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만화계, 그 중에서도 로봇만화에 있어 기념비적이라고 할만한 작품들은 얼마나 될까? 이 분야 주류 작품들이 일본에서 생산된 것이다보니 무분별한 캐릭터 표절과 베끼기 관행에 물들어 오늘날까지 제대로 평가받는 작품은 의외로 많지 않다. 얼마전까지 독도를 수호하는 로보트 태권브이 조형물 프로젝트가 발표되었다가 여론의 심한 질타를 맞아 계획을 철회한 사태는 당시 관행적인 행태의 결과로 인해 우리 문화를 대표할만한 로봇 캐릭터 하나도 떳떳하게 내세우기 힘들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또한 고유성 화백의 대표작 [로보트 킹]은 어떠한가. 1990년대까지만해도 한국의 자존심이라고 불릴만큼 토종 로봇만화의 이미지가 강한 작품이었다가 요코야마 미츠테루 원작의 [자이언트 로보] OVA가 국내에 암암리에 유입되면서 이 작품에 등장하는 자이언트 로보 2호기(GR2)가 로보트 킹과 닮았다는 사실이 드러나 논란의 도마 위에 올랐다. 결국 시간이 흐르고 관련된 의혹들이 하나 둘씩 검증이 되고 나니 로보트 킹에 대한 독창성의 가치는 대부분 희석되어 버린 상태다.
ⓒ 고유성/ G&S All rights reserved.
한 때 소년들의 로망을 자극했던 두 거물 로봇, 로보트 태권브이나 로보트 킹이 작품의 내용에 있어서의 창작성이나 정서적인 측면에서의 친밀도를 뒤로 한 채, 캐릭터 표절의 의혹때문에 가치절하된다는 사실은 이 분야에서 캐릭터 디자인과 창작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곱씹어 보게 만든다. 결국 이 지점으로 들어가면 가뜩이나 극소수인 로봇만화와 관련해서 기념비적이라고 불릴만한 작품은 거의 남지 않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해서 자괴감에 빠지지는 말자. 극소수의 작품들이라도 분명 자부심을 가질만한 토종 로봇이 분명히 있다. 명랑만화인 [심술통] 시리즈로 잘 알려져 있지만 한때 [설인 알파칸], [녹색별을 찾아라], [캄마소년 카르마이] 등 한국형 SF만화의 토양을 개척하는데 앞장섰던 이정문 화백의 [철인 캉타우]는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순수 창작 로봇만화다. 1976년 월간 <소년생활>에 연재를 시작한 [철인 캉타우]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외계인들의 각축전을 그린 작품이다.
ⓒ 이정문 All rights reserved.
[철인 캉타우]의 내용은 대략 이렇다. 수백만년 전 인류가 살지 않던 지구는 오크타 혜성인에 의해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미 그 전부터 지구에 와 있던 또 다른 외계인인 스펠타 성인들이 나타나 두 세력은 서로 지배권 싸움을 벌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빙하기를 맞이하며 두 외계종족의 싸움도 멈춰 긴 동면에 들어가게 된다. 이제 시간이 흘러 북극에서 발생하는 이상 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한국인 과학자들이 스펠타가 만든 괴물 티아고론의 습격을 받는다. 가까스로 위기를 모면한 탐사대의 강현은 동면 상태로 잠들어 있던 오크타 혜성의 소년 카우카를 발견하게 되고 스펠터에 맞설 유일한 존재, 철인 캉타우의 도움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우선 이 작품이 탄생한 1976년의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 때는 말 그대로 마징가의 시대였다. 같은 해에 한국 로봇애니메이션의 붐을 일으킨 [로보트 태권브이]는 말할 것도 없고, 대본소용으로 제작되거나 잡지부록으로 딸려 나온 상당수의 만화가 마장가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로봇의 디자인은 물론이고 이야기의 주된 흐름 또한 과학자가 관장하는 연구소가 지구방위의 거점이 되는 설정마저 모두 마징가의 영향이었다.
ⓒ 이정문 All rights reserved.
그러나 [철인 캉타우]는 달랐다. 메인 기체인 캉타우는 지구의 것이 아닌 외계인의 발명품이다. 막연히 지구정복을 꿈꾸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나 테러 조직과 착한 지구인의 대결이 아니라 외계인과 외계인의 대결울 다룬 갈등 구조도 독특하다. 오래전 부터 극지방에 동면되어 있던 외계 종족들간의 싸움에 지구인이 말려든다는 이야기의 기본 골조는 솔직히 2007년 마이클 베이 감독의 [트랜스포머]가 [철인 캉타우]를 참조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외계인인 스펠터 성인이 지구를 정복하려는 이유는 명료하다. 지구의 환경을 파괴하는 인류를 대신해 자신들이 주인이 되겠다는 논리로 환경 보전에 대한 선구안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물론 막강했던 마징가의 영향을 완전히 떨치기엔 어려웠던 것인지, 작품 속에 마징가가 까메오로 출연하긴 하는데 그 형식도 다른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스펠타가 설계도를 훔쳐 만든 가짜 마징가, 게다가 디자인도 오리지날 그레이트 마징가와 차이를 보인다. 이만하면 마징가 팬덤을 건드리지 않는 선에서 최소한의 인용 내지는 오마주를 한 것이니 저작권을 크게 넘어서지 않은 셈이다. 1
무엇보다 캉타우의 기체 디자인은 [녹색별을 찾아라]에서 등장한 철인 라이져처럼 굉장히 독창적이다. 곤충을 연상케하는 거대한 몸체에 왼손에는 보기에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철퇴가 달려있다. 음성인식이 가능하며 주 동력원은 친환경 소재인 번개다. (이는 작품에서 강조하는 지구 환경 보존에 대한 직간접적인 메시지이기도 하다) 생김새만으로는 적인지 악당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락부락한 실전 병기의 형태라는 점도 흥미롭다.
게다가 캉타우는 양산형 기체다. 이 사실은 마징가를 비롯한 그 당시의 모든 주인공 로봇이 단 한대만 존재하는 커스텀 타입이었음을 감안해 볼때 대단히 진보적인 설정이었음을 부인하기 힘들다. 100대가 생산되어 그 중 99대가 파괴당하고 살아남은 단 1대의 캉타우가 수백만년의 세월을 기다린 끝에 378대의 적군 로봇을 격파하는 그 순간의 카타르시스는 [철인 캉타우]를 직접 읽어보지 않고서는 경험할 수 없다.
더군다나 메인 로봇의 에너지 부족에 대해 끊임없이 위기감을 조성하는 것도 본 작품의 특징이다. 이는 마치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 언빌리컬 케이블이 끊어지면 에바의 기동에 5분의 시간 제한이 걸리는 것과 비슷하다 하겠는데, 단순히 로봇을 치고받는 도구로서 그리기에 바빴던 당시 상황을 생각할때 굉장히 진보적이면서도 입체적인 구성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철인 캉타우]는 시대를 앞서나갔던 걸작 로봇만화였다. 개연성이 분명한 스토리의 구성이나 역동적인 액션의 연출 방식, 캐릭터 디자인의 출중함 등 [철인 캉타우]야말로 한국 로봇만화에 있어서 기념비적인 작품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그만큼 [철인 캉타우]는 작가로서 혼신의 힘을 쏟아부은 작품이었으며 그가 구축한 한국식 로봇 만화의 정수를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동안 사람들의 기억 한켠으로 밀려나 있던 [철인 캉타우]는 2000년대에 들면서 추억 찾기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조명을 받아 2001년에 복간판이 발매되었고 2007년에는 유경원, 조민철 작가가 월간 웁스를 통해 [철인 캉타우 리턴]을 연재했으나 잡지 폐간으로 인한 연재 중단으로 단행본조차 출간되지 못했다. 또한 2011년에는 웹툰 형식의 리메이크작 [철인 캉타우 시그마]가 야심차게 기획되었지만 메인 포털인 다음과 네이버의 연재 거절로 인해 비주류인 파란닷컴을 통해 연재되다가 결국 파란의 서비스 종료로 영영 끝을 맺지 못했다.
아직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지도 못했고, 두 차례의 리메이크 시도는 미완성으로 끝났으며 그나마 발간된 복간본도 절판되어 일반인들은 구하기가 어려운 것이 [철인 캉타우]의 현 주소다. 대중들과 가까울수록 문화 상품으로서의 가치는 높아치는 법이다. 그러나 [철인 캉타우]는 그 놀라운 잠재력과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아직 멀게만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언제까지 우리는 문화적 자긍심을 아련한 기억 속에서만 찾아야 하는 것일까.
P.S:
1.현재 [철인 캉타우] 복간판은 안드로이드 앱으로 유료 구매해 볼 수 있다.
2.이정문 화백은 작년에 30여년을 함께 한 부인과 사별하는 슬픔을 겪었지만 올해 [캉타우] 2부를 계획중이라고 한다. 부디 그 의지가 관철되길 간절히 희망해 본다.
* 이 글은 만화규장각에 기고한 컬럼을 블로그에 맞게 리뉴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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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처음 연재당시에는 '마징카'라는 이름으로 고유명사에 있어서도 일정 선을 지켰다. '마징가'로 이름을 고친건 2001년 복각 당시에 벌어진 일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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