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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숀 코네리가 영국 첩보원으로 분한 [007 살인번호 (Dr. No)]가 개봉된 이래 지금까지 007시리즈는 20편까지 무려 5명의 주연배우를 교체해가며 최장수 시리즈 영화로 자리 잡아 왔다. 여기에 번외편 [카지노 로얄(1967)]과 [네버세이 네버어게인]을 합치면 무려 22편이나 되니 007이란 시리즈의 상품적 가치를 능히 짐작할 만하다.

물론 첩보원 제임스 본드를 소재로 만든 이언 플레밍의 원작 자체가 냉전시대 자유-공산 진영의 팽팽한 긴장기에 나온 지라 탈 냉전시대 이후 007시리즈는 급속히 쇠퇴하여 그 명맥마저 잃을 뻔했다. 그때 등장한 것이 마틴 캠벨이 연출한 [골든아이]다. 피어스 브로스넌 이라는 새 제임스 본드를 기용해 만든 탈 냉전시대의 007는 전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다시금 흥행 프렌차이즈로 우뚝 섰다.

© MGM/UA All Rights Reserved.

007시리즈의 부활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5대 제임스 본드, 피어스 브로스넌


이후 4편의 007 시리즈에서 제임스 본드로 활약한 브로스넌은 '007을 위해 태어난 배우'라는 극찬을 받으며 신사적인 메너와 외모에서 풍겨나오는 중후한 인상으로 전세계 본드 팬들을 사로잡았다. 그러나 21편의 제작을 앞두고 시리즈의 제작에 안개가 드리웠다. 007 재기의 주역인 브로스넌이 '배우로서의 미래를 제임스 본드에 올인하는 조건'으로 게런티 인상을 요구했고, 제작진들은 안전한 선택이냐 모험이냐를 두고 고심에 빠졌다. 결국 언젠가는 변화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깨달은 제작진은 007 주연배우 교체라는 카드를 꺼내들고 캐스팅 작업을 시도했고 여기에 떠오른 배우들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Shoot 'Em Up © New Line Cinema. All Rights Reserved.

6대 007의 캐스팅 보드에 올랐던 클라이브 오웬. 개인적으로는 최적의 배우였다고 생각한다.


이때 물망에 오른 배우들이 이완 맥그리거, 휴 잭맨, 콜린 파렐 등의 스타급 배우와 클라이브 오웬, 에릭 바나 등 흥행배우로 급부상 중인 배우들까지 많은 사람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결국 A급 배우는 기용하지 않는 007 시리즈의 관례를 깨지는 않았다. 비교적 주연급 배우로서의 지명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제임스 본드의 기존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다니엘 크레이그가 확정되었을 때 팬들은 경악했다. "금발에다 저렇게 겉늙고 악당스런 모습의 사내가 본드라니!"

© MGM/UA, Sony Pictures Digital Inc.

금발에 미남배우도 아닌 다니엘 크레이그. 그가 제임스 본드라고? 말도안돼!


각종 팬사이트에서는 '안티-다니엘' 네티즌들의 악플들이 달렸고, 정작 캐스팅 된 크레이크 본인도 이같은 반응은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에게는 다른 선배 연기자들이 가지지 못했던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첫선을 보일 [카지노 로얄]에서 바로 그러한 점들을 십분 활용할 것이라는 기대가 필자를 설레게 만들었다.

미국에서 <카지노 로얄>이 개봉하자 언론들은 극찬에 가까운 호평을 보였다. 특히 그 칭찬의 중심에는 그 말많았던 새로운 007 다니엘 크레이그가 있었다. 그가 보여준 007은 도대체 기존의 작품들과 어떻게 달랐던 것일까? 아마 피어스 브로스넌의 [언리미티드]를 보신분은 아시겠지만 제임스 본드라는 인물은 자신과 정을 나눈 여인일지언정 결코 동정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 청순하기 이를데없는 소피 마르소가 알고보니 악녀였다는 이유로 주저함없이 처치하는 007은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다.

© MGM/UA All Rights Reserved.

상대가 여자라 해도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제임스 본드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007 언리미티드]


그러나 다니엘 크레이그가 보여준 본드는 사뭇 다르다. 빈정대거나 능글맞은, 때론 느끼하기까지 했던 모습은 많이 줄었고 말수도 부쩍 줄어서 매우 과묵한 본드로 변했지만 오히려 더 인간미가 넘치는 인물이다. 물론 [카지노 로얄]이 007의 시작을 알리는 프리퀄이긴 하나, 일련의 살인과정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피빛으로 물들이고 싶지 않은' 그의 절박한 심정도 잘 표현되어있다.

무엇보다도 에바 그린과의 샤워실 시퀀스는 그간 007무비에서 볼 수 없었던 너무나도 아름다운 명장면이 아니었는가! 다니엘 본인도 가장 흡족했던 장면이라 자부할 정도로 따뜻한 마음의 제임스 본드가 잘 드려난 장면이다. 단지 재미로 여자를 유혹하는 '플레이보이' 본드의 이전 모습을 싫어한 여성분들도 [카지노 로얄]은 부담없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총탄세례를 받으면서도 머리카락 하나 흩어짐 없이 고고하게 뛰어다니던 본드의 모습은 사라졌다. 정말 과격할 정도로 터프한 액션과 맨땅을 구르고 얼굴엔 상처투성이인 말 그대로 몸으로 때우는 스파이의 모습으로 변모했다. 많은 이들이 지적했던 것처럼 현실적인 액션을 강조한 '제이슨 본'시리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카지노 로얄]의 액션들은 [본 아이덴티티]나 [본 슈프리머시]의 싸늘함보다는 열정적이고 보다 파워풀하다.

© MGM/UA, Sony Pictures Digital Inc.

에바 그린과의 샤워실 시퀀스. <카지노 로얄>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다


따라서 007시리즈의 트레이드 마크였던 여러 가지 비현실적인 신무기들도 이번만큼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다니엘 크레이그 본인도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 놓고 본드역을 맡겼다'고 성토할 정도로 그는 완전히 백지상태에서 제임스 본드라는 새 캐릭터를 구축해야 했던 셈이다. 그러나 제작진이 원했던 변화는 결과적으로 성공했다.

다니엘은 비록 핸섬하진 않아도 역대 제임스 본드 배우들이 가지지 못했던 멋진 근육질 몸을 가졌으며, 인간미 넘치는 본드를 연기하기에 충분할만큼 연기력도 갖췄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단순한 상업배우가 아니라 작품성있는 영화에 고루 얼굴을 비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려한바와는 달리 다니엘 크레이그의 007은 매우 성공적이다. 당연하겠지만 그가 '본드, 제임스 본드'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을 앞으로도 당분간 스크린에서 볼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카지노 로얄>은 다니엘의 원맨쇼만이 전부는 아니다. [카지노 로얄]의 성공 뒤엔 감독 마틴 캠벨의 영리한 연출력이 있었으며, 다니엘을 보조하는 본드걸 에바 그린의 독특한 매력도 한몫하고 있다. 최초로 여성 M국장을 맡은 주디 덴치도 <골든아이>에서 처음 등장한 이래 지속적으로 M으로 등장, 007시리즈의 붙박이 출연자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이제 프리퀄을 막 끝낸 제임스 본드. 새출발을 알리는 멋진 오프닝 시퀀스처럼 앞으로 어떤 제임스 본드의 새면모를 더 보여줄 것인지 기대가 크다.



*. [007 카지노 로얄], 그밖의 007과 관련된 모든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만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 MGM/UA, Sony Pictures Digital Inc. 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 참고 스틸: Shoot 'Em Up (© New Line Cinema. All Rights Reserv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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