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ㅎ

허트 로커 - 전쟁의 서스펜스에 중독되다

페니웨이™ 2010. 4. 21. 09:36
반응형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바타]로 10여년만에 귀환한 영화계의 제왕 제임스 카메론은 상상이나 했을까? 그의 전처였던 캐서린 비글로우와 오스카 상을 걸고 정면대결을 펼치리라는 사실을. 이번 제82회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렇게 모처럼의 이슈로 세간의 관심을 모았다. 카메론 자신이 [타이타닉]으로 세웠던 흥행기록을 [아바타]로 갈아치우며 여전히 건재함을 과시했다면, 최근 극심한 슬럼프를 보여왔던 캐서린 비글로우는 [허트 로커]로 비평가들의 찬사를 받으며 재기에 성공했기에 어느 쪽이 승리하든지 나름대로의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상황. 그리고 최종 결과는 비글로우의 압승이었다. 물론 카메론은 여성감독 최초로 오스카 감독상을 가져간 자신의 전처를 뜨거운 박수로 환호했다. 내심 속으론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 AP. All rights reserved.

1989년 제임스 카메론과 캐서린 비글로우가 부부의 연을 맺을 무렵, 카메론은 '재능은 나보다 한 수 위다'라고 말할 정도로 그녀에 대해 극찬했다. 짧은 2년 동안의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는 몰라도 이혼 이후에 카메론과 비글로우의 관계는 그닥 나쁘진 않은 듯 하다. [허트 로커]의 감독직을 비글로우에게 권유한 사람은 다름아닌 제임스 카메론 자신이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자신의 전 부인 최대의 걸작인 [허트 로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허트 로커]는 이라크 전쟁에 관한 [플래툰] (1986, 올리버 스톤 감독)이다". 실제로 [허트 로커]는 현대전쟁을 다룬 영화로서는 [플래툰] 이후 유일하게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했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사실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감독은 아니다. 제목만 말해도 누구나 아하! 할만큼 유명한 작품 [폭풍속으로]의 감독인 그녀는 여성으로서는 아주 드물게 오래전부터 액션 영화만을 전문적으로 연출해 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 원래 각본가로서 밑바닥 생활을 거쳐 (이 당시 그녀는 올리버 스톤과도 일을 한 적이 있다) 컬트적인 뱀파이어물 [죽음의 키스]로 이름을 알린 비글로우는 [블루 스틸]에서 푸른색 영상의 차가운 색조와 뜨겁고 강렬한 액션의 대비를 통해 메이저 영화계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폭풍속으로]의 대성공 이후 그녀의 행보는 줄곧 하향세를 그렸다. SF 사이버펑크 블록버스터 [스트레인지 데이즈]의 대실패 이후 그녀의 필모그래피 중 유일하게 드라마 성향이 짙은 [웨이트 오브 워터]로 잠시 외도를 했으나 그 역시 좋은 평가를 얻진 못했다. 해리슨 포드, 리암 니슨이라는 대배우들과 함께 한 [K-19]의 악몽은 그녀에게 7년간의 공백이라는 크나 큰 상처를 남겼다. 더욱 안타까운건 [K-19]이 그렇게까지 외면받을만큼 못만든 작품이 아니라는 점이다. 흥행으로 평가받는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비글로우가 치른 대가는 가혹한 수준이었다.

어쨌거나 슬럼프의 수렁에 빠진 그녀에게 7년만에 주어진 작품은 고작 1100만달러짜리 소품인 [허트 로커]였다. (참고로 전작인 [K-19]의 제작비는 1억 달러였다) 가뜩이나 비인기 소재로 알려진 이라크 전쟁을 다룬 영화인데다 제레미 렌너, 앤소니 맥키 같은 무명 배우들로 포진된 [허트 로커]는 누가 보더라도 기대작은 아니었다. 적어도 그녀가 미국 영화제에서 상이란 상은 모조리 휩쓸기 전까진 말이다.


ⓒ Voltage Pictures/ Summit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캐서린 비글로우 외에도 액션영화에 일가견 있는 여성 감독이 전무했던 건 아니다. [딥 임팩트]나 [피스 메이커]를 통해 드림웍스의 슈퍼루키로 떠오른 미미 래더는 한때 액션영화의 유망주였다. [킹콩의 대역습]을 감독한 폴 레더의 딸로서 두 편의 블록버스터를 연속 히트시키며 메이저 영화계의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그녀였지만 어줍잖게 신파극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에 도전했다가 단 한번의 실패로 인해 현재까지 재기불능 상태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비글로우는 정말 기적적으로 회생한 셈이다.


국내에는 1년이나 늦게 지각개봉하는 작품이지만 (그래서 어둠의 경로로 접한 사람도 무척 많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허트 로커]는 명실공히 큰 화면에서 봐야 할 극장용 영화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오프닝의 스타일리쉬한 폭발 시퀀스는 이것이 진정 여성 감독의 손에서 나오는 솜씨인가 싶을 정도로 박진감이 살아있다. [폭풍 속으로] 같은 작품을 통해 사나이의 로망을 그 누구보다 잘 이해했던 캐서린 비글로우는 여성 감독 특유의 섬세한 심리 묘사와 함께 전장의 리얼리티를 최대한 끌어올린 액션을 절도있게 표현해냈다. 30년 영화판에서 8편의 영화를 연출한 그녀의 장인근성이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다.

[허트 로커]가 지닌 전쟁영화로서의 특징은 전쟁의 참혹함이나 광기를 부각시킨 여타의 작품들과는 분명한 차별성을 지니는데, 일반전인 전투부대원이 아니라 EOD (Explosive Ordnance Disposal: 폭발물 제거반) 대원들의 이야기를 다룸으로서 민감한 폭탄을 다루는 그들의 실제 업무만큼이나 섬세한 심리묘사에 공을 들이고 있으며 전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일반적인 관점과는 반대로 전쟁의 중독성이라는 대단히 독특한 시각에서 이라크전을 견지하고 있다. 이같은 [허트 로커]의 차별성은 최근 쏟아져 나온 유수의 이라크전 관련영화들 가운데서 단연 독보적이라고 말할수 있다.

ⓒ Voltage Pictures/ Summit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2004년 이라크의 EOD 팀에 실제로 동행한 저널리스트 마크 보얼이 각본을 맡은 만큼 영화는 생생한 현장감을 머금고 있다. 하지만 오해는 금물. 이라크 참전용사들로부터 사실성 시비에 휘말린 전과(?)에서 알 수 있듯 [허트 로커]는 '사실적인 영화'라기 보단 '사실성있게 보이도록 만든 영화'라는 편이 맞다. 어차피 관객이 보기에 실감난다고 느끼면 그만 아닌가. 이는 이라크전을 다룬 또 한편의 영화 [그린 존]의 폴 그린그래스 감독과 꾸준히 함께 해 온 촬영감독 배리 애크로이드의 솜씨와도 무관하지 않은데, 세미 다큐멘터리처럼 감정의 기복없이 차분한 가운데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연출기법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잘 맞아 떨어진다.

아카데미 작품상 수상작이라고 해서 마냥 고뇌하고, 무겁고, 진지한 느낌의 영화라고 미리 단정짓지 말라. 적어도 필자가 보건데 [허트 로커]는 그럴듯하게 잘 포장된 한 편의 상업영화다. 뭐 지금까지 캐서린 비글로우의 작품들이 모두 그랬듯 그녀는 예술영화나 연출하는 작가주의적인 감독이 아니다. 7년의 공백을 맛본 그녀는 초반의 성공과 이후의 실패를 통해 상업성과 작품성 사이의 절묘한 균형잡기에 대해 깨달음을 얻은듯 하다. 그 결과물인 [허트 로커]는 전쟁영화를 가장한 액션영화이자, 전쟁의 공허함과 스릴에 중독된 한 인간의 심리를 잘 묘사한 재미있는 영화다.


* 본 리뷰에 사용된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해당 저작권자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