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50대의 남성들에겐 전설같은 만화가 있다. 이석 작가의 [철인 삼국지]다. [악동이]로 유명한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이희재 이사장이 한 잡지의 공모전에서 2등으로 당선되어 이정문 화백의 문하생으로 들어간 계기도 [철인 삼국지]를 모사해 보낸 그림이었을 만큼 당대에 있어서는 대단한 인기작이었다.
그런데 이종진 작가의 [철인 28호]나 김산호 화백의 [라이파이] 같이 당대 초히트를 기록한 작품들이 드문드문 개인 소장가들의 서가에 남아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철인 삼국지]는 가히 '전설의 고향'급으로 그 실체가 무형문화재 수준이다. 왜일까.
1972년에 발생한 정모군 자살사건이 그 원인일게다. 만화계의 분서갱유라 불릴만큼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몰고 온 이 사태는 사건의 당사자인 정모군이 평소 '장비'가 죽은척하다 되살아나는 내용이 담긴 [철인 삼국지]의 애독자였다는 단편적 사실 하나만 가지고 자살의 원인으로 지목, 그간 아이들의 싸구려 문화상품으로 치부되며 업신여겨오던 만화를 대거 살처분했던 해프닝아닌 해프닝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는 '만화=불량=유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버렸으며 매년 어린이날이면 만화책을 쌓아놓고 불태우는 화형식이 198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죽음까지 몰고 온 불량만화> 1972. 2.2 동아일보 기사. 정모 소년의 자살과 맞물려 시대의 희생양이 된 [철인 삼국지]는 오늘날 실체조차 확인할 수 없다. 자라나는 꿈나무들의 유일한 오락거리마저 사회악으로 둔갑시킨 어른들의 반성이 필요한 대목이나 오늘날에도 인식의 변화는 그리 없어보인다.
이제 A5 크기의 갱지에 10여페이지로 이뤄진 낡은 만화책의 사본도 구할 수 없을만큼 초희귀작이 되어버린 [철인 삼국지]는 그렇게 현재는 물론이고 후대에도 영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안타깝다.
1980년대에 발간된 김삼 화백의 [로봇 삼국지]는 그나마 [철인 삼국지]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일지도 모른다. [소년 007] 같은 장기 연재작으로 탄탄한 입지를 다진 그는 자신만의 해학과 풍자가 담긴 스토리로 [삼국지연의]를 재해석했다.
인간과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 주인에게 버림받은 유비, 관우, 장비가 로봇 폐기장에서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해 의기투합한다. 그들은 각자 주인들에게 복수를 한 뒤 우주선을 타고 지구를 탈출, 오리온성에 도착한다. 로봇과 인간의 위치가 바뀐 오리온성에서 로봇 삼형제는 폭군 동탁과 여포, 조조를 만나 치열한 패권을 다툰다.
[로봇 삼국지]에서 눈여겨 봐 둘 점은 로봇으로 리모델링한 삼국지 캐릭터다. 여자를 밝히는 장비와 빌어먹기 위해 넝마를 뒤집어쓰고 있는 제갈공명, 한손에 철퇴를 장착한 괴력의 소유자 여포, 녹스는 것을 두려워 해 해저왕국 정복을 주저하는 동탁 등 작가의 기지가 번뜩이는 캐릭터들로 가득하다. 여기에 김삼 화백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는 요염한 여인도 빼놓을 수 없다.
신문수 화백의 [로봇 찌빠]와 함께 지극히 한국적인 명랑 로봇만화의 자장하에 있는 [로봇 삼국지]는 겉으로 보여지는 코믹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시니컬한 면이 많다. 특히 유비, 관우, 장비의 내분을 유도하는 조조의 책략이나 여포를 함정에 빠뜨리는 재갈공명의 권모술수 등 소년만화(특히 로봇물)가 흔히 추구하는 무력의 대결이 아닌 지략적인 부면을 많이 다루고 있다.
작가의 사정때문인지 급조한 듯한 느낌의 결말은 허무하다 못해 당혹스럽기까지 한데, 그간 유비 일행이 돕던 오리온성의 왕비가 난데없이 타임머신으로 그들을 원래 지구의 현재로 데려가 주겠다며 쓰레기 처리장에 '말 그대로' 던져 놓고 줄행랑을 친다. 공중에서 낙하한 유비 일행은 산산조각이 나서 머리만 남은 이들의 운명도 기구한데, 유비는 어린아이들의 팽이가 되고, 관우는 벽걸이 장식이, 장비와 제갈공명은 각각 허수아비가 되어 '우리가 유비나 관우보다는 더 낫지 않냐'며 스스로를 위안한다.
[철인 삼국지] 이래 로봇을 등장시킨 '삼국지'의 변용이자 로봇만화가 인기를 끌던 1980년대에 보기 드문 탈 장르적 시도를 한 작품으로서 [로봇 삼국지]는 꽤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다만 이렇게 의미있는 작품조차 제대로 된 루트로 감상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P.S:
1.훗날 김삼 화백의 단편집 [해결사 땡칠이]에 스핀오프 격인 [로봇 삼형제]란 단편이 발표되었다.
2.[철인 삼국지]의 작가에 대해서 일부 문헌에서는 이석으로, 일부 문헌에서는 이상석으로 기재되어 있다. 참고로 이상석은 다이나믹 콩콩코믹스의 [우주해적 코브라] 시리즈에서 원작자인 테라사와 부이치를 대신해 작가로 기재되어 있는데, 이는 다름아닌 다이나믹 프로의 발행인이었던 이영복 작가의 필명이다.
3.[로봇 삼국지]가 [철인 삼국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죽었다고 생각되었던 캐릭터가 되살아나는 몇몇 에피소드 때문일뿐 정확한 건 알 수 없다. 시대적 배경은 [로봇 삼국지]가 인류와 로봇이 공존하는 미래인 반면, [철인 삼국지]는 앙고라 수소폭탄에 의해 인류가 멸망된 이후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 다소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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