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작열전(怪作列傳) No.31
호러영화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라면 아마도 '스튜어트 고든'이라는 이름을 한번쯤 들어 보셨을 겁니다. 1980년대 중반의 호러시장을 이끌어간 감독인 스튜어트 고든은 제작자인 브라이언 유즈나와 함께 환상적인 파트너쉽을 자랑했습니다. 프랑켄슈타인의 현대적 해석을 보여준 [좀비오 (H.P. Lovecraft's Re-Animator)]는 그들 콤비가 만들어낸 B급 공포물의 대표작이지요. 하지만 장르영화에 몰입했던 브라이언 유즈나와는 달리 스튜어트 고든은 자신의 영화적 세계를 단지 '호러물'이라는 장르의 틀에 가두어 놓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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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돌즈 (분노의 인형들)]를 끝으로 이 두사람은 각자 결별하였고, 스튜어트 고든은 여봐란 듯이 그의 고어틱한 성향을 벗어 버린 작품을 발표해 피칠갑한 영화만이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영화의 전부가 아님을 증명하고자 했지요. 그 작품이 오늘 소개할 영화 [로봇 족스]입니다. 이 [로봇 족스]는 거대로봇이 등장하는 SF영화로서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한 작품입니다.
그 중 한가지가 나가이 고 원작의 [아이언 머슬(アイアンマッスル)] (국내에는 해적판 '아이반호 2세'로 소개됨) 인데요, 비록 국내에서는 큰 각광을 받지 못해 2권뿐인 미완결로 그친 만화이지만 거대 로봇들 속에 조종사가 들어가 그들의 실제 움직임을 재현하는 로봇들이 격투기를 벌인다는 소재는 세월이 지난 지금 보더라도 상당히 획기적인 아이디어였습니다. 물론 [로봇 족스]가 [아이언 머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는 어떠한 물증을 제시할 순 없으나, 이런 거대 로봇만화들의 영향을 받은건 분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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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 고든의 [로봇 족스]는 우리가 만화에서 보아온 거대 로봇들이 벌이는 격투기를 소재로 만든 최초의 SF영화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지난 시간에 소개된 [건헤드]가 실물크기의 로봇을 구현하는데 중점을 두고 제작된 실사 로봇영화라면, [로봇 족스]는 그보다 한발짝 전진한 작품인 셈이지요. 이 작품에서의 로봇은 단지 거대한 쇳덩어리가 폼만 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각종 비밀무기와 변신 컨셉으로 무장한 '진짜 로봇'의 모습을 보여준다는데 큰 의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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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족스]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3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폐허가 된 지구는 미국과 소련, 오직 두 개의 세력으로 양분되어 대립관계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나 과거와 같은 핵무기에 의한 전쟁이 아닌 거대 로봇의 대결을 통해 영토를 확장하게 됩니다. 주인공 아킬레스(게리 그레함 분)는 이미 여러명의 로봇 족스 파일럿을 경기도중 잔인하게 살해한 알렉산더(폴 코슬로 분)와 알레스카 지역의 소유권을 놓고 대결을 벌입니다. (근데 목숨걸고 대결에 임하는 사람치고 아킬레스의 캐릭터는 좀 경박합니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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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킬레스는 알렉산더와의 대결에서 승부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큰 민간인 희생자를 낳고 맙니다. 승부는 무승부가 되었지만 무고한 희생자들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아킬레스는 로봇 족스 파일럿을 그만두게 만들지요. 한편 아킬레스의 후임자인 아테나(앤-메리 존슨 분)는 의욕이 넘치고 아름다운 여성이지만, 아킬레스는 그녀가 위험한 로봇 족스의 파일럿이 되는 걸 원치 않습니다. 결국 이러한 염려 때문에 아킬레스는 다시금 파일럿으로 돌아오게 되고, 이것이 자신의 실력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한 아테나는 독단적으로 알렉산더와의 재대결에 출전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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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지 플롯이 복잡한 영화는 아니지만, 전쟁을 로봇들의 1:1 대결로 치룬다는 설정은 무척 신선합니다. 또한 B급의 영역에서 활동하던 스튜어트 고든은 [로봇 족스]를 통해 메이저급 영화로 진출하려는 강한 의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로봇 족스]는 고든 감독이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합니다. 제작사인 엠파이어 픽쳐스는 자사의 작품중에서 최대 규모의 제작비가 투입된 이 작품이 채 완성되기도 전에 파산하고 말았지요. 우여곡절 끝에 에픽 프로덕션이 이 작품에 대한 판권을 사서 제작을 완료하기까지는 무려 2년이란 세월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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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봇 족스]에서 간과해선 안될 인물이 바로 각본을 맡은 조 홀드먼이다. '영원한 전쟁(The Forever War'의 SF작가로도 유명한 그는 [로봇 족스]를 보다 암울하고 드라마적인 요소를 부각시킨 작품으로 만들길 원했다. 그러나 스튜어트 고든은 영웅적인 색체가 강한 만화적인 느낌을 부각시키려 했고, 결국 영화는 다소 유치한 방향으로 흐를 수 밖에 없었다. 훗날 홀드먼은 로봇이 아니라 로봇을 조종하는 군인의 이야기를 강조하려 했던 자신의 주장이 묵살된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이렇게 제작이 난항을 겪은 영화치고 제대로 성공하는 영화가 드물다는 사실은 잘 아시죠? [로봇 족스]는 스튜어트 고든이 브라이언 유즈나와 결별한 첫 번째 영화이자, 최초로 호러영화를 벗어난 작품이었으며, 로봇 격투기라는 소재를 처음으로 실사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작품이었음에도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고든 감독이 표현하고자 했던 그 거대한 스케일을 감당하기엔 기술적인 한계가 역력했으며, 사실상 메이저 영화사가 아닌 중소 영화사를 통해 작품을 완성하려 한 것 역시 완성도에 있어서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 Altar Productions/ Empire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그렇지만 [로봇 족스]에는 2년전 일본의 작품인 [건헤드]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몇가지 장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먼저 [로봇 족스]는 밝은 대낮을 배경으로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시종일관 어두침침한 공간에서 특수효과의 한계를 어떻게든 숨기려했던 [건헤드]와는 달리,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는 이른바 '정면승부'를 걸고 있다는 것이지요. 덕분에 꽤 긴 시간동안 관객들은 로봇들의 육박전을 대형화면으로 감상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완성도와는 별개로 말이지요)
또한 앞서 언급했던 [로봇 족스]는 일본 만화에서 무수히 선보였던 변신컨셉이라든가 비밀무기, 격납고에서의 출격장면, 심지어는 로케트 주먹 같은 상상력을 현실화하는데 주력한 모습이 돋보입니다. 지금 ([트랜스포머]로 한없이 높아진) 눈높이에서는 조잡하기 짝이 없다고 느낄 수도 있으나, 아무도 터부시되었던 영역에 도전장을 던진 고든 감독의 두둑한 배짱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Altar Productions/ Empire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물론 시나리오의 엉성함은 새삼 언급할 필요도 없고, 특히나 동서간의 데탕트를 의미하는 듯한 엔딩의 작위적인 설정은 [로봇 족스]를 B급영화의 한계내에서 평가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을 남깁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스튜어트 고든 감독의 시도는 몇몇 매니아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서 비디오 시장에서는 제법 인기있는(?) 아이템이 되었습니다. 3년뒤 '로봇 족스2'라는 가제로 제작된 [로봇 워즈]는 [로봇 족스]의 영향을 받은 강력한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퀄리티는 [로봇 족스]에 비하자면 거의 3류급 수준이지만요.
ⓒ Altar Productions/ Empire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아무튼 실패로 끝나긴 했지만 [로봇 족스]는 지금 기술력이라면 다시 리메이크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로봇의 숫자를 좀 더 늘리는 한편,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미국만세의 주제의식만 어떻게 좀 빼준다면 더 없이 좋겠구요 ^^
* [로봇 족스]의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Altar Productions/ Empire Pictures.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아이언 머슬 (ⓒ 講談社 (KODANSHA) All rights reserved.), 로봇 워즈 (ⓒ Full Moon Entertainment/ Paramount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스튜어트 고든 사진(ⓒ MGM Home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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