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하게 불편하지만 마음은 너무나 따뜻한
무려 13년 간의 제작기간 끝에 세상에 나온 영화 [내 사랑](원제: Maudie)은 장르를 규정 짓기가 애매하다. 한국식으로 멋대가리 없이 개명한 ‘내 사랑’만 놓고 보면 달달한 멜로물인가 싶기도 하지만 영화의 분위기 자체는 (적어도 중반까지는) 음울하고 고통스럽다. 굳이 멜로의 측면에서 말하자면 피끓는 청춘 남녀의 뜨거운 사랑이 아닌 주류에서 소외된 인간 대 인간으로서의 사랑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소아 관절염 환자인 모드 루이스는 불행한 인생을 살아 온 여인이다. 자신이 낳은 아이는 품에 안아보지도 못한 채 떠나 보냈고,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로는 자신을 마뜩잖게 생각하는 숙모 밑에서 온갖 멸시와 수모를 당하며 얹혀 살고 있다. 게다가 하나 있는 오빠는 빚에 시달리다 못해 추억이 남은 생가를 자신과 한 마디 상의도 없이 팔아 치우고는 홀로 사라져 버린다.
평생을 숙모 밑에서 애물단지 신세로 살아야 할 모드는 어느 날 어부 에버렛이 낸 가정부 채용공고를 보고 무작정 찾아간다. 고아원 출신의 에버렛은 일자무식에다 거친 삶을 살아온 탓에 그를 가까이 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 모드를 바라보는 경멸적인 시선은 에버렛에게서도 여전하지만 모드에게 있어 에버렛의 집은 홀로서기의 유일한 기회다. 그러던 두 사람의 관계는 모드가 소일거리로 그렸던 그림을 통해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이 작품은 캐나다의 실존 화가였던 모드 루이스의 실화에 근거한 영화다.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지 않았기에 그녀가 그린 그림은 오히려 사심없는 순수함이 담겨 있었고 그 가치를 알아본 몇몇 사람들에 의해 유명세를 타서 급기야 닉슨 대통령에게까지 그림이 판매되는 등 나이브 아트(필자 주: 전문적인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들이 창작한 작품)의 선구적 위치에 까지 올랐다.
그러나 [내 사랑]은 모드를 유명하게 만든 그녀의 작품이나 성공보다는 그녀의 삶에 더 주목한다. 더 이상의 희망을 발견하기 힘든 모드의 처지를 조명하며 영화는 중반에 이르기까지 위태위태한 모드의 일상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결과적으로는 관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지만 거기까지 이르기 위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힘든 여정을 거쳐야만 하는 것이다.
그 감정이입이 얼마나 자연스러운가 하면, 남편의 허락없이 집안 이곳 저곳에 그림을 그리는 모드를 보면서 저러다가 나중에 남편에게 줘 터지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시종일관 관객의 심리를 압도하는 식이다. 모드에게 가해지는 직접적인 폭력은 단 한 장면 뿐이지만 정서적으로, 언어적으로 가해지는 폭력은 수도 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갈등이 해소되고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씩 변화되면서 마치 눈덮힌 노바 스코샤의 설원처럼 차디찬 감정이 따사로운 봄볕에 녹듯 따뜻해지는 경험을 선사한다. 모드를 바라보던 폭력적인 시선이 거두어지고 다른 관점에서 그녀를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잿빛 같았던 영화의 분위기에는 조금씩 활력이 감돈다. 이처럼 비극에서 로맨스로의 전환은 강제적인 느낌없이 자연스럽다.
30년의 인생 여정을 다룬 만큼 이야기의 흐름이 다소 불친절한 감이 없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인상을 주지만 절제된 연출과 몰입도를 높이는 두 배우의 열연으로 인해 영화는 빛을 발한다. [핑거스미스]에 이어 에이슬링 월시 감독과 다시 호흡을 맞춘 샐리 호킨스는 감탄스러우리만큼 자연스러운 연기를 선보이며 무뚝뚝한 촌부의 역할을 소화해 낸 에단 호크의 연기변신도 놀랍다. 더불어 노바 스코샤의 목가적인 풍광을 담아내는 비주얼 또한 훌륭하다,
▷ 원래 모드 루이스의 배역에는 레이첼 맥아담스가 내정되어 있었다가 샐리 호킨스로 교체되었다. 샐리 호킨스와 환상의 캐미를 보여 준 에단 호크는 그녀와의 공연이 마치 [트레이닝 데이]에서 덴젤 워싱턴과 함께 할 때의 그 심정이랑 비슷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는 흔한 인간승리 드라마의 공식을 따르지 않는다. 격정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한 채 잔잔히, 그리고 고요하게 진행된다. 절름거리는 발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삶의 풍경을 자신의 눈으로 담았던 모드 루이스처럼. 하지만 그 속에 담겨진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도 큰 울림을 낳는다. 누구도 눈여겨 보지 않았지만 순수하게 그들만의 사랑을 찾았던 부부의 일화는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쉽게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블루레이 퀄리티
본 작품은 저예산 작품 특유의 단조로운 비주얼을 보여주지만 깔끔하고 잘 정돈된 인상을 준다. 모드 루이스의 예술성에 걸맞는 풍경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반영한 색감이 우수하며, 그림으로 뒤덮힌 작은 농가의 구석구석을 디테일하게 표현하는 면에서도 무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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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나 자연광을 활용한 표현력이 두드러지게 시각적 미학을 표현하는 작품이기도 한데, 에버렛이 모드와 싸우고 난 후 석양이 질 무렵 갈대 밭에서 낫을 다듬는 장면에서 그러한 점을 두드러지게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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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암부 표현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시대 배경상 최소한의 조명에만 의존하는 실내 장면들이 종종 등장하는데, 암부 그라데이션이 살짝 깨지는 몇몇 장면들에서 아쉬움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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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블루레이의 음질을 논함에 있어 이런 드라마 장르의 영화에서는 사운드의 좋고 나쁨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주로 주인공들의 대사와 음악이 사운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해도 과언은 아닌데, 우선 대사전달은 선명하고, 영화의 분위기와 좋은 매칭을 이루는 사운드트랙의 스코어도 풍성하다. 영화의 상당 분량이 작은 농가인 세트 안인 만큼 높은 명료도를 지닌 사운드를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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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셜 피쳐
환영할만하게도 본 블루레이에는 에이슬링 월시 감독의 음성 코멘터리가 수록되어 있다. 런던 소호의 암실에서 녹음된 이 음성 코멘터리에는 어떻게 이 영화를 만들었는지에 대한 감독의 기억을 더듬어 가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 코멘터리를 담기 위해 월시 감독은 한동안 영화를 감상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는 영화를 보면서 즉석해서 튀어나오는 감정을 코멘터리에 담아내기 위해서라고. 일반적인 로컬 블루레이에는 감독의 음성 코멘터리가 생략되는 경우가 많은 걸 생각해 보면 한글 자막까지 제공되는 본 코멘터리의 존재가 매우 가치있게 여겨진다.
또한 본 블루레이에는 한국어 자막을 지원하는 총 14개의 삭제장면이 수록되어 있으며 그 장면들은 다음과 같다.
▷Scenes 1. 잔디밭에 누워 꿈을 꾸는 모드
잔디밭에 드러누워 뒹굴거리는 모드의 모습.
▷Scenes 2. 재즈 클럽, 다이나를 만나는 모드
친구를 사귀러 재즈 클럽에 간 모드가 한 임산부를 만나 말을 건넨다. 임산부로서의 경험담을 주절주절 이야기하는데, 이는 과거 모드가 아이를 가졌지만 곧 잃게 되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영화상에서는 에버렛과의 대화에서 이러한 사실이 처음 언급된다.
▷Scenes 3. 기도 모임
모드의 숙모가 기도회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장면. 조카를 멸시하던 그녀가 그토록 열렬한 기독교 신자임을 보여주면서 위선적인 모습을 드러내준다.
▷Scenes 4. 아이다 숙모네 생선을 가져온 에버렛
시간상으로는 모드가 에버렛의 가정부 취업을 위해 면접을 봤다가 퇴짜를 맞은 후로서, 숙모네 집으로 에버렛이 생선을 배달왔다가 숙모와 에버렛이 언쟁을 하는 장면. 이는 에버렛과 아이다 숙모가 이미 구면인 관계고, 사이가 매우 안좋다는 것을 암시한다.
▷Scenes 5. 에버렛을 쫓아가는 모드
위의 장면에서 이어지는 씬으로 화가 나 돌아가는 에버렛을 쫓아가 모드가 말을 건다. 자신이 다른 집에 취업할 가능성이 있으나 여전히 에버렛의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것을 은연중에 내비치는 장면.
▷Scenes 6. 그림을 파는 모드와 산드라
그림을 파는 일을 도와주는 산드라가 모드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 사실 모드의 일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을 만들어 준 이가 바로 산드라인데, 영화상에서는 산드라에 대해 크게 포커스를 맟주지 않았다. 이는 모드의 성공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삶 전반을 두루 비추기 위한 의도인 듯 하다.
▷Scenes 7. 사랑과 인생을 얘기하는 모드와 산드라
위의 장면에서 이어지는 씬으로 사랑과 결혼을 바라보는 서로의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Scenes 8. 에버렛의 개가 죽다
자신의 반려견 브라우니가 죽어가는 것에 어쩔 줄 몰라하는 에버렛. 사실 이 개는 영화에서 꽤 의미심장한 캐릭터인데, 처음 에버렛이 집안의 서열을 정하면서 이 개를 언급한 적이 있으며, 영화의 후반부에서는 몸이 쇠약해진 모드가 에버렛에게 개를 더 키우라고 권하는 장면이 나온다.
▷Scenes 9. 개를 묻어주는 에버렛
역시나 위의 장면과 연결되는 씬으로 죽은 브라우니를 묻어주는 에버렛과 이를 목도하는 모드의 모습이 담겨 있다.
▷Scenes 10. 산드라의 집에서 모드를 데려오는 에버렛
에버렛과 다투고 난 후 모드가 산드라의 집에 기거하게 되는데, 잠시 냉각기를 가진 뒤 모드를 데리러 에버렛이 차를 끌고 가는 짧은 영상.
▷Scenes 11. 낮잠 침대를 받는 모드
낮잠 침대를 집안에 들여놓고 좋아하는 모드의 모습이 담겨 있다.
▷Scenes 12. 모드가 죽고난 후 고아원에 간 에버렛
모드가 세싱을 떠난 뒤 다시 고아의 처지가 된 에버렛이 자신이 자란 고아원의 식당에 앉아 처량하게 홀로 식사를 하는 장면.
▷Scenes 13. 모드가 죽은 뒤에 방문한 산드라
영화상에서는 에버렛과 산드라 두 사람의 사이가 썩 좋은 것으로 묘사되지는 않는데, 모드의 사망 후 산드라가 찾아와 장례식을 놓친 것에 대해 사과하며 에버렛을 위로해준다. 이에 에버렛은 말 없이 산드라에게 그림 한 점을 건넨다. 이 그림은 과거 산드라가 사길 원했지만 모드가 미완성작이라며 팔길 꺼려하자 에버렛이 파는 물건이 아니라고 했던 바로 그 작품이다.
▷Scenes 14. 설원 속의 에버렛
뗄감을 하러 갔던 에버렛이 눈밭을 힘들게 걸으며 집으로 들어가는 영상. 홀로 남은 에버렛의 척박한 심경을 대변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Maudie: Electronic Press Kit
그대로 직역하자면 ‘전자 보도자료’로서 언론 시사회에서 배부되는 보도자료를 영상으로 제공하는 형식이다. 사실상의 메이킹 필름으로서 모드와 에버렛을 연기한 샐리 호킨스, 에단 호크 등이 나와 캐릭터를 연기할 때 염두에 두었던 점들, 애로사항 등에 대해 말하는 한편, 스텝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어떤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작업에 임했는지 이야기한다.
Maudie:: Look Book
대부분의 화가는 자신과 친숙한 풍경을 그림에 담는다. 본 영상은 모디가 생전에 바라봤을, 노바 스코샤의 전원적인 풍경과 모드의 그림 속 풍광을 채우는 색깔, 그리고 그녀의 마음 속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을 담아낸 일종의 영상 화보집이다.
내 사랑: 에이슬링 월쉬 감독 인사 영상
아마 이런 류의 부가영상은 좀처럼 접하기가 쉽지 않지 싶은데, 1분 남짓한 짦은 길이의 이 영상은 에이슬링 월시 감독이 한국의 팬들에게 직접 띄우는 영상편지다. 전세계 유일하게 한국어 블루레이 판본에만 실린 레어급 영상인 셈.
내 사랑: 에단 호크 인사 영상
그 뿐만이 아니다. 에단 호크가 한국 팬들에게 보낸 영상편지 역시 본 블루레이의 소장가치를 높히는 특별한 선물이다. 에단 호크는 이 영상에서도 샐리 호킨스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총평
영화에서는 밝히지 않았으나 이들의 이야기는 해피 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모드 루이스의 남편인 에버렛은 먼저 떠나보낸 아내를 따라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그래봤자 아내의 화풍을 흉내내는 수준의 작품들이었지만 아내 모드를 그림 속에 그려 넣었던 걸 보면 그가 아내를 얼마나 그리워하며 여생을 보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모드가 세상을 떠난 지 9년 후, 애버렛은 유명세를 탄 자신의 집에 침입한 강도를 막으려다 생을 마감하게 된다.
이 비극적 결말을 굳이 영화에서 담으려 하지 않은 건 (심지어 자막으로도 나오지 않는다) 두 사람이 살아생전 나누었던 삶의 희로애락을 조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이 버렸고, 세상을 버렸던 여자와 남자의 만남. 서툴기 그지없는 인연이지만 그렇게 평생의 배필을 맞이했고, 사랑을 받으며 사랑을 주었던 이들의 이야기는 어느덧 관객의 마음에 파고들며 삶을 관조하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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