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읽기전에: 이 글은 [로보트 태권브이] '원작자'에 대한 내용이 아니라, 코믹컬라이징, 즉 '만화판의 원조 작가'에 대한 글이니 이에 대한 오해는 없길 바람.
요즘 세대들이 관심이야 있겠느냐마는 ‘최초’의 [로보트 태권브이] 코믹스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을 묻는다면 아마도 십중팔구는 김형배 화백의 [로보트 태권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세계 최초로 전화를 발명한 사람이 안토니오 무치가 아니라 그레이엄 벨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일단 팩트를 말하자면 김형배 화백은 [로보트 태권브이] 1편 코믹스를 그린 적이 없으며 그가 처음 그린 태권브이 만화는 2편에 해당하는 [로보트 태권브이: 우주작전]이다.
그럼 최초라는 타이틀은 누구에게 돌아가야 할까? 답은 월간 <소년세계>에 1976년 5월부터 [로보트 태권브이] 1편의 코믹스 버전을 연재한 김승무 작가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만화가 김승무에 대한 정보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데, 국내 최고의 만화 데이터베이스인 <만화규장각> 사이트에서도 이 작가에 대한 정보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 김승무/ 소년세계. All rights reserved.
결국 한국만화사, 아니 한국 슈퍼로봇 역사에서 무시하지 못할 순간의 역사가 공식적으로는 사라져버린 셈이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극장판 [로보트 태권브이]의 대성공 이후 얼마 안있어 [로보트 태권브이: 우주작전]이 공개될 무렵, 특이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소년세계>의 김승무 작가가 여전히 태권브이 작가로서 '우주작전'편의 코믹스판을 연재하던 차에 다이나믹프로(주의: [마징가 제트]의 나가이 고가 전속으로 있던 그 다이나믹 프로가 아니다 -_-;;)에서 대본소판으로 3권짜리 [로보트 태권브이: 우주작전]을 내놓은 것이다. 이것이 김형배 화백의 출세작이 된 바로 그 태권브이 코믹스다. 1
ⓒ 김형배/ 다이나믹프로. All rights reserved.
혜성처럼 등장한 김형배 화백의 [로보트 태권브이: 우주작전]은 정교한 화풍과 애니메이션을 뛰어넘는 역동적인 연출로 인해 단숨에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내 ‘태권브이 전담 만화가’의 칭호도 자연스레 그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반면 김승무 작가는 원조의 타이틀을 가지고도 그 메리트를 상실한 채 서서히 존재감을 잃고 말았다.
이토록 소리소문 없이 잊혀지게 된 김승무판 태권브이 작품은 오늘날 몇몇 소장가들의 서고에 고이 장식된 <소년세계> 부록만화 몇 편으로 간신히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인데, 놀랍게도 1980년대에 소학관의 SS 할리코믹스라는 마이너 레이블을 통해 단행본으로 출간된 적이 있다. 김민철 작가의 [철인 24호]와 합본형태로 출간된 이 작품은 겉표지가 [로보트 태권브이: 수중특공대]의 그림으로 되어 있지만 실상 내용은 놀랍게도 김승무판 '우주작전'의 연재본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책장을 넘기면 컬러로 된 한 면에는 [84 태권브이]의 스틸컷이 수록되어 있고, 이어서 흑백 스틸컷과 함께 뜬금없이 '수중특공대'편의 줄거리가 요악되어 있다. 재미있는 건 중간 중간 들어있는 태권브이 삽화가 김승무 작가의 것이 아닌 차성진 화백의 것인데, 주로 [로보트 태권브이: 마이크로 결사대]의 그림을 오려 붙였다. 이러한 행태로 보건데 할리코믹스라는 출판사가 과연 김승무 작가에게 정식으로 라이센스를 받아 출판한 것인지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갖게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어쨌건 진실은 저 너머에...
내용이야 이미 알만한 사람은 다 알터이니 이 리뷰에서는 과감히 생략하기로 하자. 여기에서 주안점을 둘 부분은 바로 경쟁작아닌 경쟁작이었던 김형배 버전과의 비교다.
기본적으로 김승무 버전과 김형배 버전은 화풍이 완전히 다르다. 김승무 작가가 조금은 올드한 시대적 느낌을 담아낸 다소 엉성하지만 정감있는 그림체라면, 김형배 화백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을, 자로 잰 듯한 깔끔한 화풍과 세련된 캐릭터 디자인이 특징을 이룬다. 장르가 메카닉이다보니 이러한 두 작가의 차이는 대중의 입맛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먼저 캐릭터 디자인을 보면 각 인물들 간의 모습이 애니메이션과도 차이를 보이지만 두 작가의 표현 방식도 큰 차이가 있다.
ⓒ (주)로보트태권브이. All rights reserved.
천문학자 오박사의 경우 김승무 버전은 연재물이었던 탓인지 처음에는 애니메이션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가 중간에 애니메이션과 비슷한 외모로 바뀌는 것도 볼 수 있다. 이는 초기 코믹스를 그릴 당시 콘셉트 없이 시나리오만 보고 작업을 진행했다가 추후 애니메이션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수정된 것으로 보인다.
ⓒ (주)로보트태권브이. All rights reserved.
메카닉은 말할 필요도 없다. 태권브이의 모습만 보더라도 독자들이 어느 쪽에 더 끌렸을 지는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다. 2
상단 ⓒ김승무/소년세계, 하단 ⓒ김형배/GNS. All rights reserved.
김승무 버전의 큰 장점이라면 애니메이션에서 검열로 잘려나간 마사오와의 첫번째 대결 장면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흥미롭게도 마사오는 이 장면에서 스스로 검도라고 칭하고 있지만 정작 그는 주먹만 쥐고 있다. 당시 도서잡지주간신문윤리위원회의 눈가리고 아웅식 횡포가 얼마나 활개를 쳤는지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검열!검열! 또 검열!) 3
ⓒ 김승무/소년세계. All rights reserved.
연출력의 차이도 확연하다. 다음의 한 장면을 보자. 분해 및 자동복구가 되는 알파별 로봇이 등장하는 씬인데 동일한 장면이지만 연출에 있어 김형배 버전이 한층 역동적이고 묘사가 탁월하다.
좌측 ⓒ김승무/소년세계, 우측 ⓒ김형배/GNS. All rights reserved.
극의 하이라이트인 적의 최종 보스로봇과의 대결도 애니메이션과 김형배 버전, 김승무 버전이 각각 다르다. 애니메이션에는 괴조로봇 코크가 등장하는 반면, 김형배 버전에서는 메카닉 형태의 스핑크스 로봇과 또 다른 로봇이, 김승무 버전에서는 사자의 모양을 한 스핑크스 로봇과 대결한다.
상단 ⓒ김승무/소년세계, 하단 ⓒ김형배/GNS. All rights reserved.
엔딩 역시 다르다. 김형배 버전은 훈이와 영희, 깡통, 메리가 사이좋게 지구로 돌아가는 화기애애한 엔딩으로 처리했으나 김승무 버전은 메리가 기적에 의해 다시 인간으로 변화되는 감동적인 엔딩으로서 애니메이션과 동일한 루트를 따라간다.
ⓒ 김승무/소년세계. All rights reserved.
김형배 버전과는 달리 김승무 버전에서는 [마징가 제트]의 흔적도 찾을 수 있는데, 이를테면 헬박사의 병사들인 철가면을 메카닉으로 변용시킨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4
ⓒ 김승무/소년세계, 네모 안 [마징가제트] ⓒ Nagai go, Dynamic Pro. All rights reserved.
이처럼 동일한 작품을 두 작가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로보트 태권브이: 우주작전]은 한국만화사에서도 매우 독특한 사례를 남긴 경우라고 할 수 있다. 태권브이 프랜차이즈가 자리 잡아가면서 작가들도 늘어나 차성진, 한재규, 안제일 등 실력있는 작가들이 태권브이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는데, [로보트 태권브이 대 황금날개의 대결]의 경우는 <소년세계>의 한재규, <새소년>의 김형배 작가가 동일 작품을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5
한편 김승무 작가는 주도권을 김형배 화백에게 넘긴 후에도 계속해서 태권브이 만화가로 활동했는데, 애니메이션화가 좌초되었던 [로보트 태권브이: 지하대탈출]의 코믹스판인 '대탈출'편을 <소년세계>에서 연재할만큼 태권브이 전담 만화가로서의 활동이 꽤 오래 지속되었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듯 하다. 태권브이 원조 만화가로 나섰던 작가인 만큼 큰 꿈을 가지고 만화계에 입문했을 김승무 작가. 아마 꾸준히 작품활동을 했더라면 원로급 화백이 되어있을 그는 지금은 어디서 무얼하고 계실까.
본 포스트는 2015-10-16 Daum 메인에 소개되었습니다. 간만의 메인 입성이네요.
* 본 리뷰에 사용된 스틸 및 사진은 인용의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관련된 권리는 해당 저작권자에 소유됨을 알립니다. 단, 본문의 내용은 작성자에게 저작권이 있습니다.
- 이 부분을 언급하는 데 있어 많은 고민을 필요로 했는데, 사람의 선입견이라는게 무서운 것이 김형배판 우주작전 역시 잡지 연재로 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로보트 태권브이 대 황금날개]나 [황금날개 123] 같은 만화를 월간지 새소년에 연재하기도 했으나 김화백 자신이 '(다이나믹 프로의 사장인) 이영복씨의 권유로 태권브이를 그리게 되었다'고 진술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김형배판 [로보트 태권브이: 우주작전]은 잡지 연재없이 바로 단행본 발간이 되었음을 확신할 수 있다. [본문으로]
- 물론 이 문제를 비단 작화 실력의 차이로만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다. 사실 김형배 버전이 인기가 있었던 건 연재물 형식이 아닌 단행본 형식으로 연재를 기다림없이 바로 접할 수 있다는 장점에서 기인한 바도 클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 물론 이 같은 현상은 김형배 버전에서도 볼 수 있는데 마사오와의 2차 대결에서 여전히 '검객' 마사오는 검을 들고있지 않다. [본문으로]
- 태권브이 자체가 [마징가제트]를 모티브로 했다는 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도록 하겠다. [본문으로]
- 그리고 다이나믹 프로의 차성진 화백이 [황금날개 대 태권브이의 대결]이란 작품을 발표했으나, 애니메이션판과 동일한 베이스의 작품인지는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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