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아카데미 시상식은 영화사의 기념비적인 이력을 남겼습니다. 바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유모 역할을 한 해티 맥다나엘이 흑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받았기 때문이죠. 이전까지 헐리우드는 백인들의 독무대였고 이 사건은 이러한 백인 보수주의의 헐리우드에 아주 작은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후로도 한동안 흑인과 동양인은 주인공에 걸맞는 배역을 맡지 못했죠.
하지만 지금은 세상이 바뀌었습니다. 흑인 배우들 뿐만아니라 동양인 배우들도 헐리우드 영화에서 주연을 맡는 일이 생소하지 않습니다. 자국내에서 인기를 모아 헐리우드로 진출해 성공을 거둔 케이스도 많지요. 대표적인 예로 홍콩의 주윤발이나 이연걸, 일본의 와타나베 켄 같은 배우들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근래에 들어서는 한국 영화배우들의 헐리우드 러쉬가 가속화되고 있습니다. 이제 그동안 헐리우드의 변방으로 인식되어 온 한국 영화인들의 헐리우드 진출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한국 영화인 중에 헐리우드 입성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바로 배우 박중훈이었습니다. 그는 랄프 해매커 감독의 [아메리칸 드래곤]에서 주인공인 마이클 빈과 투톱을 이루는 형사역으로 헐리우드 시장을 노크하게 되었죠. 미국경찰과 한국경찰이 팀을 이루는 버디무비 형식의 [아메리칸 드래곤]은 B급 비디오용 영화 수준으로 국민배우로 불리던 박중훈의 헐리우드 진출작이라고 보기엔 조금 부족한 영화였습니다.
그런 그가 두번째로 도전한 작품이 바로 [찰리의 진실]인데요,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샤레이드]를 리메이크한 이 작품은 마크 왈버그, 팀 로빈스, 탠디 뉴튼 등 헐리우드의 메이저 스타들과 함께 출연한 영화로 [양들의 침묵], [필라델피아]의 조나단 드미 감독이 직접 박중훈을 캐스팅해 화제에 올랐죠. 하지만 헐리우드 A급 배우들에 뒤지지 않는 비중으로 출연했음에도 박중훈의 헐리우드 안착은 영화의 흥행실패와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그 이후로 한동안 한국 영화인들의 헐리우드 진출은 잠잠했습니다만 이 공백을 깬건 2008년 무렵이었습니다. 이병헌이 [시클로]의 트란 안 훙 감독이 만드는 [나는 비와 함께 간다]에 출연했기 때문이죠. 이 영화는 일종의 다국적 프로젝트로서 일본의 최고 스타 기무라 타쿠야와 함께 헐리우드의 유망주 조쉬 하트넷이 함께 출연했습니다. 이병헌은 악역으로 가세해 평소의 이미지와는 다른 연기로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죠. 영화 자체의 난해함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끌어올리지는 못했지만 이병헌은 다음 작품으로 헐리우드에 본격적인 공략을 시도합니다.
바로 스티븐 소머즈 감독의 [지 아이 조]였죠. 이 영화에서 그는 스네이크 아이의 형제이자 라이벌인 일본 닌자 캐릭터, 스톰 섀도우 역으로 캐스팅되었습니다. 미국의 인기 프랜차이즈 만화를 원작으로 한 만큼 많은 기대를 모았던 영화로 그간 한국 배우들이 출연한 영화중에선 가장 규모가 큰 블록버스터급 영화였습니다. 비록 흥행에서는 실패했습니다만 이병헌이 맡는 스톰 섀도우는 큰 인기를 모았고 그 여세를 몰아 [지 아이 조 2]에도 무사히 합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와는 별개로 [레드 2]에서는 브루스 윌리스, 존 말코비치 등 쟁쟁한 일류 배우들과 이름을 나란히 해 등장할 전망입니다. 현재까지는 헐리우드 진출에 가장 성공한 케이스라고 봐야 겠지요.
이병헌과 톱을 다투는 국내 정상급 미남배우 장동건은 [워리어스 웨이]로 헐리우드 시장을 노크했었습니다. 이어령 교수의 아들인 이승무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이 영화는 서부시대로 간 칼잡이의 이야기로 다분히 퓨전영화의 형식을 지는 작품입니다. [샤인]의 제프리 러쉬와 [슈퍼맨 리턴즈]의 케이트 보스워스 등이 출연했는데요, [반지의 제왕]을 제작한 베리 오스본이 제작에 참여했다는 사실로도 기대를 모았지만 국내외의 흥행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전지현의 [블러드: 더 라스트 뱀파이어]는 일본의 동명 애니메이션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그동안 청순한 이미지를 선보여왔던 전지현이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교복차림의 뱀파이어 헌터 사야로 등장하는 것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마니아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모은 원작이긴 하지만 장르 자체가 대중적인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고, 그나마 원작이 지녔던 느와르풍의 분위기도 제대로 살리지 못해 원작의 팬들에게도 외면을 받고 말았지요. 이후 전지현은 미-중 합작인 [설화와 비밀의 부채]에서 휴 잭맨과도 공연합니다만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에는 아직 요원해 보입니다.
얼마전 [리턴 투 베이스]로 돌아온 비(정지훈)은 워쇼스키 형제의 [스피드 레이서]로 헐리우드에 상륙한바 있습니다. 에밀 허쉬, 크리스티나 리치, 존 굿맨, 수잔 서랜든 등 막강한 캐스팅과 더불어 원작인 일본만화도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작품이라 꽤나 유리한 측면이 많았던 영화였지요. 하지만 감독의 키치적인 취향이 지나치게 반영된 탓인지 이 역시 흥행에서는 실패, [매트릭스]의 그 감독이 맞느냐는 소리를 들을만큼 평가도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스피드 레이서]에서 조연으로 출연했던 비는 워쇼스키 형제의 눈도장을 톡톡히 찍어서 그들이 제작에 참여하고 제임스 맥티그가 감독을 맡은 [닌자 어쌔신]에 단독으로 주연을 맡게 됩니다. 다분히 B급 오락물인 이 영화는 흥행여부를 떠나 한국 배우가 맡은 캐릭터의 상품성에 승부를 거는 작품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했던 영화였습니다.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으로 시작해 배우로서의 급성장세를 나타낸 모델 출신의 다니엘 헤니는 교포출신으로 영어에 능통하다는 이점과 이국적인 마스크를 앞세워 헐리우드 입성을 시도했는데, 그 첫 영화가 바로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히어로물 [엑스맨]시리즈의 스핀오프이자 프리퀄격인 [엑스맨 탄생: 울버린]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주인공 울버린에 초점을 맞추어 그의 탄생 배경과 숨겨진 과거사에 대해 다룬 영화로서 울버린 역에는 여전히 휴 잭맨이 등장하고 있으며 다니엘 헤니는 울버린을 추적하는 저격자 에이전트 제로 역으로 캐스팅 되었지요. 비록 출연씬을 짧았습니다만 거의 무명이나 다름없던 그가 메이저 영화에 출연하게 된 사실만으로도 고무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룹 god 출신의 가수 박준형은 [스피드 레이서]에서 단역으로 등장한 바 있는데 연이어 일본의 인기만화를 영화화한 [드래곤볼 에볼루션]에서 야무치 역을 맡으며 단숨에 비중있는 조연으로 발돋움합니다. 연기경력이 짧지만 잘 다져진 근육질 몸매와 카리스마 있는 마스크, 그리고 영어 구사에 전혀 문제가 없는 점 등이 어드밴티지로 작용해 꽤 성공적인 헐리우드 안착을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낳았지만 영화가 워낙 망작이어서인지 더 이상의 필모그래피를 이어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한편 헐리우드 진출을 시도한 영화인들 중에는 배우만 있는건 아닙니다.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들도 연이은 헐리우드행을 택하고 있는데요, 먼저 [놈놈놈], [반칙왕]의 김지운 감독은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컴백작 [라스트 스탠드]를 통해 헐리우드 데뷔를 장식합니다. 다소 작은 규모의 액션물이 될 공산이 큽니다만 포레스트 휘태커나 해리 딘 스탠튼 같은 명배우들도 가세해 평범하지만은 않은 작품이 나올 듯 합니다. 게다가 아놀드 슈왈제네거의 작품이라니 더욱 기대가 되지요. 참고로 다니엘 헤니도 본 작품에 출연한다고 합니다.
[공동경비구역 JSA]의 박찬욱 감독은 [스토커]라는 작품을 준비중입니다. 일찍이 여러 차례 헐리우드의 러브콜을 받은바 있는 그는 ‘석호필’로 알려진 웬트워스 밀러의 시나리오를 가지고 니콜 키드만, 매튜 굿 등의 스타급 배우들과 함께 작업 중입니다. 제작은 얼마전 자살로 생을 마감한 토니 스콧과 리들리 스콧 형제가 맡았습니다. 각본 자체가 헐리우드 내에서도 여러 감독이 탐냈을 정도로 완성도가 높다고 하니 기대가 큽니다.
마지막으로 7년간의 준비를 마치고 준비중인 다국적 프로젝트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의 혼신을 다한 해외시장 진출작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헐리우드 단독 작품은 아닙니다만 크리스 에반스, 제이미 벨, 존 허트 등 헐리우드 유명 배우들이 대거 가세했고, 프랑스 작가의 원작 그래픽 노블을 바탕을 한 만큼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길 듯 합니다. 아마도 이 영화를 통해 봉준호 감독의 국제적인 위상은 더 커지겠지요.
이렇게 해서 한국 영화인들의 헐리우드 진출사를 살펴보았습니다. 보신것처럼 아직까지 헐리우드의 벽은 높은게 사실입니다만 끊잉없이 이어지는 헐리우드 공략을 통해 한국 영화의 발전과 인지도의 상승을 실감케 되지 않습니까? 앞으로도 더 많은 재능있는 한국의 영화인들이 해외로 뻗어나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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