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실존의 맨얼굴을 보았다' 박찬욱 감독이 [더 로드]를 보고 한 말이다. 조금 부끄러운 얘기지만 사실 나는 이 작품을 모종의 스릴러 장르로 생각하고 관람에 임했었다. 물론 성서에 비견된다는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원작소설을 아직 접하지 않은 상태였기도 했지만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코맥 맥카시의 원작이니만큼 적어도 기존 스릴러의 공식을 뛰어넘는 특별한 작품이 되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애당초 [더 로드]는 특정 장르를 쉽게 규정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었다. 굳이 말하자면 [더 로드]는 전체적인 시각에서 볼때 일종의 로드무비라는 틀을 갖추고 있고, 여기에 [나는 전설이나]와 [눈먼 자들의 도시], 또는 M. 나이트 샤말란의 [해프닝]처럼 변형 재난영화의 성격을 입힌 드라마다.
모든 인류 문명이 사라진 지구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이야기인 [더 로드]는 생존이라는 현실위에 인간성과 도덕적 규범이 어디까지 용인되고 사라질 수 있는가를 색다른 시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서두에 박찬욱 감독이 언급한 말은 바로 이 영화의 그러한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한 셈이다. 따라서 원작을 영화화 한다고 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지나친 헐리우드 색채로 원작이 변질되지나 하는 우려는 일단 접어도 좋을 듯 하다.
ⓒ Dimension Films. All rights reserved.
지구가 멸망했다지만 왜 멸망하게 되었나는 이 영화에서 중요하지 않다. 그런 구차한 설명없이도 관객들은 지구가 망했다는 전제하에 벌어지는 일들에 주목하게 되어 있으며, 인간을 잡아먹지 않으면 굶어죽게 되는 극한의 상황속에서 가치관의 혼돈을 경험하는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호소력있게 전달된다. 더불어 상황설정의 현실감을 위해 묘사된 디스토피아적 세계의 우중충한 분위기는 근래 보아온 작품들 가운데서 가장 리얼하다.
드라마의 극적인 설정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스스로 인간적 규범을 벗어던지는 아버지와 멸망 이전의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아들이 오히려 동정심과 사려깊음에 있어 보다 인간적인 면모를 발휘한다는 아이러니에 있다. 결국 여기서 또 한번 [더 로드]의 장르적 규정에 사족을 더하게 되는데, [더 로드]는 넓은 의미로 성장영화의 성격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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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각색의 과정에서 제작진은 적잖은 유혹을 느끼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방향성을 잘 잡으면 상업성이 가미된 스릴러로 만들어도 무리가 없을 만큼 쫓는자와 쫓기는자의 스릴넘치는 프레임이 제법 잘 나올법한 에피소드가 몇 개나 되는데도, [더 로드]는 상업적 성격을 철저히 배제한다. 전통적 신파극에서나 나올법한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는 아버지의 뜨거운 부정(父情)은 어찌보면 진부한 이야기이지만 상황설정의 독특함과 기승전결이 명쾌하지 않은 영화의 구조적 특성 때문에 오히려 신선하게 와 닿는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낸 노장, 로버트 듀발의 건재함을 보는 건 영화의 또다른 즐거움이다. 시종일관 꾀죄죄한 모습으로 등장해 알몸 열연까지 불사하는 비고 모텐슨과 코디 스밋-맥피의 연기는 올해 아카데미에서의 선전을 기대해도 좋을만큼 훌륭하다. 단, 샤를리즈 테론과 가이 피어스 등 유명 배우들의 등장씬은 그리 많지 않으니 염두해두고 감상에 임할 것.
* [더 로드]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Dimension Films.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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