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에 무슨 해적질이냐 할수도 있겠지만 소말리아 해적의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낯선 이슈가 아닙니다. 전 정권의 대표적인 치적(?)인 아덴만의 여명 작전이 있기 때문이죠. 소말리아 해적에 의해 납치된 삼호쥬얼리호의 승무원들을 구출한 이 사건은 자력으로 자국민을 구출한 사례로 국민적인 관심을 모았습니다. 뭐 그 덕분에 소말리아 해적단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도 덩달아 높아지긴 했지만요. 이후에 이 사건을 영화화한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만 어떻게 되어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캡틴 필립스]는 이와 비슷한 실제 사건을 영화화한 작품입니다. 소재가 된 사건은 2009년에 발생한 머스크 앨러배마호 피랍사건으로 선장인 리처드 필립스가 선원들을 대신해 소말리아 해적의 인질이 되었다가 5일만에 구출된 사건입니다. 영화는 필립스 선장이 쓴 '선장의 의무'라는 책을 원작으로 삼고 있지요. 모르긴해도 아마 이 영화를 피터 버그나 롤랜드 에머리히 같은 감독이 연출했다면 이 작품은 전형적인 미국만세영화가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감독은 폴 그린그래스입니다.
본 시리즈의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그렇지 그린그래스 감독은 늘 사회적인 이슈를 담은 다큐성 영화를 찍어왔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알린 [블러디 썬데이]에서부터 9.11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든 [플라이트 93], 이라크전의 공공연한 비밀을 담은 [그린 존]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들은 늘 논란이 된 실제 사건들을 냉정한 시각에서 다루었습니다. 본 시리즈로 큰 성공을 거둔 이후에도 상업적으로 빠지지 않은 건 분명 높이 살 만한 일이죠.
ⓒ Michael De Luca Productions, Scott Rudin Productions, Translux. All rights reserved.
이쯤되면 [캡틴 필립스]에 대한 감이 어느 정도는 올겁니다. 예술의 경지에 오른 핸드핼드와 건조한 영화의 분위기, 묵직한 대사들, 서스펜스의 농도를 한껏 높혀주는 리얼리티. 관객들을 소말리아의 인근 해역 위로 옮겨놓는 것쯤 이 감독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캡틴 필립스]는 촬영분의 75% 이상을 해상촬영으로 찍은 작품으로 페이크가 아니라 실제로 바다 위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영화는 서로 다른 양극의 세계에서 사는 선장의 모습을 대비합니다. 필립스는 미국의 중산층 가장으로 갈수록 치열해지는 사회의 변화때문에 장차 자라날 아이들의 걱정에 여념이 없습니다. 반면 최빈국 소말리아의 무세는 삶의 터전을 상실한 어부로서 이제는 해적질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는 처지입니다. 그 해적질도 자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마을을 지배하는 '보스'의 명에 의해 할 수 없이 하게 되죠. 이 극명히 갈리는 두 사람의 삶은 미국과 소말리아라는 강대국과 약소국의 모습을 대변합니다.
일단 영화는 두 파트로 나뉘는데, 전반부는 앨러바마호를 무세 일당이 점령하기까지의 일이고, 후반부는 필립스 선장이 구명정을 타고 해적들에게 인질로 사로잡혀간 이후의 내용입니다. 전반부의 서스펜스에 비하자면 후반부는 다소 늘어지는 대신 캐릭터간의 갈등이 부각되는데, 클라이막스의 강렬하면서도 허망한 여운은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캡틴 필립스]는 어찌보면 같은 시기 박스오피스에서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그래비티]와 매우 유사한 성격의 작품입니다. 극사실주의적인 표현방식과 단순명료한 줄거리, 그렇지만 큰 울림을 주는 묵직한 연출이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죠. 헐리우드 특유의 억지스런 감동이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교훈 같은것도 없습니다. 흑백논리의 기울어진 시각이 아니라 객관적인 논조로 관객의 평가를 이끌어내는 공정성은 이 영화의 미덕이기도 합니다.
ⓒ Michael De Luca Productions, Scott Rudin Productions, Translux. All rights reserved.
가령 소말리아의 해적들은 왜 생겨났는가를 따져보면 내전으로 인한 무정부상태를 틈타 강대국이 소말리아의 해역에서 모조리 고기를 잡아가 어부들이 삶의 터전을 잃게 된 것이 발단입니다. 그러나 영화에서 무세 일당이 납치한 앨러바마호는 아프리카의 식량 원조를 위해 구호물자를 수송하던 화물선이죠. 실컷 약탈해놓고 원조라는 허울좋은 핑계로 생색낸다는게 무세 일당의 논리이지만 필립스 선장의 입장에서 자신은 그저 좋은 일 하러가다가 납치당한 피해자일 뿐입니다. 이렇듯 [캡틴 필립스]는 선뜻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에는 꽤나 복잡한 국제 정세의 인과관계를 틈틈히 조명합니다.
폴 그린그래스의 연출이 탁월한 것도 있지만 영화가 한결 몰입하기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배우들의 연기입니다. 아카데미가 공인한 명배우 톰 행크스의 열연은 일단 제쳐두고라도 해적으로 분한 4인방의 연기가 발군입니다. 4명 모두 연기경력이 전무한 신인들인데, 특히 뼈만 앙상하게 남아 눈만 껌뻑이는 무세 역의 바크하드 압디는 진짜 해적이라해도 믿을 정도로 대단한 싱크로율을 보여줍니다.
[캡틴 필립스]에서 제이슨 본 시리즈를 기대하면 곤란합니다. 이 영화에는 그 어떤 작위적인 설정이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액션도 없습니다. 망망대해 위에 펼쳐진 사내들의 숨막히는 대치상황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긴장감이 영화 전반을 지배해 영화가 끝나는 순간까지 관객의 시선을 붙잡습니다. 결말이 나와있지만 그 와중에서도 서스펜스를 살려내는 감독의 장기는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진정한 의미의 스릴러 영화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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