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페니웨이 (admin@pennyway.net)
윌리엄 와일러 감독의 [벤허] 이후 헐리우드는 부피와 중량감에 짓눌리기 시작했다. 마치 로마제국이 끝없는 영토 확장과 향락에 도취해 몰락했듯이 헐리우드라는 거대 제국 역시 치솟는 제작비와 스케일 확대의 치열한 경쟁 속에 스스로가 붕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니콜라스 레이 감독은 [왕중왕]을 만들었고, 로버트 알드리치는 [소돔과 고모라]를, 머빈 트로이는 [쿼바디스]를 찍었지만 어느 것 하나 [벤허]의 영광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리고 이 불안한 위기감의 정점에 섰던 작품이 바로 조셉 L. 맨케비츠의 [클레오파트라]였다.
이 작품은 그 어떤 작품보다도 영화 외적인 부면 외에 무수한 뒷이야기를 남긴 것으로 더 유명하다. 이제 그 일부를 잠시 이야기하고자 한다. ( * 본 글의 내용은 [클레오파트라] 블루레이에 담긴 서플먼트의 내용을 참고한 것이므로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은 분들은 블루레이를 통해 훨씬 더 방대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접할 수 있다.)
제작자 월터 웨인저는 1917년 테다 바라가 주연한 무성영화와 1934년 세실 B. 드밀에 의해 묘사되었던 ‘클레오파트라’라는 인물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낭만과 음모, 그리고 배신, 이국적인 풍경과 화려한 전투장면 등 풍부한 묘사거리로 가득한 이 이야기는 영화적 소재로 부족할 것이 전혀 없어 보였다. 그는 폭스사의 사장인 스피로스 스쿠라스에게 ‘클레오파트라’의 영화화를 제안하게 되는데, 이 제안을 받았을 당시 스쿠라스는 이런 류의 작품에는 1백만 달러 정도의 예산이면 적절한 수익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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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다 바라 주연의 1917년 [클레오파트라]
웨인저의 제안에 흥미를 보인 스쿠라스는 테다 바라 버전의 10페이지짜리 스크립트를 주며 여기서 조금만 내용을 고치면 큰 돈을 만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웨인저는 생각이 달랐다. 자신이 클레오파트라 역으로 점찍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이하 그녀의 애칭인 리즈로 통일한다)를 데려오려면 이런 조잡한 각본으로는 도저히 무리일 것 같다면서 난색을 표했다. 스쿠라스는 오히려 이런 작품에 리즈를 캐스팅하는 건 감당이 안될 것 같다고 여겼고, 그 대안으로 [파라오의 땅]에서 비슷한 역할을 무난히 수행했던 조안 콜린스를 떠올렸다.
하지만 [클레오파트라]의 기획이 진행되는 동안 스쿠라스는 [벤허]처럼 대규모의 스펙터클 서사극이 엄청난 흥행을 거두는 현상을 직접 목격했다. 그리고 그는 바로 [클레오파트라]가 그런 가능성이 있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작품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었고 곧이어 루벤 마물리안 감독이 영입되었는데 그는 당시만해도 표현주의와 리얼리즘에 관한 한 독보적인 평가를 받던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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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레오파트라]의 감독으로 선임된 루벤 마물리안
애초의 계획과는 달리 [클레오파트라]가 대작급 규모로 제작된다는 소식이 퍼지자 소피아 로렌, 지나 롤로브리지다, 브리짓 바르도 같은 전세계의 쟁쟁한 여배우들이 물망에 올랐다. 하지만 정작 마물리안은 [포기와 베스]에서 –이 작품의 감독은 오토 플레밍거로 되어 있지만 원래는 루벤 마물리안이 시작한 영화다. 이 부분에 대해선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함께 일한 도로시 댄드리지를 원했다. 그 이유는 역사적인 고증의 측면에서 볼 때 댄드리지와 같은 까무잡잡한 에티오피아인의 외모가 클레오파트라에 부합했기 때문으로 이는 마물리안 감독의 리얼리즘적인 성향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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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벤 마물리안이 염두에 두었던 여배우 도로시 댄드리지. 역사적 고증에 근거해 보면 백인보다는 에티오피아인의 모습에 가까운 그녀의 외모가 오히려 클레오파트라에 가까웠다.
마물리안의 선택에도 불구하고 정작 댄드리지 자신은 이러한 결정이 너무나 리스크가 크다고 스스로 생각했던 것 같다. 결국 폭스사는 리즈와 오드리 헵번으로 후보군을 압축했는데, 헵번은 당시 파라마운트와의 계약에 묶여 있어서 사실상 출연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이제 남은 건 월터 웨인저가 애당초 구상했던 리즈 테일러였다. 영화사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리즈는 전화기를 들고 있던 남편인 에디 피셔에게 -에디는 이 한통의 전화가 훗날 자신과 리즈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에 대해 상상도 하지 못했다- 농담조로 이렇게 말했다. ‘좋죠, 1백만 달러를 준다면 하겠다고 말해요’
여배우가 1백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는다는 건 당시로선 상상도 하지 못할 액수였다. IMDB를 비롯한 일부 문헌 및 자료들에서는 리즈가 이 일로 인해 헐리우드 여배우 사상 최초로 1백만 달러의 출연료를 받은 것으로 나와 있으나 블루레이에 실린 톰 로스만의 영상은 조금 다른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톰 로스만에 따르면 리즈가 농담조로 1백만 달러를 요구했을 때 폭스사는 분명한 거절 의사를 밝혔고, 리즈를 대신해 폭스사와 전속계약이 되어 있는 수잔 헤이워드를 캐스팅할 계획을 세웠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리즈는 울음을 터트렸다.
클레오파트라 역을 따내고 싶었던 리즈는 특유의 승부사적인 기질을 발휘해 영화사에 출연료를 75만 달러로 낮추고 대신 영화 수익의 10퍼센트를 러닝 개런티로 가져가겠다는 조건을 제시했다. 폭스사는 근시안적인 시각에서 리즈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 계약은 실질적으로 폭스사의 발목을 잡는 첫번째 사건이었다. 덕분에 잠시 마음이 상했던 리즈는 계약을 하면서 다음과 같은 표정을 지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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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익~
표면상으로 75만 달러는 애초의 100만 달러에 비해 낮은 금액이긴 했지만 계약서에는 한가지 맹점이 존재했는데, 그것인 바로 영화의 ‘촬영완료시’까지 75만 달러를 받는 게 아니라 ‘16주 간만’ 75만 달러를 받는다는 조항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리즈는 1주에 약 5만 달러 가까이를 벌어들이게 된 셈인데, 만약 1주에 5만 달러를 받는 리즈와 90주 동안 촬영을 한다고 가정해 보면 영화사 입장에선 재앙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에는 제작비 초과에 대한 영화사의 손실을 보호해주는 장치가 전무한 상태였고, 더군다나 영화가 쪽박을 차더라도 수익금의 10퍼센트를 무조건 리즈에게 지급해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리즈가 [클레오파트라]로 벌어들인 돈은 무려 7백만 달러에 달한다.
한편 스피로스 스쿠라스는 카이사르역에 캐리 그랜트를 원했고, 웨인저는 안토니우스역에 지명도가 높지 않았던 리처드 버튼을 어떻게든 출연시키려고 했으나 리즈는 자신과 [엘리펀트 워크]에서 호흡을 맞춘바 있던 피터 핀치를 카이사르역으로 추천했고, 뒤이어 마물리안이 [벤허]의 메살라 역으로 찬사를 받았던 스티븐 보이드를 안토니우스역으로 적극 추천해 두 사람이 최종 발탁되었다.
촬영지로는 –감독인 마물리안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디 플랜’이라는 세금감면정책을 이유로 영국의 파인우드 스튜디오가 선택되었는데 이는 리즈와의 계약에 이어 폭스사가 저지른 두번째 실수가 되었다. 리즈가 영국의 기후에 적응하지 못해 촬영이 불가능할 정도로 몸상태가 악화되어 버린 것이다. 다른 영화와는 달리 [클레오파트라]는 리즈의 등장씬이 거의 매 장면마다 설정되어 있어서 그녀없이 다른 촬영분을 완성한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제작진들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고 리즈의 병세는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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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석에서 시름하던 리즈만큼이나 피터 핀치도 촬영장에서 고통을 겪었다. 제작진이 아예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리즈가 없는 자잘한 씬을 촬영하느라 핀치는 매일 ‘폼만 잡다가’ 촬영을 끝내곤 했다. 그런식의 촬영이 2주간이나 지속되자 핀치는 급기야 신경쇠약에 걸리고 만다. 그 덕분일까. 훗날 그는 [네트워크]에서 신경쇠약에 걸린 뉴스앵커를 훌륭히 소화해 내면서 49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게 된다.
드디어 악재가 터졌다. 감독인 루벤 마물리안이 사의를 표명하고 촬영장을 떠난 것이다. 덩달아 피터 핀치와 스티븐 보이드가 마물리안의 사임에 책임감을 느낀다며 덩달아 촬영을 포기하고 영국을 떠났다. 루벤 마물리안의 커리어는 이 작품으로 끝이 났는데, [클레오파트라] 바로 직전에 맡았던 [포기와 베스]에 이어 연속으로 두 작품을 중도하차한 그로서는 크나큰 타격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서 [클레오파트라]는 단 10분간의 촬영분량에 제작비를 5만 달러나 허비한 상태였다. 그나마 이 장면들은 영화에 사용되지도 않았다.
한편 리즈는 계약 당시 감독의 선임권이 자신에게 있다는 조항을 계약서에 첨부했었는데, 마물리안의 하차 후 그녀가 지명한 감독은 두 명이었다. [젊은이의 양지], [자이언트] 등에서 자신과 호흡을 맞췄던 명감독 조지 스티븐스와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 함께 일한 바 있었던 조셉 L. 맨케비츠였다. 그러나 스티븐스는 대서사극풍의 종교영화 [위대한 생애]를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마물리안의 후임에는 조셉 L. 맨케비츠 감독이 선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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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벤 마물리안의 뒤를 이어 [클레오파트라]의 사령탑을 맡게 된 조셉 L. 맨케비츠. 그는 훗날 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회상한다. ‘이 영화는 허둥지둥 제작되어 결국 제작과정이 엉망이 되고 말았다. [클레오파트라]는 내가 만든 작품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영화 세편 중 하나다’. 실제로 그는 감독직 제의를 받았을 때 마물리안의 충고대로 이를 거절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결국 [클레오파트라]에 부정적이었던 그도 거액의 보수 –거의 7백만 달러의 가치에 해당하는 제안- 앞에서는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폭스사가 맨케비츠를 선택한 건 양쪽 모두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실수였는데, 맨케비츠는 감정선이 살아있는 드라마에 강점을 보인 감독인 반면, [클레오파트라]는 이미지와 영상에 중점을 둔 스펙타클 서사극이었기 때문이다.
감독과 두 남자 주연배우의 중도하차라는 유래없는 사태를 맞이한 가운데 새로 캐스팅 된 배우는 애초에 리즈 테일러가 카이사르역으로 추천했지만 영화사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했던 렉스 해리슨과 월터 웨인저가 희망했던 리처드 버튼이었다. 이런 내부적인 변화가 진행되는 도중에 리즈는 폐렴에 걸려 코마상태에 빠졌고, 급기야 기관절개술을 받아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 영화상에서 그녀의 목주위에 보이는 흉터는 바로 이 때의 수술자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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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네 번 죽었다 살아났어요’. 리즈 테일러의 회상이다. 그녀는 1년간 단 한 프레임도 찍지 못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 일부 메스컴에서는 리즈가 죽어간다고 썼는가 하면, 그녀의 부고기사를 내보낸 곳도 있었다. 잠시 미국에 귀국해 휴식을 취한 그녀는 요양을 하는 동안 [버터필드 8]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결국 제작진은 60만 달러가 투입된 초대형 세트를 포기한 채 촬영지를 로마의 시네시타 스튜디오로 옮기고 만다. 이쯤해서 왜 폭스사가 미국본토의 폭스 스튜디오가 아닌 해외촬영을 고집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만도 한데, 그 해답은 리즈와 체결한 계약서에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는 그 계약서 가운데 ‘해외에서 영화를 찍을 것’이라는 조항을 넣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폭스사가 눈물을 머금고 새로 만든 로마의 새 촬영지에서도 문제는 끊이지 않았다. 현지 스탭들이 개인물건을 예산으로 청구해 3백만 달러의 손실을 입히는가 하면 엑스트라들의 파업사태까지 겹치는 등 갖은 악재에 시달리게 되었다.
맨케비츠 감독은 미칠 지경이었다. 감독과 배우, 그리고 세트장이 통째로 바뀌는 와중에 영화의 컨셉변경이 불가피했고 계속 낭비되는 예산 때문에 위에서는 빨리 촬영을 진행하라는 압박이 들어왔다. 그는 영화 촬영이 진행되는 도중에 계속 각본을 써내려갔지만 나중에는 영양제 주사없이는 도저히 일을 못할만큼 지친 나날을 보냈다. 그럼에도 각본 작업이 촬영일자를 따라잡지 못해 배우들은 할일 없이 빈둥빈둥 노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옥타비아누스역을 맡은 로디 맥도웰은 전 폭스사 사장인 대릴 F. 자눅을 찾아가 제발 뭐든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다. 당시 자눅이 제작중이던 [지상 최대의 작전]에 로디 맥도웰과 리처드 버튼이 까메오로 출연한 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뭐니뭐니해도 영화 제작 중 가장 큰 사건은 리즈와 리처드 버튼의 염문설이었다. 원래 리즈는 버튼에 대해 불성실한 배우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주정뱅이에 플레이보이로 악명높던 리처드 버튼은 촬영 첫날에 술에 취한채로 나왔는데, 의외로 유머러스하고 활력이 넘치는 이 사내에게 술깨라고 따뜻한 커피를 건낸 리즈는 그만 버튼과 사랑에 빠졌다. 이들의 관계는 급속도로 발전했고, 키스씬을 촬영할때에 컷 사인이 떨어져도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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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서로 배우자가 있던 그들의 스캔들은 타블로이드지의 전면을 장식하며 떠들썩한 이슈를 만들었다. 대스타인 리즈 테일러가 미치는 사회적 영향을 고려해 미 상원의원인 아이리스 블리치는 두 사람의 적절치 못한 행동에 대해 비난을 서슴지 않았고,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었던 리즈의 미국 입국금지를 추진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사회적 파장이 확대되면서 촬영 스케줄은 엉망이 되었고 영화사는 혹여 관객들이 [클레오파트라]에 대해 혐오감을 갖게 될까봐 전전긍긍했다.
촬영이 중반에 접어들었을 무렵, 폭스사는 [클레오파트라]로 인해 파산직전의 상태에 놓였다. 예산이 남아있질 않아 다른 작품의 제작을 전혀 진행할 수 없었다. 대릴 F. 자눅의 [지상 최대의 작전]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약간의 숨통을 틔울 순 있었지만 이대로는 위험한 상태였다. 결국 이사회는 이 사태에 대한 책임을 물어 웨인저와 스쿠라스를 해임했다. 새로운 사장으로는 스쿠라스와 함께 폭스사를 일으켰던 자눅이 다시 컴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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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촬영 후반, 결국 폭스사는 예산의 한계를 드러냈다. 하이라이트에 들어가야 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마지막 전투씬은 악티움 해전의 스케일에 비하면 매우 허망하게 끝이 난다. 안토니우스는 늦잠을 자느라 전투에 참여하지 못하며, 이미 그가 일어났을 무렵엔 모든 상황이 종결된 것으로 처리되어 있다. 만약 엉뚱하게 예산을 낭비하지만 않았더라도 [클레오파트라]는 훨씬 더 역동적이고 스펙터클한 영화가 되었을지 모른다.
말도많고 탈도많던 [클레오파트라]는 맨케비츠의 혼신을 다한 지휘 덕분에 400일이 넘는 촬영일정을 모두 마쳤다. 그가 찍은 영화는 무려 96시간 분량이나 되었는데, 1962년 10월 파리에서 맨케비츠가 자눅에게 보여준 편집본은 5시간 15분짜리 필름이었다. 실제로 맨케비츠는 이 영화를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이렇게 두 개로 나누어 각각 개봉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자눅의 판단은 달랐다. 그는 이 영화의 성패가 리처드 버튼과 그의 연인 리즈의 관계에 흥미를 보이는 관객들에게 달렸다고 생각했다. 만약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를 개봉한 후 최소 6개월 이내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개봉한다 해도 그 사이에 리즈와 버튼이 결별이라도 하는 날엔 모든 것을 망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놀랍게도 맨케비츠는 필름을 빼앗기고 해고당했다. 어이없는 사태였지만 자눅은 곧 이 결정을 철회하게 된다. 비약적인 비교일지 모르지만 국내 영화중 재앙급 실패작으로 손꼽히는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제작 도중 촬영지를 무단 이탈한 장선우 감독이 영화사에 끼친 손실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영화사가 장선우 감독을 버릴 수 없었던 건 작품 컨셉과 편집 및 모든 콘티가 자료화된 것이 아니라 감독의 머릿속에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클레오파트라]의 경우도 비슷했다. 맨케비츠가 아닌 그 누구도 [클레오파트라]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자눅은 맨케비츠만이 촬영분을 가지고 작품을 완성할 수 있다고 판단, 2백만 달러의 수고비를 더 얹어주고 39페이지 분량의 추가분을 더 촬영해 영화를 완성시키도록 지시했다.
1963년 6월, 총 4400만 달러의 제작비-이 기록은 15년 후에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에 의해 깨진다-를 투입한 사상 최고의 블록버스터 [클레오파트라]는 제작비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수익을 거둬들이며 흥행에서 참패한다. 4천만 달러의 제작비는 물가상승을 고려한 지금의 시세로 보면 약 3억 달러에 해당하는데, 부가판권시장이 전무하다시피 한 그 당시 티켓 한장당 35센트가 영화사 수익의 전부였던 현실을 고려할 때 이미 결과는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클레오파트라]의 실패로 헐리우드는 대작위주의 상업영화에서 ‘아메리칸 뉴 시네마’로 명명된 저예산 영화의 새로운 조류를 만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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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길이 남을 대실패작으로 알려졌지만 그래도 [클레오파트라]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공작이었다. 평론가들의 평가도 호의적인 편이었고 그 해 아카데미에서는 작품상을 포함한 9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총 4개부문(의상, 미술, 촬영, 특수효과)을 수상했다. 초반에 많은 손실을 낸 건 분명한 사실이나 1966년 TV판권을 판매하면서부터 영화는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는 비디오판권으로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며 그간의 손실을 모두 만회하고도 남았다.
실제로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꼼꼼한 안무와 디테일한 설정, 인물들의 감정선을 잘 살린 정적인 스펙터클의 진수를 보여준 맨케비츠의 연출력은 50년이 지난 오늘날에 봐도 별로 흠잡을 것이 없다. 역대 클레오파트라 중 가장 그럴듯한 캐릭터를 보여준 리즈 테일러의 연기는 오랜 세월 클레오파트라의 기준이 된 테다 바라의 명성을 넘어서 오늘날까지 레퍼런스로 남아있다. 비록 영화보다 더 많은 이야깃거리를 나았던 작품이지만 [클레오파트라]의 50주년을 맞이해 새롭게 출시된 블루레이로 영화사상 최고의 제작비가 투입되었던 대작의 아우라를 다시금 느껴볼 기회를 얻게 된 건 정말 가슴 설레이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앞서 언급했듯 [클레오파트라]는 총 96시간에 이르는 촬영분을 찍었다. 비공식적으로 이 영화의 첫번째 편집본은 오로지 흑백으로만 존재하는 8시간짜리 러프컷으로 일반인들은 볼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어느 수집가의 금고에 들어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두 번째 버전은 바로 맨케비츠가 대릴 자눅에게 보여줬다가 압수당했던 5시간 15분짜리 버전인데, 이 역시도 오늘날에는 남아있지 않다. 충분히 많은 분량의 필름이 있었음에도 애초에 맨케비츠가 원했던 버전의 필름을 복원할 수 없는 이유는 DVD나 블루레이 같은 대안이 없던 시절, 너무나 방대한 양의 A컷들을 물리적으로 수용할 공간의 부족, 그리고 이것들이 상품가치가 없다는 판단 하에 예산절감 차원에서 전량 폐기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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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리마스터링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공개된 버전에 의거해 블루레이를 복원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인 [클레오파트라]의 버전은 크게 세가지다. 첫번째는 1963년 6월 12일 뉴욕 프리미어 시사회에서 상영된 버전으로 약 4시간 6분 가량의 러닝타임을 가졌다. 이 버전은 약 6주후에 20분 정도가 잘려나갔고, 각 지역 극장으로 넘어가면서 극장주들이 상영회차를 늘리는 것이 돈이 된다고 판단해 3시간 가량으로 편집했다. DVD가 발매되기 이전까지 관객들이 가장 많이 접한 버전은 바로 이 3시간 12분짜리 버전이다.
이번에 발매된 [클레오파트라] 50주년 블루레이는 뉴욕 프리미어 시사회 때 상영된 4시간 6분짜리 버전으로 현재로서는 가장 맨케비츠의 의도에 가까운 버전이라 할 수 있다. 본 블루레이는 총 2장의 디스크로 나뉘어져 있는데, 각각의 디스크는 전반부인 시저편과 후반부인 안토니우스편을 담고 있어 완벽한 2부작 에픽을 구성하고 있는 형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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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사운드 오브 뮤직] 45주년 복원판 리뷰(리뷰 바로가기)에서도 느낀것이지만 헐리우드 고전영화의 복원은 가히 상상을 초월할 만큼 완벽을 자랑한다. 먼저 화질면에서는 반세기전의 작품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선명하고 화려한 색감과 디테일한 표현력을 보여주며 4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내내 결점을 거의 발견할 수 없다. 시네마스코프의 위용이 살아 숨쉬는 2.20:1 오리지널 화면비에 가득담긴 시각적 쾌감을 충분히 만끽하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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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운드 역시 나무랄데 없이 훌륭한 리마스터링의 결과물을 들려준다. 명료한 대사와 웅장한 사운드, 만족스러운 분리도를 자랑하는데, 간혹 배경 효과음의 깊이감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긴 하지만 전반적으로는 완벽에 가까운 사운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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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맨케비츠, 톰 맨케비츠, 마틴 랜도, 잭 브로드스키의 음성 코멘터리를 비롯한 각 스페셜 피쳐에는 한글자막이 완벽하게 지원된다.
DISC 1
▷ 불멸의 클레오파트라 - 문화사 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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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에 대한 역사적 관점을 다루는 영상물. 오늘날의 클레오파트라의 이미지가 테다 바라의 [클레오파트라] 이후 지나치게 요부적인 이미지와 관능적인 성향이 강조되어 왔으며, 일종의 왜곡된 오리엔탈리즘이 투영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전락적 사고를 부각시킨 셰익스피어나 버나드 쇼의 관점을 비롯, 다양한 역사학적 견해에서 조명한 실제 클레오파트라의 성격을 언급한다.
▷ '클레오파트라'의 다양한 버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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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복원을 위한 궁극의 편집본을 찾기 위해 각국의 영화 연구소들을 돌아다니며 밝혀낸 [클레오파트라]의 다양한 버전들을 소개한다. 미국 개봉당시 3시간 가량의 편집본은 맨케비츠가 의도했던 내용의 절반도 보여주지 못했는데, 1970년대 말 ‘딕 카베트 쇼’에서 조셉 맨케비츠가 [클레오파트라]를 두편으로 만들고 싶었다고 공식적으로 말한다. 그때부터 10년마다 영화의 긴 버전을 찾으려고 누군가가 애썼으나 결국에는 만족스런 영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본문중에서도 언급했듯이 예산삭감을 위해 1978년 이전의 자료들을 전량 폐기했기 때문. 현재로서는 본 블루레이가 감독이 염원한 궁극의 버전에 가장 가깝다.
▷ 폭스 무비 채널 제공 - 톰 로스먼이 소개하는 폭스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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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타닉]의 제작부서에 참여했던 톰 로스먼의 해설이 담긴 다큐멘터리. 역사상 가장 막나갔던 영화 타이타닉과 클레오파트라를 비교해가며 공통점과 차이점을 설명하는 흥미로운 부가영상.
▷ 클레오파트라 문서 갤러리 - 사적인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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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 2
▷ 클레오파트라 - 할리우드의 역사를 바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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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클레오파트라]를 다룬 2시간 가량의 다큐멘터리로 근래 감상한 부가영상 중 가장 풍부한 이야기거리를 담고 있다. 본문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많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담겨 있으니 필히 관람할 것.
▷ 클레오파트라의 네 번째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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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즈 테일러, 리처드 버튼, 렉스 해리슨에 이어 영화의 네번째 스타였던 '제작과정'에 대한 또 한편의 영상물.
▷ 폭스 무비톤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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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파트라]의 뉴욕 프리미어 시사회 영상과 할리우드 프리미어 시사회 영상을 담은 흑백 기록 필름.
지금껏 수많은 영화들에서 클레오파트라를 다뤘지만 맨케비츠의 [클레오파트라]만큼 많은 화제를 낳았던 작품도 없다. 당시까지의 모든 영화사적 기록을 갈아치운 본 작품에 대한 평가는 아직까지도 여러 의견으로 나뉘고 있으나 유행처럼 번지던 스펙터클 서사극의 정점에 선 영화라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 [클레오파트라]의 50주년을 맞아 영화의 제작과정에 얽힌 무수한 비하인드 스토리와 완벽하게 복원된 영화를 함께 감상할 수 있다는 건 분명 블루레이 시대의 축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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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클레오파트라 (2disc) - 조셉 L. 맨키비츠 감독, 엘리자베스 테일러 외 출연/20세기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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