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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르영화의 개척사

페니웨이™ 2012. 7. 14.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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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관객 1000만명 시대를 넘긴 이 시대의 한국영화시장은 확실히 과거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관객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만큼 영화의 스케일이나 표현의 사실성은 헐리우드 영화를 따라 가고 있고 장르적인 범위에 있어서는 일부 작품을 제외하고는 로맨틱 코미디나 스릴러, 신파적인 드라마의 틀을 크게 벗어나려 하지 않지요. 비슷한 장르의 반복으로 인해 동일 장르영화의 완성도는 점점 높아지는 추세이지만 반면 흥행성이 검증되지 않은 마이너 장르물에 대한 도전정신은 점차 자취를 감춰가고 있는 듯 합니다.

오히려 과거의 한국영화는 열악한 환경과 제작 노하우의 부족, 시장의 협소함이라는 열세에도 불구하고 장르적 다변성의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어 왔습니다. 먼저 김기덕 감독의 1967년작 [대괴수 용가리]는 한국 괴수영화의 선구적 위치에 선 작품입니다. 혼다 이시로 감독의 [고지라]에서 영향을 받은 흔적이 역력하긴 하나 이순재, 남정임 등의 호화 캐스팅과 더불어 일본인 전문 스탭을 고용해 특수효과를 보강하려 한 점 등 꽤나 진지하게 시도된 괴수물로 평가되지요. 이후에 시도된 괴수영화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는 점을 생각하면 [대괴수 용가리]의 지닌 상징성은 상당히 크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편 [대괴수 용가리]와 같은 해에 개봉된 강태웅 감독의 [흥부와 놀부]는 스톱모션 기법을 도입한 한국 최초의 클레이메이션이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한국의 전통적인 창극 ‘흥부전’을 기반으로 한 본 작품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 기법을 제대로 이해하는 전문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도 각 캐릭터의 동작 하나 하나, 표정 하나하나가 흡사 오늘날의 작품을 보는 것처럼 우수한 표현력을 보여주고 있지요. 비록 흥행에서 실패한 까닭에 대중들에게 잊혀지긴 했지만 제5회 청룡영화상 비(非)극영화 부분 작품상을 수상했으며 영화사적으로도 대단히 의미있는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외국의 인기 장르를 우리식으로 재해석해 한국영화만의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한 변종 장르영화에서도 특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가령 헐리우드의 서부극을 한국적 정서로 재해석한 만주 웨스턴은 1960년대 말부터 한동안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만희 감독의 1971년작 [쇠사슬을 끊어라]는 만주 웨스턴의 정점에 섰던 작품이죠. 남궁원, 허장강, 장동휘 트리오가 각자의 개성있는 캐릭터를 연기한 본 작품은 세르지오 레오네의 [석양의 무법자]를 모티브로 두어, 한 개의 맥거핀을 두고 동맹과 배신을 거듭하는 세명의 탐욕스런 사나이들의 얘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토바이, 스키, 마차, 자동차 등을 이용한 체이싱 장면들을 선보이며 저예산 영화의 열악함을 장르적 흥미로 극복한 작품입니다.

이두용 감독의 [돌아온 외다리]는 홍콩 무협물의 홍수 속에서 한국식 B급 액션영화의 방향성을 가장 잘 잡아낸 영화입니다. 이른바 ‘태권액션물’로 알려진 이두용-한용철 콤비의 액션영화는 당시 홍콩무협물에서 볼 수 없었던 역동성을 제시하며 관객들의 환호를 받았는데, [돌아온 외다리]의 경우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된 액션장면들은 에너지가 넘쳐 흐르며 특히 철교에서 일당백으로 싸우는 일명 다찌마리 장면은 한국영화사의 기념비적인 명장면으로서 ‘호쾌하다’는 표현이 아깝지 않을 정도에요.

이 같은 한국식 액션 장르의 변용은 먼 훗날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을 통해서도 재현됩니다. 한동안 명맥이 끊겼던 액션장르물의 소외감은 총질이 난무했던 1980년대 홍콩 느와르가 붐을 이루었을때 더 절실히 느껴졌는데, 때마침 우리 나라의 정서에 맞는 다찌마리 액션을 새련된 기법으로 부활시킨 작품이 바로 [장군의 아들]이었습니다. 총 3부작으로 완성된 [장군의 아들]은 신인급 배우들을 대거 캐스팅했지만 다소 비현실적인 홍콩의 총기액션물에 비해 더 현실감을 주었던 한국적인 ‘주먹액션’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켜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둡니다.

한국 장르영화의 취약점 중 하나인 SF영화에 있어서는 역시나 김청기 감독이 독보적이었습니다. [로보트 태권브이]라는 애니메이션으로 한국 창작 애니메이션의 최전방에서 홀로 고투했던 그는 애니메이션의 쇠퇴기와 동시에 실사합성 애니메이션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통해 한국적인 SF물을 고안해내기에 이릅니다. 1986년작 [외계에서 온 우뢰매]는 당시 인기정상을 달리던 코미디언 심형래를 전격 캐스팅해 슈퍼히어로 컨셉과 로봇물의 개념을 결합시킨 흥미로운 작품으로 순수 셀 애니메이션의 시장성에 한계를 느낀 한국 아동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지요.

[외계에서 온 우뢰매]가 인기를 끌 무렵 이현세 화백의 베스트셀러 만화를 각색한 한 편의 영화가 한국 스포츠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바로 [이장호의 외인구단]이라는 작품입니다. 오혜성과 백두산을 비롯한 야구선수들이 야구감독 손병호의 제의를 받아들여 훈련을 받는 과정과 프로야구에서의 연승행진, 그리고 마동탁과 오혜성의 대결구도 및 비극적 결말로의 이행이 대부분 원작과 유사하게 묘사된 이 작품은 부족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28만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성공, 속편과 더불어 [지옥의 링], [신의 아들] 등 일련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스포츠 장르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한국의 소외된 장르영화 변천사를 살펴 보면 검증된 수익보다는 과감한 도전과 개척 정신이 원동력이 되어 긍정적인 결과를 낳은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수익의 차원을 넘어 한국 영화계를 살찌우고, 관객들에게는 보다 풍부한 장르적 재미를 안겨줄 수 있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질 때 그 나라의 영화산업은 발전한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겠지요. 지금 이 순간에도 소외된 장르영화에 매진하고 있을 영화인들의 노고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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