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이 되어버린 1951년 영화 [지구 최후의 날]에서 외계인 클라투는 지구인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 지구의 전기가 30분간 정지되는 상황을 만듭니다. 고작 30분,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전기가 공급되지 않는 이 시간동안 전 세계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또 한편의 영화 [트리거 이펙트]는 어느날 갑자기 전기가 끊겼을때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스릴러물입니다. 이 작품 역시 며칠동안 전기가 끊기는 것 만으로도 상상못할 비극이 벌어지는 미국 사회를 그려내며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영화였지요.
올 여름은 그 어느 해보다도 더웠던 한 해였습니다. 뉴스에서는 기상 기록 경신에 대해 거의 매일 같이 보도했고, 최악의 전력대란을 우려한 정부 차원에서 냉방 자체를 촉구하는 캠페인이 여기저기서 펼쳐지기도 했죠. 여름만 되면 시민들을 협박하다시피해 전기 사용을 줄이도록 요구하는 행정당국의 태도를 비판하는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습니다.
올해로 10번째를 맞이하는 EBS 국제다큐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블랙아웃]은 천연자원이 풍부해 서아프리카의 저수지라 불리는 기니의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제목처럼 이 작품은 밤만되면 전기가 끊기는 블랙아웃이 일상화된 기니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포커스를 맞춥니다. 학교가 끝나고 저녁이 되면 과제나 시험공부를 위해 불빛이 있는 곳을 찾아나섭니다.
그곳은 주유소나 공항같은 시설입니다. 학생들은 유일하게 밤에 빛을 비추는 이 곳을 찾아 수 킬로미터씩 이동하여 21세기판 형설지공을 실천합니다. 여학생들은 강간이나 폭행 등 각종 범죄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 먼길을 오가야 하는데,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건 이들에게 있어 공부만이 이 현실을 빠져나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 Animal Monday, HSI London, Odd Girl Out Productions. All rights reserved.
1990년대만 하더라도 기니에서는 전기가 끊기는 일은 없었답니다. 그러나 오랜기간 독재와 내전, 부정,부패 등으로 정치적 불안에 시달린 기니는 결국 발전소 부품 수급이 어려워질만큼 제정이 악화되었고 결국엔 저녁에 전기를 공급하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게 됩니다. 국민들은 통치자를 뽑아줄 때마다 이번에는 믿을 수 있거라는 희망을 갖지만 결국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렇게 희망과 실망을 반복하고 있지요.
아이러니한 사실은 기니가 원자력 발전의 근간이 되는 우라늄의 생산국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 우라늄을 채취해 가는건 기니의 값싼 노동력을 이용한 부유국들의 거대 회사이며, 그 혜택은 기니 국민들에게 전혀 돌아가고 있지 않습니다. 이는 국가의 자원이나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의 문제라는 얘기입니다.
하지만 더 슬픈 사실은 이렇게 형설지공의 학구열을 불태우는 아이들의 수가 줄어들어 대학진학을 포기하는 학생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인데, 유학갔다 온 아이들은 취직이 수월하지만 국내 대학졸업자들에게는 그나마 취업할 기회가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치워지고 있는 것입니다.
ⓒ Animal Monday, HSI London, Odd Girl Out Productions. All rights reserved.
이같은 기니의 현실은 그저 제3자의 입장에서 강건너 불구경하듯 눈요기로 삼을만한 내용이 아닙니다. 그들의 현실이 놀랄만큼 우리와 흡사하기 때문이지요. 지금 현 시점에서 우리 중 누구도 한국에서 전기없는 저녁을 보내게 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2011년, 불시에 찾아온 '블랙아웃'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서두의 영화화 같은 끔찍한 사태까지는 아니더라도 이 해프닝은 블랙아웃이 남의 일이 아니라 실제 우리에게 벌어질 수 있는 '현실'임을 절감케 했습니다.
[블랙아웃]은 국가의 시스템이 망가지고 정부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할 때 수많은 국민들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를 고발하는 작품입니다. 개인의 힘만으로는 결코 바뀔 것 같지 않는 이 현실 속에서 그래도 희망을 끈을 놓치 않고 어두운 조명 불에 한 글자라도 더 읽으려는 아이들의 모습이 못내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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