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백수들은 참 착해요. 취직 못하는 게 지들이 못나서 그런건줄 알아. 정부가 잘못해서 그런건데"
- [내 깡패같은 애인] 중에서
[내 깡패같은 애인]의 포스터만 보면 뭐 그렇고 그런 로맨틱 코미디구나 생각하기 쉽습니다. 이제는 인기가 한풀 꺾인 박중훈이나 재작년부터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다작활동을 하기 시작한 정유미 모두 티켓파워에 있어서는 그리 큰 영향력을 주는 배우들이 아니죠. 기껏해야 성격까칠한 여자(제목의 '깡패같은'이 박중훈 보다는 정유미를 암시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건 저 뿐이었을까요?)와 한 성깔하는 남자의 좌충우돌 연애담? 뭐 그정도?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내 깡패같은 애인]은 조폭영화에 나름 사회성 있는 드라마를 입힌 로맨스물이라 이겁니다. 극중 박중훈의 직업이 깡패이긴 한데, 그냥 동네 날건달 수준이 아니라 진짜 조직에 속해있는 건달이라는 얘기죠. 더군다나 포스터에서 꽤나 깡있어 보였던 정유미는 한없이 여리고, 불쌍한(?) 캐릭터이더란 말입니다. 이쯤되면 일단 포스터는 영화의 원래 성격을 반영하는데는 실패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재미없냐고요? 전혀요.
오히려 기대치보다 재밌어서 문제이지요. [내 깡패같은 애인]은 꽤나 실속있는 영화에요. 88만원 세대의 비애를 이처럼 잘 짚어낸 영화도 드물지 싶은데요, 극 중 정유미의 캐릭터는 지방대를 나왔지만 석사학위도 있고, 우수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고 다닌데다 영어성적도 높은 이른바 고학력 여성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반지하 단칸방에 세를 들어 매일 점심,저녁을 라면으로 떼우며 살아가고 있어요. 왜 그럴까요?
ⓒ (주) JK FILM,(주)롯데엔터테인먼트. All rights reserved.
어이없다 싶을만큼 변별력이 떨어지는 요즘의 입사제도에 적응하지 못해 번번히 면접에서 고배를 마시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백조에요. 그것도 아주 많이 배운 백조죠. 그녀는 심지어 면접관들의 농간에 놀아나 면접당일 '토요일 밤에'를 부르며 춤까지 추는 굴욕을 당합니다. 그 때 느낀 그녀의 설움은 아마도 직장을 힘겹게 들어간 사람들이라면 울컥하고 와닿을만큼 상징성이 잘 살아있어요.
또한 옆집에 사는 깡패 역으로 나온 박중훈의 캐릭터도 흥미롭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캐릭터는 이명세 감독의 걸작 [인정사정 볼것없다]에 등장한 우형사의 조폭버전입니다. 아무래도 헐리우드에서 자리잡지 못한 뒤 국내에 복귀해 예전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박중훈으로서는 그나마 자신과 가장 잘 맞았던 캐릭터로 돌아온 것이죠. 껄렁껄렁하고 다혈질에, 입이 거친 주인공 남자는 마음만큼은 착합니다. 비록 못배우고 가진것 없는 그이지만 주변 사람들이 자신처럼 잉여인간이 되는 걸 도저히 용납하지 못할 정도로 정의감이 넘치는 캐릭터죠. 웃기죠? 이런 멋진 조폭이라니.
영화는 비록 자신이 밑바닥을 살고 있긴 하지만 그런 밑바닥 삶에 어울리지 않는 옆집 여자를 바라보며 동질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녀를 해방시켜주고 싶어하는 한 깡패의 욕망을 그려냅니다. 이렇게 맛깔나는 두 남녀가 겉으로는 아웅다웅하듯 보이지만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결국 서로에게 다가가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이 상투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인 판타지에 공감하게 됩니다. 특히나 극중 박중훈의 모습은 한때 정상급 배우의 위치에서 이제는 서서히 퇴물처지가 되어가는 자신의 실제모습과 오버랩되며 감정이입을 이끌어 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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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 영화를 달콤한 로맨스로만 보기엔 조금 부담스러운건 사실이에요. 조폭영화의 계보 언저리에 있다보니 욕설이 너무 자주, 심하게 등장합니다. 뭐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요즘이긴하지만 그래도 쌍욕이 툭툭 튀어나올때마다 불편해지는건 사실이더군요. 그리고 폭력수위도 의외로 높은 편입니다. 영화가 15세 관람가 판정을 받은건 다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죠.
혹시나 기대를 안했던건 아니지만 마지막 엔딩은 최근 본 한국영화중에서 가장 맘에 듭니다. 바로 이런게 영화같은 엔딩이지요. 영화 전반전이 코미디의 연속이라면 중반 이후부터는 잔잔한 감동의 파도가 밀려오기 시작합니다. 오랜만에 볼만한 작품을 접한 느낌이에요. 항상 괜찮은 작품은 꼭 기대하지 않은곳에서 발견하게 된단 말이죠.
P.S: 제가 처음 정유미씨를 본건 [차우]시사회때였는데, 아직 교정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무대인사에서 너무 수줍음을 타길래, 저렇게 숫기가 없어서야 배우생활 제대로 하겠나 싶었습니다. 근데 이번 작품을 보니 뭔가 달라보이긴 합니다. 순한 인상의 배우라 내심 좋은 마음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어요. 이 영화로 주목받는 계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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