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롤랜드 에머리히의 1998년 [고질라]를 보신 분들이라면 일본의 레전드급 괴수영화가 헐리우드에서 어떻게 낭비되는가를 뼈져리게 느꼈을 겁니다. 거대 괴수의 도심파괴에만 초점을 맞춘 그 작품은 원작인 [고지라]라 왜 클래식의 반열에 올랐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영화였지요. 물론 엄밀히 말해 괴수물의 시초는 헐리우드입니다. 1933년 [킹콩]의 내러티브는 향후 거대 크리쳐물의 이정표가 되었지요. 피터 잭슨의 리메이크가 먹혔던건 이러한 헐리우드식 괴수물의 원전에 대한 이해에 충실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고질라]는 좀 다르지요. 우선 1954년 혼다 이시로 감독의 [고지라]는 헐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도 신선한 충격이었을 영화였습니다. 단순한 오락적 재미만이 아니라 일본인들의 원폭 트라우마를 거대 괴수로 형상화 시킨 아이디어는 당시 하위 장르에서 B급 컨텐츠로 생명을 유지하던 괴수물 장르에 있어 상당히 진보적인 시도였거든요. 세월이 흐르면서 [고지라] 시리즈도 어쩔 수 없이 변질되긴 했습니다만 어쨌거나 [고지라]의 테마는 반핵의 메시지에서 출발한게 사실입니다. 에머리히 버전에서는 원작의 정신을 모두 제거해 버렸지요. 괴물의 디자인까지도요.
그래서 저는 이번 리부트된 헐리우드판 [고질라]에 대해 별다른 기대를 갖지 않았습니다. 실낱같은 기대가 생긴 계기는 감독을 맡은 사람이 [몬스터즈]라는 저예산 괴수물로 이름을 알린 가렛 에즈워즈라는 점때문이었습니다. [몬스터즈]도 분명 괴수물이긴 한데, 기존의 헐리우드 괴수물과는 전혀 다른 방향성을 추구했던 작품이었기에 만약 이 신인급 감독이 대형 영화사의 입김을 이겨낼 수만 있다면 나름 비주류 성향의 [고질라]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감이 생겼지요.
ⓒ Warner Bros., Legendary Pictures, Disruption Entertainment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가렛 에즈워즈는 [고질라]를 온전히 오리지널의 연장 선상에서 재해석했습니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감독은 후쿠시마 원전으로 인해 다시한번 원자력 공포에 휩싸인 일본인들의 자의식을 영화 속에 절묘하게 투영합니다. 이는 혼다 이시로의 [고지라]와도 일치하는 바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무토 대 고질라의 대결구도로 고질라가 인간의 편이 되도록 한 것은 vs 버전 이후 변질된 고지라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죠. 한마디로 이 영화는 고지라 시리즈 전체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불가능한 작품이라는 얘기입니다.
한편으로 [고질라]는 모든 사람들을 만족시킬만한 영화는 아닙니다. 화끈한 고질라의 난동극을 원한 관객이라면 틀림없이 지루해하거나 실망할 가능성이 큽니다. 간단히 비주얼만 봐도 그렇습니다. 후반부의 완성도 높은 무토와의 대결씬까지 감질나게 보여주는 괴수들의 등장씬은 요즘 블록버스터에서 흔히 보여주는 화려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차라리 볼거리 위주의 블록버스터를 원한다면 오히려 롤랜드 애머리히의 [고질라]가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 Warner Bros., Legendary Pictures, Disruption Entertainment
비록 화려하진 않지만 건질만한 장면은 꽤 많습니다. 각자마다 영화의 특정씬에서 찌릿한 흥분을 느끼는 지점은 다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고질라의 전신이 번쩍거리더니 방사능 화염을 뿜어내던 장면에서 눈물이 찔끔 나오더군요. 물론 어떤 이에게는 유치하기 그지없는 장면이었겠지만 말입니다. 예고편에서 보여준 정적인 긴장감이 감도는 헤일로 점프씬은 올해 개봉한 블록버스터 중 가장 미학적 완성도가 뛰어난 명장면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번 [고질라]는 괴수물 마니아들만을 위해 특화된 작품이라고 봐야 합니다. 나름 구구절절 엮어놓은 인간들의 드라마가 막상 영화상에서 별 볼일 없는 사족으로 취급되는 건 각본상의 심각한 오류일지라도 [고질라]가 지적당하는 단점들 중 상당 부분은 능력의 문제라기보다는 방향 자체가 그렇게 설정되어 있고 이에 충실한 결과이지요. 특히 괴수대백과를 보고자란 올드팬들의 입장이라면 이번 [고질라]가 과거의 추억을 플래시백하는 작품임을 부인하기 어려울 겁니다. 어쨌거나 안티-히어로 고질라는 이제 막 그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저는 이걸 성공적이라고 부르고 싶군요.
P.S
1.줄리엣 비노쉬가 어느새 그렇게 늙었다니… 세월 참 야속하더군요.
2.와타나베 켄은 영화내내 ‘갓질라’라고 하지 않고 ‘고지라’로 발음합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것이겠지요? 게다가 극중 이름이 이시로 세리자와 박사. 54년판 고지라의 혼다 이시로 감독에 대한 노골적인 오마주입니다.
3.고지라 시리즈의 단골배우 타카라다 아키라도 까메오로 출연한다는데 극장 편집본에서는 삭제되었답니다. DVD에서나 볼 수 있을거라는군요.
4.사실 이번 [고질라]의 내용을 다큐의 시각에서 보면 무토 커플의 비극이라고 볼 수 있지요. 걔들 입장에선 어디까지나 종의 번식과 생존이 직결된 문제인데, 왠 개미떼 같은 인간들과 모태솔로 고질라가 끼어들어서 날벼락인지….
5.고질라의 오리지날 디자인을 살린건 좋았는데, 이번 작품의 고질라는 좀… 고도비만인게 불만입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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