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첫사랑의 추억은 아련합니다. 아마도 10대의 풋풋한 시절에 찾아왔을 그 사랑은 상대방의 연봉액수나 직업, 집안배경 따윈 눈에 들어오지 않는 순수한 감정의 결정체였을 겁니다. 오로지 그가 있기에 행복하고 그녀가 존재하기에 설레이는 그런 사랑 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첫사랑은 대부분 결실을 맺지 못합니다. 아마도 그 사랑을 지켜내기엔 너무 어리고, 선택의 여지도 많지 않으며 또 주변의 압력에 쉽게 굴복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월이 흐르면서 사람은 보다 현실적으로 변해가고 첫사랑의 풋풋함은 그저 아름다운 추억의 일부로서 고이 모셔두게 되는 것이지요. 다시는 그런 순수한 사랑을 경험할 수 없음을 잘 알기에 그 추억이 더욱 소중하게 자리잡게 되는 겁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만 혹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첫사랑을 잘 지켜내어 결혼이라는 최종 목적지까지 골인한 분들이 있다면 진심으로 박수를 보냅니다.
이제 소개할 [하프웨이]는 첫사랑의 달콤함이 화면 가득 전해지는 한편의 순정만화같은 영화입니다. 일본영화가 워낙 잔잔한 감동을 주는 면이 있습니다만 이처럼 마음을 알싸하게 만드는 작품은 정말 오랜만이군요. 이 영화는 대학진학을 눈앞에 둔 한 남녀 고등학생이 짧은 기간 교제를 나누는 과정을 한치의 과장없이 자연스럽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주인공 하로는 집 근처의 대학에 진학할 목표를 가진 평범한 소녀입니다. 그녀는 여학생들 사이에서 꽤나 인기있는 남학생 슈를 몰래 짝사랑합니다만 부끄러워서 차마 고백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던 중 실수로 그녀는 슈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키고 맙니다. 그런데 슈도 하로를 내심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것일까요? 방과후 하로가 슈에게 마음을 고백하려다 망설이는 순간 슈가 먼저 하로에게 고백을 해 버립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사귀게 되었지요.
하지만 달콤한 시간도 잠시, 이들 사이를 가로막는 중대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남자친구인 슈가 마을과 멀리 떨어진 와세다 대학에 진학하려 한다는 것을 하로가 알게 된 것이죠. 하로는 고민에 빠집니다. 이 사실을 자신에게 감추고 있었던 슈에 대한 원망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그 먼 곳에 떨어진 대학으로 진학하면 몸도 마음도 멀어지게 되니까 말입니다. 이제 이 문제를 놓고 두 사람의 줄다리기가 시작됩니다.
이처럼 영화는 내용의 대부분을 슈의 진학문제에 할애합니다. 지나고 보면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그 나이때에는 그게 전부인듯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학창시절을 경험한 대부분의 관객에게 있어 [하프웨이]는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영화입니다.
무엇보다 [하프웨이]는 솔직합니다. 신파극으로 몰고 가려 하거나 위기감을 조성해 극적인 효과를 보려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처럼 주인공들만 십대일 뿐 사랑의 깊이는 어른들 뺨치는 그런 부담스런 영화가 아니라 철저히 십대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풋사랑의 현실감이 살아 있습니다. 호흡이 잔잔하면서도 자연스러운데다 이런류의 영화에선 잘 쓰지 않는 핸드헬드 기법을 사용해서인지 마치 한편의 실시간 연애 다큐멘터리를 보는듯한 느낌까지 선사하지요.
영화의 엔딩씬이 끝난 이후에는 당황스러워 하는 관객들도 있을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하프웨이]에는 과정은 있지만 결과는 말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 그대로 ‘열린 결말’인 셈이지요. 어쩌면 이러한 엔딩 역시 대단히 영리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극중에서 언급하듯이 ‘하프웨이 Halfway'란 도중의 과정 혹은 불완전하거나 어중간하다는 뜻도 내포하고 있거든요. 주인공들이 처한 상황 자체가 완성되지 않은 과정이기 때문에 그 결말을 알려준다는 건 관객의 상상력이나 여운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이 될겁니다. ’장거리 연애에 해피엔딩은 없다‘라고 믿는 저로선 두 사람의 첫사랑이 결국에는 이루어지지 못할거라고 생각하지만 또 저와는 달리 낭만적인 분들은 두 사람의 사랑은 계속 될거라고 믿을 수도 있을테죠.
[하프웨이]에서 인상적인 장면이 하나를 꼽으라면 하로가 그녀의 담임선생님과 연애상담을 하는 장면입니다. 남친이 와세다에 진학하는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그걸 말리는건 죄책감이 드는 이 애매모호한 감정을 어찌 설명해야 할지 몰라 자신의 친한 친구가 겪는 문제인냥 돌려말하는 이 장면은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온몸이 바들바들 떨릴 정도입니다. 이를 능청맞게 받아주면서 우문현답에 가까운 진리를 말해주는 선생님의 모습도 흐뭇하고 말이죠.
주연배우들의 연기와 앙상블도 발군의 조화를 이룹니다. 주인공 하로 역의 키타노 키이는 마치 ‘리틀 우에노 주리’라 할만큼 싱그러운 웃음와 깜찍한 애교로 관객들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이끌어 냅니다. (Halfway를 '할프웨이‘라고 우기는 장면은 아주 귀여워서 쓰러질 정도에요) 또한 상대역인 슈 역의 오카다 마사키도 매력적이면서도 순정남스러운 꽃미남 캐릭터를 자연스럽게 소화해냈지요. 두 사람이 실제 연인이라고해도 그냥 믿을것 같습니다.
아마도 국내 홍보사에서는 제작에 참여한 이와이 슌지의 이름을 더 강조하겠지만 실질적으로 [하프웨이]의 성과는 키타가와 에리코 감독이 이룬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본 TV드라마계에서 불세출의 멜로물 각본가로 알려진 그녀는 이번이 극영화 연출 데뷔작이지만 큰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녀만의 장기인 섬세한 감정 표현을 스크린에서도 충실히 재현하는데 주력했으니까요. 앞으로 멜로 영화계의 히트메이커로 성장할 것인지 무척 기대가 됩니다.
국내에서는 이미 작년 부천국제영화제에서 제한상영을 한 바 있지만 이번에 정식으로 대중앞에 소개되어 참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뭐 흥행이야 큰 기대는 하지 않습니다만 정말 좋은 영화임에는 분명합니다. 나중에 DVD로 나오면 꼭 구입해야 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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