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부터 유독 추리소설을 좋아했다. 반 친구들이 한창 명작동화를 읽을 때 나는 추리소설을 읽었다. 가장 먼저 읽은 추리소설이 무엇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지금까지 마음속에 큰 울림을 주었다고 생각되는 '기암성'이나 '바스커빌가의 사냥개' 둘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요는 내가 엄청나게 추리소설을 많이 봤다는 거다. 한창 추리소설에 광적인 집착을 보였던 국민학교 6학년 (당시는 초등학교가 아니라 국민학교였다) 시절 담임선생님께서 저 녀석이 커서 뭐가 되려고 저렇게 추리소설만 보느냐고 나의 심한 편식체질에 대해 한 소릴 던지곤 하셨다. (범죄자가 되지나 않을까 우려하신걸까? 나름 모범생이었는데.. -_-;; )
그런데 사실 추리소설의 소재가 뭔가. 주로 도난사건 아니면 살인이 아니겠는가. 솔직히 청소년에게 그닥 적합한 소재는 아닌셈이다. 이때 청소년들도 볼 수 있도록 표현을 순화하고, 적당히 내용을 잘 편집한 문고판 추리소설이 있었으니, 바로 계림문고의 '소년소녀추리명작' 시리즈와 해문에서 출판한 '팬더추리걸작선'이다. 특히 계림문고와는 달리 해문의 팬더추리걸작선은 만화체를 이용한 삽화가 들어가 있어서 더욱 읽기가 용이해서 나같은 추리매니아에게 있어서는 필견의 아이템이 되고 말았다. 다달이 받는 용돈을 몽땅 팬더시리즈를 사는데 쏟아부었을 정도다.
지금은 그때 사모았던 책들이 온데간데 사라져 버렸지만 시간이 흘러 성인이 되고 나서야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그 시절 그렇게 재밌게 봤던 팬더추리걸작선이 일본 아카네서방(あかね書房)에서 1973-1976년 사이에 출간한 추리탐정걸작(推理探偵傑作) 시리즈를 무판권으로 번역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게다가 계림문고의 그것과 한국출판공사의 세계명작추리문고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는 것을. 이제부터 그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몇자 적어보도록 하겠다.
처음 팬더추리걸작선은 1권인 '명탐정 홈즈'부터 25권인 '지킬박사와 하이드'까지 출간되었다가 몇 년뒤 총 50권으로 완간된 시리즈다. 굉장히 오랜 기간 판매된 만큼 표지 디자인과 서체 등도 조금씩 변화되었는데, 초기에는 검은색 띠에 대화체도 따옴표가 아니라 꺽쇠로 표기되었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붉은 띠에 서체도 보기가 훨씬 수월한 명조체 폰트로 바뀌었고 대화체에도 따옴표가 쓰이게 되었다.
어렸을때부터 한가지 의문이었던건 1~25권까지의 초판이 발행된 이후 나머지 26~50권까지의 발매시기는 꽤 오랜 공백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왜 이렇게 오랜 기간 나머지 분량은 발행되지 않았던 것일까? 놀랍게도 일본 아카네서방의 추리탐정걸작 시리즈는 국내에 1차로 발간된 25권까지가 종결이다. 그렇다면 나머지 50권까지의 25권은 어디서 온 걸까? 그게 바로 해문이라는 출판사의 무시무시한 저력이다. 모방은 곧 창조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특이하게도 26권부터는 원래 25권까지의 작품들과 형식면에서는 엇비슷하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삽화에서 만화체의 특징인 말풍선을 전혀 볼 수 없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그림 스타일도 어딘지 모르게 변화되었다. 이는 26~50권까지의 2차 발간판이 팬더에서 자체적으로 만들어낸 번역본임을 추측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어렸을 때 가졌던 두 번째 의문도 성인이 되서야 해결되었다. 사실 당시 팬더추리걸작선과 동일한 시기에 금하출판사라는 곳에서도 해문출판사의 것과 순서만 다를뿐 동일한 라인업의 세계추리탐정걸작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용과 삽화까지도 동일해서 어린 마음에도 이 미스테리한 사건에는 뭔가 곡절이 있을 것이다라고 추측했지만 이것이 무단표절의 결과물이었을줄은 당시에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말이 나온김에 팬더추리걸작선과 금하의 세계추리탐정걸작을 비교해 보자. 작품은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이라는 엘러리 퀸의 대표적 베스트셀러인데, 작품을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범죄의 수법이 조금 잔혹한 측면이 있어 두 판본사이에는 눈에 띄는 차이가 존재한다.
먼저 표지를 비교해 보면 디자인은 동일한데 컬러가 다르다. (비교에 사용된 해문판은 초기판이 아니라 가장 나중에 출간된 판본임) 재밌는건 역자의 이름인데, 해문판은 한국추리작가협회로 되어있고, 금하판은 금하추리소설연구회로 되어있다. 누군지 일본어 잘 배워서 고작 해적판 번역에 써먹었을걸 생각하니 고마운 마음에 눈물이 앞을 가린다.
다음은 표지를 한 장 넘겨보자. 해문판에는 늘 그렇듯 한국미스테리클럽 회장이라고 주장하는 (그런 클럽이 있는지도 모르겠다만) 이가형씨의 추천사가 나와있다. 모르긴해도 해문의 무단표절에 깊이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점에 대해서는 조금 이따가 설명하도록 하고, 반면 금하판에는 시리즈의 목록이 실려있는데, 특이하게도 해문에서는 출간되지 않았던 에도가와 란포의 '소년 탐정단', '요괴 박사', 그리고 '투명인간'이 라인업에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해문판과의 차별성을 두기 위함인 듯)
뒷면을 보면 해문판은 일본의 오리지널과 동일한 디자인으로 되어 있지만 금하판은 전권에 동일한 일러스트를 인쇄해놨는데, 바로 '괴도신사 루팡'에 실린 일러스트다.
한 장 더 넘겨보면 컬러로 된 지면이 나오는데, 보시다시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해문과 금하가 서로 좌우를 반대되게 프린트 했다. 잔혹한 살해현장에 대한 삭제처리를 두 출판사가 서로 어떻게 달리 했는지 직접 확인해 보라.
이제 본편으로 들어가보면 해문과 금하의 판본의 차이가 더욱 두드러진다. 해문판은 일본판의 삽화가 거의 그대로 100% 사용된 반면, 금하는 삭제된 삽화가 많다.
다음은 두 판본 모두에 동일하게 실린 삽화인데, 각 대사의 번역이 약간 다르다.
동일하게 실린 삽화라 하더라도 해문판과 금하판이 조금 다르다. 해문판은 보시다시피 풀사이즈로 인쇄된 반면, 금하에서는 저렇게 절반을 잘라서 인쇄하는 식의 방법을 자주 사용한다.
이 시리즈의 특징은 본편이 끝난 다음 꼭 작품소개가 나온다는 점이다. 사실 어찌보면 이 작품소개야 말로 영화의 서플먼트에 해당하는 작품의 배경지식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담고 있는데, 금하판에서는 금하추리소설연구회로 역자를 소개한 반면, 해문판에는 한국추리작가협회 회장 이가형으로 소개되어 있어 마치 이 내용을 이가형씨 본인이 컬럼으로 쓴 것처럼 교묘히 포장했다. 이것이 해문의 무판권 출판에 이가형씨가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을 거란 추측이 가능한 이유다.
이 밖에도 팬더추리걸작선에 대한 흥미로운 점들이 더 있는데, 지면상 모두 소개하기엔 분량이 조금 많은 관계로 이 점은 이어지는 2부에서 설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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