가 그린란드행을 결심하고 문을 박차고 나가는 장면에서의 BGM이 바뀜.
• Severance Package(퇴직금): 월터가 직장동료인 팀과 개리와 함께 퇴직금을 수령하는 줄에 서서 대화하는 장면. 극장판에서는 월터 혼자 쓸쓸히 퇴직금을 수령해 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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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긴 "제작 뒷이야기"는 총 12개의 챕터로 나뉘어져 있다. 그 중 몇가지를 소개하자면 먼저 "월터 미티의 역사"는 원작 소설부터 영화 리메이크에 이르기까지 각 작품의 특징과 의의 등에 대해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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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일 디자인"은 영화의 모든 부분에 현실감을 부여하게 하기 위해 사라진 라이프지 사무실을 면밀히 조사, 분석하는 과정을 담았다. 또한 카메라 앵글의 설정 및 화면의 디자인과 구성이 영화 상에서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가도 설명하고 있는데, 이를 보면 영화 한편을 만드는데 있어 얼마나 전문적이고 새심한 손길이 필요한가를 새삼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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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가 CG의 도움을 필요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스턴트 집중탐구”에서는 이 영화가 의외로 시각효과와 타협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일례로 월터가 헬기에서 바다로 뛰어내려 상어와 맞닥드리는 장면은 실제 아이슬란드의 바다에서 진짜 배와 헬기를 동원해 촬영했다. 가능한 한 리얼한 장면을 얻기 위해 최대한 실제 상황을 활용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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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드와 월터의 격돌 - 사전시각화 초기 버전”은 월터와 테드 이사가 고무인형을 놓고 격돌하는 장면을 스토리 보드와 CG 애니메이션으로 엮은 영상 클립으로 영화 속 장면과는 또다른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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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밖에도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의 음악”, “아이슬란드에서의 촬영”, “북유럽 배우들 캐스팅”, “명장면의 탄생? “오프닝 타이틀” 등의 제작 뒷이야기가 실려있으며, 추가로 “참고사진 갤러리”와 “호세 곤잘레스의 ‘Stay Alive’ 뮤직비디오"가 수록되어 있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내일이라도 당장 백팩을 메고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게 만드는 영화다. 비록 현실은 녹록치 않을지라도 나에게 삶의 활력소를 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를 곰곰히 생각하게 해주고 전혀 새롭지 않지만 메시지를 강요하지 않는 영화의 태도도 마음에 와 닿는다. 다양한 볼거리와 함께 무난한 재미를 원하는 관객이라면 후회없는 선택이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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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 벤 스틸러 감독, 벤 스틸러 외 출연/20세기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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