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들은 '레이싱 애니메이션' 하면 어떤 작품이 떠오르는가? [이니셜 D]라던가 [사이버 포뮬러]가 먼저 생각나는가? 그렇다면 아마도 당신은 비교적 신세대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반면, [달려라 번개호]가 생각나는가? 그렇다면 아마도 필자와 같은 (구)세대일 가능성이 높다.
[달려라 번개호 (원제: 마하 Go Go Go)]는 1976년 TBC방송을 통해 한국팬들에게 널리 알려졌으며, "내일의 희망안고 번개호는 간다~"로 끝나는 주제가를 기억하는 분들이 아직도 꽤 있을 것이다. 더불어 이 작품은 1997년에 리메이크되어 국내에서는 SBS을 통해 [마하 고고!]라는 제목으로 방영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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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매트릭스]로 전 세계의 영화 판도를 뒤바꾼 워쇼스키 형제 (일각에서는 래리 워쇼스키가 트랜스젠더가 되었다는 낭설을 믿고 끝까지 '남매'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형제'가 맞다)가 실로 오랜만에 직접 메가폰을 잡아 화제가 된 영화가 있으니, 바로 [달려라 번개호]를 실사화한 작품 [스피드 레이서]다. 이들은 왜 하필 다른 레이싱 애니메이션도 많은데 고전이 되어 버린 [달려라 번개호]를 소재로 삼았을까? 그 과정과 영화의 실체를 살펴보도록 하자.
1.[스피드 레이서]의 영화화 |
사실 [스피드 레이서]의 영화화는 워쇼스키 형제가 처음 시도한 것이 아니었다. [다이하드], [리쎌웨폰] 시리즈 등 헐리우드 굴지의 흥행메이커로 손꼽히는 조엘 실버는 1992년부터 [스피드 레이서]의 기획단계에 들어갔다. 1994년에는 가수 헨리 롤린스가 '레이서 X'역으로 섭외되었으며 이듬해인 1995년 조니 뎁이 주연으로 발탁되어 캘리포니아와 아리조나에서 촬영을 시작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조니 뎁이 개인적인 사정을 이유로 촬영의 보류를 요청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줄리안 템플 감독이 감독직을 포기하자, 조니 뎁 또한 감독없이는 남아있는 의미가 없다며 아예 프로젝트를 떠났다. 이에 제작사는 구스 반 산트 감독을 후임으로 고려했으나 성사되지 않아 제작은 기약없이 지연되고 만다.
1997년에는 알폰소 쿠아론을 감독으로 선임할 계획을 발표했으며, 이와는 별개로 마크 레빈과 J.J 애이브람스를 포함해 패트릭 리드 존슨, 제니퍼 프라켓 등 4명의 각본가를 고용해 다양한 각도로 [스피드 레이서]를 구체화 시켰다. 하지만 이 역시 별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다.
2000년에 들어서도 [스피드 레이서]를 위한 수많은 각본가가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다. 하이프 윌리엄스를 비롯, 크리스천 거드게스트, 폴 슈링 등이 [스피드 레이서]의 각본에 참여했으나 지지부진한 제작속도로 인해 프로젝트를 떠났다. 2004년엔 배우 빈스 본이 감독과 제작, 그리고 자신이 '레이서 X'로 출연한다는 조건으로 이 계획에 합류했으나 결국 성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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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스피드 레이서]는 2006년 워쇼스키 형제가 감독, 각본을 맡는다는 조건으로 재개되었다. 이들은 스스로가 '제페니메이션'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할만큼 어렸을 때부터 [달려라 번개호 (미국명: 스피드 레이서)]를 즐겨봤던 애청자였다. 또한 그들이 [매트릭스]를 통해 보여준 영상혁명의 성과를 고려해 보면, [스피드 레이서]의 실사화라는 작업에 적임자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스피드 레이서]는 장장 14년만에 제자리를 찾고 제작에 돌입하게 된다.
2.스토리 |
[스피드 레이서]는 어렸을 때부터 전가족이 카 레이싱에 미치다시피한 가정의 차남, '스피드 레이서' (에밀 허쉬 분)의 이야기다. 그는 어렸을적 자신의 우상이자, 형제였던 렉스의 의문사로 인해 큰 충격을 받는다. 어느덧 성장해 레이서의 길로 들어선 스피드는 비즈니스계의 어두운 이면, 승부조작,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가족간의 갈등속에서 방황한다. 그리고 형의 석연찮은 죽음과 카 레이싱 세계의 음모를 파헤치기 위해 죽음의 레이스에 도전하는데...
3.실험적 영상 |
많은 이들은 [스피드 레이서]를 보면서 워쇼스키 형제의 전작 [매트릭스]시리즈와 자연스럽게 비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전작인 [매트릭스]가 가상현실 세계의 음침함을 드러낸 작품이었다면, [스피드 레이서]는 복고풍의 동화적 색체가 빛을 발하는 그야말로 상상의 세계가 펼쳐진다. 배경은 비현실적으로 알록달록하며, 주인공들의 캐릭터 또한 작위적일 정도로 만화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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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작 자체가 만화임을 감안한 워쇼스키 형제의 의도적 설정은 영화를 만화처럼, 만화를 영화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한 그들의 실험적 성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다만 [스피드 레이서]를 관람한 관객들 모두가 이들의 실험에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복고풍의 화면이 CG로 리모델링 된 위화감은 생각보다 크기 때문이다. 또한 비현실성을 비현실적으로 표현한 레이싱의 액션역시 기대이상의 감흥을 주지는 않는 편.
게다가 이런 동화적 풍경의 이미지들은 이미 팀 버튼 감독에 의해서 완성되지 않았던가?
4.비의 출연 |
무엇보다도 한국관객에게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바로 한국의 가수겸 배우 비의 출연일 것이다. 극장 영화로서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단 한편만을 찍고 바로 헐리우드로 진출한 흔치않은 케이스이기 때문에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당당히 크래딧의 올린 비의 위상은 분명 주목받을만 하다.
[스피드 레이서]에서 비가 맡은 태조라는 캐릭터는 상당히 모호한 위치다. 비중있는 조연이긴 한데, 영화 전체를 놓고 봤을땐 감독이 비를 위해 의도적으로 끼워넣은 캐릭터란 느낌을 준다. 결국 없어도 큰 지장을 주지 않을 만한 캐릭터이긴 한데, 플롯상에서 어정쩡한 매력을 발산하기 때문에 존재감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케이스다. (대개 이런 작품에서는 확실한 악역, 아니면 착한 인물인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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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의 연기는 꽤나 쓸 만하다. 영어 대사도 좋고, 액션도 제법 자세가 나온다. 큰 키와 동양인의 매력을 잘 살린 마스크, 그리고 목소리도 좋기 때문에 영화에서 혼자 따로 노는듯한 느낌은 주지 않는다. 다만 전형적인 동양인 캐릭터 (이를테면 무술에 능하고, 왠지모를 음흉한 두 마음을 품고 있는...)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 점이 아쉽다. 향후 비의 연기활동을 고려한다면 아직 초반인 지금, 동양인에 국한된 캐릭터에서 빨리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런면에서 차기작 [닌자 어세씬]에 주연급으로 캐스팅되었다는 점은 한편으로 아쉬움을 가중시킨다.
5.단선적 플롯과 캐릭터 구축의 한계 |
[스피드 레이서]는 매우 단순한 플롯을 지녔다. 레이서를 동경한 한 소년의 인간승리와 권선징악적 주제가 완연히 드러나는 이 작품은 헐리우드 영화의 전형적인 패턴이며, 이 진부한 소재를 커버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CG로 점철된 각종 레이싱 장면과 특수효과다. 아마도 [매트릭스]에서 상식을 뒤집는 뛰어난 설정을 보여주었던 워쇼스키 형제를 기대하고 극장을 찾은 관객이라면 분명 실망할 사람들이 나올 것인데, 그만큼 이 작품은 단순화된 플롯과 아동의 눈높이에 최적화된 표현력의 한계로 철저히 가족용 영화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있다.
또한 캐릭터의 구축도 어설프다. [스피드 레이서]의 가장 큰 문제는 이야기를 끌고나갈만큼의 카리스마를 가진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영화자체는 주인공 스피드에게 맞춰져 있긴 하지만 이 인물은 코믹하지도, 그렇다고 고뇌에 차있다고 할만큼 진지하지도 않다. 어디까지나 각본에 따라 움직이는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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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다른 재능있는 유명 배우들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닌데, 존 굿맨이나 수잔 서랜든 같은 중견배우의 연기도 그다지 큰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저 얼굴마담으로 등장했다는 느낌이 더 크달까. 오히려 연기가 성의없다고 느껴질 정도로 평면적인 캐릭터를 맡았다는 쪽이 더 정확할 듯.
그나마 극의 활력소를 위해 등장시킨 것이 폴리 리트가 맡은 스프리틀이란 캐릭터인데, 아역배우로서 침팬지와 함께 코믹듀오를 형성하는 이 개그 캐릭터는 원작과 높은 싱크로율을 보이며, 영화상에서도 꽤나 관객들을 웃기기위해 고전분투하지만 문제는 호응하는 관객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 아, 물론 필자가 참석했던 시사회장은 대부분이 20대 이상의 젊은 층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10대 이하의 어린아이들이 보면 또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겠다.
6.총평 |
실로 많은 우여곡절끝에 탄생한 [스피드 레이서]는 워쇼스키 형제의 작품이라는 점, 더 나아가 그들 형제의 이면에 버티고 있는 [매트릭스]와의 비교선상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는 작품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분명 이러한 [매트릭스]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어했을 것이며 결과적으로 [스피드 레이서]는 전혀 다른 색체를 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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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렇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선회한 그들의 모험을 관객들이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영화를 접한 필자의 입장에서보면 감탄보다는 실망쪽에 가까웠으며, 특히나 다른 사람도 아닌 워쇼스키 형제가 헐리우드 가족영화의 전형적 패턴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마케팅에 있어서는 '비주얼의 신기원'임을 줄기차게 강조하고 있지만 별로 달라보이는 것은 없다. 그저 더 많이 들어간 CG가 영화를 좀 더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홍콩에서 만든 [이니셜 D]쪽이 더 나았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너무 가혹한 평가인 것일까.
* 관련 리뷰: 은사장님의 스피드 레이서 (2008) 정보 총정리
* [스피드 레이서]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Warner Bros. Pictures./ Silver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스피드 레이서 애니메이션(ⓒ Tatsunoko Productions / TX All rights reserved.), 조니 뎁 (출처 미상), 빈스 본(ⓒ Vince-Vaughn.com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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