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열전(古典列傳) No.6
오늘날 일본 애니메이션 산업의 전체 규모는 1637억엔. 1년에 제작되는 편수만도 100~150편을 왔다갔다하는 어마어마한 양의 작품들이 쏟아져나오고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TV 애니메이션이 1년에 30∼40편 정도에 불과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근래 10년들어 폭발적인 성장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이처럼 호황을 맞고있는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노라면 부럽기도 하고 한편으로 한국은 언제나 되야 저런 경지에 오를 수 있을까, 아니 과연 저렇게 될 날이 올수나 있을까 걱정만이 앞섭니다. 그정도로 이제는 일본과 한국의 애니메이션 사이에는 도저히 따라잡기 힘든 격차가 벌어져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처음부터 그랬을까요? 처음부터 일본의 애니메이션은 세계를 제패할만큼의 수준을 가지고 있었고, 한국은 어차피 남의 나라 뒤치닥거리나 하는 하청업으로 전락할 운명이었을까요? 이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1960년대. 전란의 황폐함을 딛고 서서히 서양문물이 도입되어 일반 대중들에게 크나큰 문화적 충격을 주기 시작한 이 시기의 사람들은 필름 영상물이 주는 신기함에 어쩔줄 몰라하며 그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월트 디즈니로 대표되는 일련의 만화영화들은 영상물 가운데서도 가장 주목을 받은 장르였지요. 실사가 아닌 그림이 살아있는것처럼 움직이니 얼마나 더 신기했겠습니까?
한국 최초로 애니메이션을 도입한 럭키치약의 CF
애니메이션의 독특함에 매료된 몇몇 사람들은 이를 곧 상업광고에 접목시키기 시작했고, 1957년 럭키 치약이 한국 최초로 애니메이션 CF를 도입한 이래 수많은 광고용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기에 이릅니다. 이러한 환경을 바탕으로 한국의 초창기 애니메이터들도 서서히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지요. 그 중에 가장 두각을 나타낸 사람은 원기소의 CF 애니메이션부터 손발을 맞춘 신동헌 감독과 넬슨 신(신능균) 콤비였습니다. 이 두 사람은 1년에 무려 100편에 육박하는 CF를 제작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보이다가 진로소주 CF가 대박을 터트리면서 이 분야 최고의 실력자로 떠오르게 되지요. 1
신동헌-신능균 콤비의 초히트작이었던 진로소주 CF
1965년의 어느날. 승승장구를 거듭하던 신동헌 감독은 당시 잘나가던 영화사인 세기상사로부터 뿌리칠 수 없는 제의를 받게 됩니다.
“우리도 장편 만화영화 한 번 만들어봅시다!”
마침내 CF 애니메이션의 틀을 벗어나 더 넓은 포부를 실천할 기회를 얻게 된 신동헌 감독은 자신의 첫 장편이 될 작품의 소재를 신중하게 고려하게 됩니다. 그는 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애니메이션의 성격상 뚜렷한 권선징악의 스토리를 가진 의적 이야기가 적합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는데요, 흥미롭게도 당시 만화가로 활동중이었던 동생 신동우 화백의 연재만화 '풍운아 홍길동'은 이러한 신 감독의 구상에 딱 들어맞는 이야기였습니다. 활극의 요소과 모험, 그리고 무엇보다 원작 자체가 최초의 한글소설이라는 점은 '최초'라는 의미에서 보다 깊은 동질감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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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대단히 힘든 여건속에서 진행되어야 했습니다. 제작비의 문제도 그랬지만 무엇보다도 처음 시도하는 작품이니만큼 '노하우'가 전무한 상황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이지요. 일반적으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한 편에 참여하는 스탭의 수는 200명 이상. 그 당시 [홍길동]에 동원된 인력은 고작 40여명 뿐. 그 중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든 유경험자는 한사람도 없었고, 셀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필수적인 재료도 없는 상황. 동화에 필요한 셀룰로이드를 대신해 미공군의 항공 촬영 필름을 씻어서 재활용한 에피소드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일이라 여기서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는 건 바로 이런걸 두고 말하는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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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수를 맡은 신동우 화백의 [홍길동] 오리지널 콘티
그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열악하다 못해 황폐한 환경속에서도 신동헌 감독이 웬만한 메이저 스튜디오에서나 사용할 법한 정공법으로 제작을 감행했다는 겁니다. 이를테면 1초에 24프레임을 사용하는 '풀프레임 애니메이션'을 고집한 것이나 제작방식이 까다롭기로 소문난 '프레스코 방식 (선녹음-후작화)'을 채택한 것이지요. 물론 신동헌 감독에게 이러한 기술적 노하우를 알려준 이는 없었답니다. 순전히 본인 스스로가 몸으로 부딪혀가면서 익힌 테크닉이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월트디즈니 같은 대형 제작사에서 사용하는 기법이었다니 그저 놀랄 따름입니다. 천재는 1% 영감과 99% 노력으로 만들어진다는 말이 맞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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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의 주역들.
이렇게 우여곡절끝에 완성된 [홍길동]은 사용된 셀화만 무려 125,300장, 제작비 5400만원 (1960년대의 물가기준으로 보면 엄청난 금액임)이 투입된 대작으로 완성됩니다. 물론 신 감독을 비롯한 스탭들은 개봉을 불과 몇시간 앞두고도 최종 편집을 마치느라 녹초가 될 정도로 강행군을 이어가야 했지요.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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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967년 1월, 한국 최초의 극장용 애니메이션 [홍길동]이 서울의 대한극장과 세기극장, 부산의 문화극장과 동보극장 등 전국의 주요 극장에서 개봉됩니다. 개봉당일, 교통 기마대가 출동해 충무로 일대를 통제해야 할 정도로 [홍길동]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게 되는데요, 나중엔 관객들의 성원에 보답하기 위해 세기상사 측에서 500명 관객 단위로 고객에게 3Kg짜리 백설탕을 한 푸대씩 선물하는 마케팅을 펼치기도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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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 상영 당시 대한극장 앞 풍경
결국 [홍길동]은 최종 관객 30만명을 동원하는 대박을 터트리며 한국 영화사에 한페이지를 장식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제6회 대종상 문화영화 (비 극영화 부문) 작품상,제4회 남도영화제 문화영화상 등을 수상하는 등 실사영화에 버금가는 공헌도를 인정받는 등 명실공히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쾌거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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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길동]은 원작소설의 기본적인 컨셉을 베이스로, '풍운아 홍길동'의 캐릭터와 신동헌 감독 스타일의 캐릭터 리뉴얼, 그리고 애니메이션에 걸맞는 각색을 거쳐 매우 복합적인 성격의 창작물로 거듭난 작품입니다. 일단 원작에서 주요 인물중 하나인 홍길동의 형이 빠졌고, 따라서 '호부호형(呼父呼兄)' 하지 못하는 홍길동의 비애 중 '호형'부분은 삭제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해 안타까워 하던 중 집안 식구의 음모로 암살의 위기를 넘긴 후 집을 떠나는 홍길동전의 플롯은 대략 허균의 원작과 비슷합니다. 다만 '풍운아 홍길동'에서 오리지널 캐릭터로 등장했던 차돌바위가 꽤 비중있는 조연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원작소설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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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인 스토리의 구조도 원작 소설에서 크게 빗나가지는 않습니다. 출가한 홍길동이 차돌바위를 만나 악행을 일삼는 탐관오리를 징벌하기 위해 백운도사를 찾아가고, 활빈당이라는 도적떼에 합류하는 것 그리고 악당들과의 일전을 벌인 후에 극적으로 아버지와 상봉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은 우리가 학교 국어시간을 통해서도 익히 들어왔던 이야기이지요.
그럼에도 [홍길동]이 뛰어났던건 애니메이션의 오락적 재미와 탄탄한 구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풀 프레임을 사용한 만큼 동작의 유연성과 작화의 섬세함도 후세대의 것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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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흥미로운건 [홍길동]의 내용중에 해골바가지들이 일어나 아리랑 댄스를 추는 장면이 있는데요, 갑자기 김기덕 감독의 [대괴수 용가리]에서 용가리가 아리랑 곡조에 맞춰 댄스를 추는 장면과 오버랩되어 한참을 웃었습니다. 신기하게도 두 작품 모두 1967년에 개봉되었다는 공통점이 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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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렇게 선풍적인 인기를 효과를 정작 [홍길동]의 주역이었던 신동헌 감독과 그의 스탭들은 제대로 만끽할 수 없었습니다. 몰지각한 제작사와 영화 관계자들의 잇속 차리기에 밀려난 신동헌 감독은 제작비의 회수는 커녕, 원본필름을 돌려받는데에도 실패하고 맙니다. (당시 상식이하의 인간들이 저질렀던 추악한 뒷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도 전투력이 급격히 상승할 정도입니다) 결국 신동헌-신동우 형제는 후속편인 [호피와 차돌바위]를 제작하기 위해 극동흥업과 손을 잡게 되고 세기상사와는 결별하게 됩니다. (이 부분은 5[호피와 차돌바위] 리뷰를 참조)
이렇게 신동헌 감독과 스탭들을 배신한 세기상사는 뻔뻔스럽게도 1968년 [쾌남 홍길동]이라는 제목으로 재개봉을 단행하는데 이때 크래딧에서 신동헌 감독의 이름을 빼 버리고 박삼천 감독으로 대체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까지 합니다. 신 감독에게 원본필름을 주지 않았던 이유가 이렇게 드러나게 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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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에서 5번째로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낸 신동헌 감독은 그 역사적 사건의 주역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근시안적인 제작행태와 만행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애니메이션에서 손을 뗍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일본의 데즈카 오자무는 미국의 월트 디즈니가 사망한 후 20년간 지속된 후계 체제의 공백을 틈타 '일본 만화계의 신'이라 불리며 일본 열도는 물론 전세계 애니메이션을 재패할만큼의 자양분을 키워나가게 되지요.
한편 역사상 유래없는 흥행 성공과 고퀄리티로 알려진 [홍길동]은 원본필름이나 카피본마저 모두 유실되어 1970년대 이후 세대들은 말로만 들어왔던 [홍길동]의 완성도를 직접 확인할 방법이 전무했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대에 들어서 옛것의 복원에 대한 필요성이 몇몇 지각있는 팬들에 의해 대두되자 필름 아카이브의 산실인 한국 영상자료원에서 각고의 노력 끝에 필름을 찾게 됩니다.
필름의 소재지는 엉뚱하게도 일본 오사카에 위치한 한 소장가의 사설 아카이브. 필름의 주인은 [소년용자 길동]으로 수출되었던 일본어 더빙이 곁들여진 16㎜ 복사본의 기증을 흔쾌히 허락했고, 이 필름을 35㎜로 확대한 뒤 영상자료원에 보관 중이던 한국어 35mm 사운드 네가필름을 입혀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홍길동]의 복원판을 완성 6하게 됩니다. 7
2009년 1월 20일. '출동! 한국의 슈퍼히어로' 특별전에서 [홍길동]상영을 앞두고 무대인사를 하는 신동헌 감독의 모습. '이미 40년전 작품이라 허물이 많아 부끄럽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런대로 보기에 괜찮았다'는 말에서 한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던 소박한 긍지가 느껴진다. 한편으로 비슷한 출발선상에 있었으면서도 한국의 '데즈카 오사무'는 될 수 없었던 그의 안타까운 행보가 작품을 보는 내내 마음 한구석을 불편하게 했다.
필자가 영상자료원 내의 시네마테크에서 접한 [홍길동]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복원판으로서 첫 타이틀 자막과 크래딧이 모두 일본어로 나오는 아스트랄한 기분을 잠시나마 만끽할 수 있습니다. 색감 자체도 많이 탈색된 흔적이 역력하지만 보관상태가 기존의 고전 애니메이션과 비교해볼때 양호한 편이며 작화나 더빙, 음악 등 모든 부면에 걸쳐 당대 최고였던 이 작품의 명성을 그대로 전달해 줍니다. 아직 판권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DVD출시를 보류하고 있다는 관계자의 말을 들었지만 언젠가는 분명히 대중앞에 정식으로 공개될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만약 이마저도 어른들의 상술에 놀아나 흐지부지 된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팬들의 분노를 감당하기 힘들거라 생각되는군요.
아무튼 그동안 필름의 존재유무조차 확인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국 최초의 애니메이션을 떠든것이 얼마나 공허한 외침이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것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에게 미래의 영광이 올리가 없겠지요. 언젠가 [쥬라기 공원]과 현대자동차 판매량을 예로 들면서 문화 콘텐츠의 부가가치에 대한 효율성이 논의된 적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요, 그렇게 또다시 '돈'에만 집착한 발상으로 애니메이션에 접근해서는 [홍길동]때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그보다는 잃어버린 유년시절의 자산부터 빨리 찾아내어 우리 후세들에게 자랑스럽게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P.S: 사실 고전열전의 두 번째 시간에 소개된 [호피와 차돌바위]보다 먼저 소개했어야 할 작품이었지만, 작품 자체가 너무 희귀한 터라 감상이 쉽지 않아 부득이 이제서야 글을 쓰게 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합니다.
참고자료:
저패니메이션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박태견 저, 1997 길벗)
송락현의 애니스쿨 (송락현 저, 1997 서울문화사)
설특집 HD 다큐: 잃어버린 기억-만화영화 홍길동 (2007년 2월 17일 KBS방영)
* [홍길동]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돌꽃 컴퍼니.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풍운아 홍길동 (ⓒ 대교문화. All rights reserved.), 세기촬영소 앞 단체사진(ⓒ 영상자료원. All rights reserved.), 홍길동 스토리보드 (ⓒ 영상자료원. All rights reserved.), 대한극장(ⓒ KBS. All rights reserved.)
- 닐슨 신은 국내에서의 활동을 접고 1970년대 미국으로 건너가 훗날 [트랜스포머: 더 무비]를 연출하며 북미시장에서 인정받는 애니메이터로 알려졌다. 현재는 ASIFA(국제애니메이션필름협회, Association International Du Film d'Animation) 코리아의 부회장으로 역임중이다. [본문으로]
- 일부 자료에서는 [홍길동]에 투입된 인원이 400명이라고 기록해 놓고 있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다. 이같은 오류가 발생한 원인은 [홍길동]의 개봉당시 12만5천장의 셀화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하루 한사람이 한장을 그리면 400명이 1년간'이라는 광고카피를 사용한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본문으로]
- 이 부분은 조금 논란이 있다. 한국일보, 서울신문의 기록에는 6만장, 그리고 소년 조선일보이는 67,000장이라고 소개되는데, 훗날 신동헌 감독은 서울신문을 통해 이 수치가 'NG로 버린 것까지 포함한'것이라고 증언한 바 있다.한편 약 10년후에 제작된 초유의 히트작 [로보트 태권브이]의 동화매수도 4만장 정도이고, 1980년대 이후에 제작된 한국 애니메이션 중에 동화매수 10만장이 넘는 것은 전무하다. [본문으로]
- '저패니메이션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유(박태견 저, 1997 길벗)'에서는 [홍길동]의 최종 관객수가 100만명이라고 기재되어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누구도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공식적으로 한국 극장사상 최초로 100만명의 고지를 돌파한 것은 1993년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이며 무려 196일을 상영하면서 가까스로 일궈낸 성과다. [홍길동]의 30만명 동원이란 기록은 개봉관 하나를 계산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당시 극장 통합전산망이 갖춰져 있지 않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국규모의 관객수가 얼마였는지 추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본문으로]
- 그 당시 상황은 이렇다. 신동헌 감독측이 세기상사와 맺은 계약 조항 중에 '독소조항'이 있다는 걸 신 감독은 몰랐다. 대략 내용은 언제까지 작품을 완성하지 못하면 투자이익을 배분하지 않는다는 형식의 조항이었다. 그림만 그릴줄 알았지 사업적인 부면에는 순진하기만 했던 신 감독은 오로지 작품의 완성도에만 몰두했고, 열악한 환경과 여건 가운데 약속 기일을 넘겨 작품을 완성했다. 결국 [홍길동]은 대박을 기록했지만 정작 세기상사는 해당 조항을 트집잡아 신 감독에게 한 푼도 줄 수 없다고 버텼다. 기가 막혔던 신 감독은 크게 실망해 세기상사와 결별하고 극동흥업으로 터전을 옮겼지만 결과는 별반 다를 바 없었다. [본문으로]
- 관련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는 오사카 말고도 도쿄쪽의 또다른 아카이브에서도 [홍길동]을 보관중이었고, 복원에 사용한 필름은 보관 상태가 좀 더 양호한 오사카의 보관본을 사용했다. 이렇게 한국 최초의 역사적 유물을 한국땅이 아닌 일본에서 두 개나 발견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 의미를 되새겨볼때 실로 수치스런 일이 아닐수 없다. 원본인 35mm 필름은 배급사인 20세기폭스에서도 소장하고 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행방이 오리무중이다. [본문으로]
- 신동헌 감독의 설명에 의하면 이 복원판도 오리지널에 비해서 약 3분정도가 삭제된 버전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원본과 큰 차이는 없으며 스토리의 진행에도 별다른 문제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재 35mm 원본필름이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추측되는 이상, [홍길동]의 완전판은 영원히 볼 수 없을 가능성이 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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