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열전(古典列傳)

고전열전(古典列傳) : 철면객 - 한국 최초의 다크 히어로가 탄생하다 (1부)

페니웨이™ 2009. 4. 1.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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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열전(古典列傳) No.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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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한해 전 세계의 극장가를 초토화시켰던 [다크 나이트]는 만화속 주인공 '배트맨'을 소재로 다루고 있음에도 그 내용이나 완성도에 있어 경이로운 수준을 보여주어 이른바 '아트 블록버스터'의 탄생이라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바야흐로 미국의 슈퍼히어로라는 테마는 헐리우드 영화에 있어서 대단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슈퍼히어로가 새롭게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얼마전 한국의 영상자료원에서는 '출동! 한국의 슈퍼히어로'라는 주제로 지난 세월 한국 영화에 등장한 국산 슈퍼히어로를 소개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기획전에서 보여준 히어로 작품들은 미국의 원더우먼을 표절한 [날아라 원더공주]나 쌈마이 액션물 [바이오맨] 같은 작품이었으며, 그나마 순수성을 가진 히어로라고는 귀가 마르고 닳도록 들어온 [홍길동] 뿐이었습니다.

ⓒ 한국 영상자료원. All rights reserved.


사실 저는 이번 기획전에 [쾌걸 일지매] 같은 작품이 빠져있는것도 놀라웠지만 한편으로는 한국의 슈퍼히어로 캐릭터가 이다지도 없었나 하는 생각에 약간은 실망스럽더군요. 물론 문화 컨텐츠의 성장배경이 미국과는 천지차이인지라 그럴 수밖에 없긴 합니다만 그렇다고 존재하는 것조차 제대로 발굴해내지 못하는 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이번 시간에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 잊혀진 순수 국산 슈퍼히어로 한명을 소환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때는 1974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집안의 파산으로 모든걸 잃고 서울로 상경해 오직 이것만이 내 살길이라며 만화계에 뛰어든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허영만 화백입니다. 그는 데뷔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이렇게 회고합니다.



"74년 데뷔하면서 3년 안에 ‘뜨지’ 못하면 직업을 바꾼다는 각오로 정말 열심히 그렸다. 내 작품도 오래되면 감정이 식기 마련인데, 허영만이란 이름이 시작된 작품이어서 늘 마음에 남아 있다"

- 한겨레 구본준 기자와의 인터뷰, 허영만이 뽑은 나의 베스트 4 중에서


허영만 화백이 말한 이 작품의 제목은 바로 '각시탈'로서 허 화백의 데뷔 후 세 번째로 낸 작품입니다.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각시탈'은 가면을 쓴 괴한이 악행을 저지르는 일본군을 처단한다는 내용의 작품으로서 당시에 선풍적인 인기를 모은 베스트셀러였습니다.

이 작품이 특히 주목받는 이유는 각시탈의 탄생 배경과 주인공의 내면 세계가 당시 아동 전유물로 취급받던 한국만화 치고는 대단히 진지하며 어둡게 묘사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어찌보면 '각시탈'은 한국 최초의 다크 히어로였던 셈이지요. (물론 홍길동 같은 인물도 따지고보면 다크 히어로의 성격이 강하긴 합니다만)

작품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각시탈'의 내용을 잠시 소개해 드려야겠군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안보실 분은 살포시 넘어가시기 바랍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허영만의 페르소나, 이강토란 인물입니다. 이강토는 가족들의 안전과 생계를 위해 일본군의 앞잡이로서 애국지사들을 추적해 잡아들이는 이른바 '매국노'에 가까운 인물입니다. 하지만 일본군 경무대 소속의 헌병들과 관계자들은 일명 각시탈로 알려진 복면 테러리스트의 출몰에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이강토는 각시탈을 잡으라는 경무대장의 명을 받아 결국 각시탈을 추격끝에 총상을 입히는데 성공합니다.하지만 떨어진 핏자국을 쫓아 온 강토는 놀랍게도 핏자국이 자신의 집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되는데요, 황급히 집에 도착한 영은 치명적인 총상을 입은 자신의 형을 발견하게 됩니다. 각시탈이자 자신의 친형은 경무대장이 자신들의 어머니를 살해했음을 알리며 숨을 거둡니다.

ⓒ 허영만. All rights reserved.


이제 이강토는 형을 자신의 손으로 죽였다는 자책감, 그리고 어머니를 살해한 원수의 밑에서 개처럼 일했다는 치욕감에 사로잡혀 급기야 형의 각시탈을 쓰고 헌병대장을 처단합니다. 이후 그는 형의 유지를 이어받은 2대 각시탈로서 일본의 압제에 저항하는 슈퍼히어로로 살아가게 됩니다.

보신 것처럼 각시탈의 탄생과정은 상당히 슬프면서도 드라마틱하고 민족 특유의 정서가 배어있는 고유의 오리지널리티가 살아있습니다. 특히나 이강토라는 인물은 원죄와 다름없는 친일파로서의 행적과 자기 형을 살해한 데에 따른 죄책감을 겪는 동시에, 각시탈 속의 또다른 자아로 분열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다크 히어로로 그려집니다. 이는 당시 만화계의 상황을 비추어 보면 대단히 진보적인 설정이 아닐 수 없지요.

이처럼 선풍적인 인기를 끈 '각시탈'은 사회적인 기현상을 초래하게 되는데요, '각시탈'의 인기에 편승에 'xx탈'이라고 이름 붙여진 짝퉁만화가 난립하게 된 것입니다. 단지 '탈'이라는 이름의 만화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만으로 도서잡지윤리위원회에서는 허영만 화백에게 연재를 중단할 것을 요구하게 되고 시대의 걸작이자 한국 최고의 슈퍼히어로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각시탈은 돌연 연재가 끝나게 됩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현실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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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All rights reserved.


당시 '각시탈'이라는 만화를 가지고 히트를 하다 보니까, 탈을 쓰고 나오는 만화가 뭐 색시탈이니 무슨탈이니 너무 많았어요. 너무 많다 이거야... 당신 이 '각시탈'을 그리지 마라.. 세상에 너무 많다고 나보고 그리지 말라는 거에요. '각시탈'은 그때 끝났죠.

- MBC 황금어장 '무릎팍도사'에서 허영만의 회고 (2008.09.24 MBC 방영)



그로부터 6년뒤인 1982년 '각시탈'은 허 화백의 또다른 작품 '쇠퉁소'로 재해석되어 사실상의 리메이크가 되지만 개인적으로 원작만큼의 임팩트를 느끼진 못했습니다. 그리고 1986년에는 [각시탈]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기도 했지만 이 작품은 정부의 압력으로 인해 시대배경이 일제시대가 아니라 북한으로 바뀌는 등 철저한 반공만화로서 돌변하는 괴작이 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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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팀매니아/허영만. All rights reserved.

'각시탈'의 리메이크. 1982년 작 '쇠퉁소'


이렇게 '각시탈'은 그 인기만큼이나 여러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었는데요, 우리가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이 작품이 한 때 실사영화로도 만들어진 적이 있다는 겁니다. 그 작품을 소개하기 위해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은 셈이 되었네요. 자 그럼 이쯤해서 절단 신공을....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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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리뷰는 2009년 4월 1일자 Daum 메인화면에 선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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