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지나고 겨울방학이 오기 전까지는 극장가의 비수기 시즌입니다. 주로 이 시기에 그동안 창고에서 썩고 있거나 또는 저렴하게 들여온 작품들이 하나 둘 개봉하게 됩니다. 어떤 면에선 천편일률적인 블록버스터나 주류 장르에서 소외된 영화를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뜻밖의 수확을 건지는 시기이기도 하고요.
7년전 [원스]가 그랬습니다. 유명 감독의 영화도, 유명 배우가 등장하는 영화도 아닌 작은 독립영화가 던진 잔잔한 파문은 음악 영화라는 생소한 장르의 매력에 많은 영화팬들을 빠뜨린 계기가 되었죠. 당시 글 좀 쓴다하는 영화 블로거들은 하나같이 [원스]에 대한 극찬을 마지 않았고 이같은 호평은 입소문을 타고 번져 독립영화로서는 최초로 20만 관객을 돌파하는 소박하지만 값진 기록도 남기게 됩니다. 이 영화 한편이 독립영화에 대한 시각을 바꿔놓았다해도 과언은 아닐겁니다.
[원스]의 존 카니 감독이 7년만에 내놓은 [비긴 어게인]은 이 전작과 마찬가지로 이 시기에 딱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적당한 오락성과 감독 특유의 음악적 감성을 살려 대중에게 어필하는 영화이지요. [원스]와 비교해 보자면 조금 더 상업성에 한발 가까이 내딛은 작품이어서 [원스]의 아마추어적 느낌에 거부감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좀 더 편안하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영화는 우연한 사건과 만남이 이루어낸 무척이나 단순한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싱어송라이터인 그레타는 음악을 좋아하지만 딱히 음악으로 성공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여성입니다. 스타덤에 오른 남친을 따라 뉴욕에 온 그녀는 남친의 배신에 충격을 받고 술집을 찾았다가 한물간 음반 프로듀서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내 의기투합해 거리 공연을 레코딩하는 무모한 프로젝트를 실행에 옮긴다는 내용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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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스]와 마찬가지로 [비긴 어게인]의 음악은 영화의 8할 이상을 차지합니다. 영화의 내용이라 할만한 것이 모두 프로젝트 밴드의 레코딩 과정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사족은 불필요해 보입니다. 그저 귀로 듣고 즐기면 되는 겁니다. 물론 남녀간의 썸타는 내용이 살짝 첨부되긴 해도 [비긴 어게인]은 전형적인 러브 스토리와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이 [비긴 어게인] 아니 존 카니 스타일의 음악영화가 가진 장점이지요.
다만 이번 작품에서는 키이라 나이틀리나 마크 러팔로 같은 전문 배우들이 출연하다보니 [원스]와 같은 사실성이 조금은 퇴색된 감이 있습니다. 이것이 영화의 진정성에까지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지만 [원스]의 오묘하면서도 설익은 섬세함이 사라진 건 분명합니다. [원스]가 평론가들의 극찬을 받을만한 작품이라면 [비긴 어게인]은 평론가들보다는 대중들에게 더 잘 먹힐만한 영화죠.
혹자는 상업적으로 돌아선 감독의 이번 작품에 다소 실망하는 것 같습니다만 요즘 같은 시대에 이처럼 깔끔한 연출을 보여준 힐링무비도 드물지 싶습니다. 영화를 보다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가슴 속에서 끌어 오르는 순수한 열정에 동화되는 힘이 느껴지는데, 그레타와 댄이 처음 만나는 클럽에서 그레타의 심심한 기타 연주를 들으며 댄이 상상으로 그 노래를 편곡해 음악의 신비함을 보여주는 명장면만으로도 [비긴 어게인]을 감상할 충분한 가치가 있습니다. 실제 가수이자 연기도 보여준 애덤 리바인의 노래부터 키이라 나이틀리가 직접 부른 영화의 O.S.T는 보너스입니다.
P.S:
1.이 영화의 월드와이드 수익 1위가 한국이라는 점이 놀랍습니다. [원스]때도 의외였는데, 역시 입소문이 좋으면 관객이 찾는다는 건 틀린말이 아니죠. 물론 시기를 잘 만나야 그것도 통하겠지만. 지금의 열기는 마치 [원스] 열풍을 연상시킵니다.
2. 헤일리 스테인펠드는 [쓰리데이즈 투 킬]에서와 아주 비슷한 역할을 맡았더군요. 이러다가 십대 반항아 전문 연기자가 되려나요.
3.원래는 그레타 역에 스칼렛 요한슨이 물망에 올랐답니다. 그녀가 거절하긴 햇지만요. 아이러니하게도 스칼렛 요한슨의 [루시]와 키이라 나이틀리의 [비긴 어게인]이 같은 시기 극장가에서 전혀 다른 흥행 결과를 내고 있는 상황도 나름 흥미롭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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