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속 스캔들]로 깜짝 히트를 기록한 강형철 감독의 [써니]는 이른바 추억 마케팅의 산물이다. 사실 이런 영화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유신정권시절 음악적 영혼을 불사르는 청춘을 묘사했던 [고고 70]이나 1980년대 초반의 디스코 열풍에 대한 오마주인 [해적, 디스코 왕 되다], 80년대 불량 고교생들의 단면을 그린 [품행 제로] 등은 모두 그러한 과거의 향수에 기대고 있는 영화들이다. ([친구]같은 조폭물은 예외로 치자)
하지만 이런 작품들은 그리 큰 호응을 얻진 못했다.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관객층이 제한적인데다, 솔직히 말해 1970년대와 80년대를 보냈던 상당수 사람에게 이 시절의 기억을 떠올린다는 게 그리 좋은 것만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나마 그 중에서 가장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은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로서, 앞서 언급한 작품들과 비슷한 정서를 공유하지만 과거의 그림자에서 현재의 모습을 읽는 성찰의 기법을 잘 표현한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강형철 감독의 [써니]는 말하자면 [말죽거리 잔혹사]와 가장 가까운 작품이라고 볼 수 있다. 타이틀부터가 '칠공주 프로젝트'아닌가. [말죽거리 잔혹사]가 폭력을 자양분으로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들의 성장극이었다면 [써니]는 이를 여성버전으로 순화시킨 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지향점은 조금 다르지만.
ⓒ 토일렛픽쳐스㈜/ ㈜알로하픽쳐스/ CJ E&M 영화부문. All rights reserved.
[써니]는 웬만큼 잘사는 중산층 주부가 다람쥐 쳇바퀴 돌 듯 굴러가는 일상 속에서 우연히 과거 고등학교의 절친을 만나 그 시절을 회상하며 엄마나 아내가 아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기에서 관객이 주목해야 할 부분은 과거와 대칭되는 현재의 모습이다. 학창시절의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달라진 모습-외모에서부터 경제적 환경까지-은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부면이다.
학창시절, '나는 커서 oo가 될거야' 하며 말했던 그 포부가 실제로 이루어질 확률이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써니]의 주인공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스코리아를 꿈꾸던 아이가 약물에 중독된 채 술집이나 전전하는 폐인이 되거나 쌍욕을 입에 달고 살던 발칙한 아이가 커서는 부자남편을 만나 고고한척 살아가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이 작품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렇듯 영화에서 느껴지는 건 삶의 회한이지만 그래도 [써니]는 신파로 흐르진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웠던 추억을 플래시백하며 영화는 자신에게 있어 가장 빛나는 순간을 발견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그 순간이 (그리 모범적인 집단은 아닌) '써니'라는 서클을 조직하며 똘똘뭉쳤던 여고시절이었다는 사실이 납득할 만한 에피소드들과 만나 아름다운 추억을 재구성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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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유머는 고급스럽진 않지만 충분히 대중적이어서 적절한 타이밍에 웃음 터트릴 수 있도록 배치되어 있다. 다만 욕설 유머를 포함해-이는 한국 영화가 지닌 가장 안좋은 방향으로의 유머감각이기도 하다-필요 이상의 언어유희가 남용된 점이나 주인공 나미의 딸에게 린치를 가한 아이들에게 응징을 가하는 아줌마들의 무리수는 유머와 드라마간의 유기적 연결성이 떨어져 다소 영화를 유치하게 만드는 감이 있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액자식 구성과 성인,아역을 합해 14명의 메인 캐릭터를 아우르는 연출의 짜임새도 나쁘지 않다. 특히 한국 영화계에서 취약한 여성영화장르에 단비와 같은 존재라는 점에서 이 영화는 3040세대의 여성들에게 압도적인 지지를 받을 확률이 크다. 그러나 각 캐릭터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지점이 조금 산만하거나 일부는 식상하다는 느낌을 주므로 온전히 웰메이드 코미디라고 판정을 내리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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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의 연기는 대단히 만족스럽다. 유호정과 심은경의 싱크로율은 90%를 가뿐히 넘길만큼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이 두 배우가 보여주는 연기는 기대 이상이다. 다른 조연들의 연기에도 불만은 없지만 단연 눈에 띄는 건 춘화의 아역을 맡은 강소라다. [4교시 추리영역]이라는 희대의 망작으로 데뷔한 강소라는 이번 [써니]를 통해 기사회생하며 카리스마있는 연기와 무난한 액션 연기가 소화가능한 유망주로 떠올랐다.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민효린인데, 부족한 연기력을 커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사량을 줄이고 신비감으로 승부하는 캐릭터를 맡았으나 어쩔 수 없는 단점은 드러나기 마련인 듯. 악역인 본드 부는 소녀의 막판 연기도 압권이다.
[써니]는 분명한 성장영화다. 동시에 존재감 없는 삶에서 자아를 찾아 발견하는 주부들의 로망이자 판타지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마지막의 작위적 연출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오랫동안 잔잔한 울림을 남긴다. 아마도 영화를 보고난 순간 인간을 추억을 먹고 사는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 마음에 와닿으리라.
P.S:
1.원래 어려운 말을 쓰길 좋아하진 않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는 쉽게말해 인위적 장치를 통해 극의 갈등이나 결말의 해법을 내놓는 수법을 말한다. [써니]에선 '어떤 인물'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2.강형철 감독. 이로서 소포모어 징크스 걱정은 안해도 될 듯.
3.본문에서 언급은 안했지만 영화 속 음악은 또 하나의 주인공이라 하겠다. [라붐]의 주제가 'Reality'를 비롯해 추억의 음악들을 능숙하게 사용하는 감독의 전략은 여전히 유효적절하다.
4.강소라는 그 뛰어난 하드웨어(?)를 활용할 수 있는 배역으로 후속타를 터트리면 확실하게 뜰 가능성이 크다. 베이비 페이스에 어울리지 않게 균형잡힌 등빨, 긴 다리, 멋진 눈매. 확실히 [4교시 추리영역] 같은 뜨악스런 영화로 묻히기엔 아깝다.
5.아마 모르는 분들이 많이 있을 것 같은데, 과거 B급 코믹 플래시로 인기를 모았던 오인용의 김창후 일병이 까메오로 출연한다. 누구인지는 알아맞춰 보시길.
6.(스포일러) 영화의 홍보과정에서 민효린의 성인 배우가 누구인지는 신비주의 마케팅으로 사용하고 있다. 속 시원히 까발린다면 윤정이란 배우가 그 주인공인데, 왕년의 CF여왕으로 불렸던 그녀를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나름 깜짝 출연이라 볼 수 있겠지만 글쎄.. 생각처럼 그리 노림수가 큰 효과를 본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시사회장에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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