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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열전(古典列傳) No.24

 

 

 

 

 

얼마전에 개봉한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정말 오랜만에 클래식한 스파이물의 정취를 맛보게 해주었습니다. 냉전종식 이후 스파이영화는 점점 비주류 장르로 퇴보되어갔고, 그나마 이 분야의 대장격인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는 어느 순간에서인가 정통 첩보극이 아닌 액션 블록버스터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가 맘에 들었던 건 제임스 본드로 대표되는 미화된 스파이 액션물이 아니라, 실제 첩보원들의 삶을 그대로 담아낸 듯한 리얼리티가 있었다는 것이었죠.

사실 어느 나라 첩보원이 매일 미녀들과 데이트를 즐기고 애스턴 마틴을 타고 다니며 턱시도 차림으로 카지노를 들락날락 거린단 말입니까. 다 판타지죠. 실제로 이런 007식 컨벤션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관객들도 꽤 있었는데요, 007의 프로듀서 해리 솔츠먼은 이러한 관객들의 목소리를 충족시키기 위해 007 시리즈의 스탭인 음악가 존 베리와 편집감독 피터 R. 헌트를 데리고 또 하나의 첩보 시리즈물을 기획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해리 파머 Harry Palmer’ 시리즈의 첫번째 작품 [국제 첩보국 The Ipcress File]입니다.

이 작품은 원래 군역사가이자 요리책 저술가, 그리고 소설가라는 특이한 이력을 가진 렌 데이튼의 원작소설에 바탕을 둔 것인데, 007 시리즈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면 해리 파머는 제임스 본드와는 달리 직업 스파이로서의 리얼리티가 물씬 풍기는 캐릭터라는 겁니다. 그는 제임스 본드처럼 미끈한 외모가 아니라 두꺼운 뿔테안경을 쓸 정도로 지독한 근시이며, 싸움에도 능하지 못하고, 상관에게 월급투정을 해야 할 만큼 금전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합니다. 게다가 다잡은 용의자를 놓치거나 함정에 빠져 감금당하는 등 실수를 연발하는 불완전한 스파이죠.

 

ⓒ Rank Organisation, The, Lowndes Productions Limited, Steven S.A.. All rights reserved.

[국제 첩보국]은 원작자 렌 데이튼의 철저한 감수를 받은 작품이다. 영화 속 한장면에서 해리 파머는 동료 여직원에게 음식을 만들어주는데, 이 장면에 등장하는 요리는 데이튼이 쓴 요리책의 레시피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국제 첩보국]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약간의 스포일러 있습니다)

저명한 과학자 레드클리프를 경호하는 영국 국방부 요원이 살해당하고, 과학자가 납치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국방부의 로스 대령은 이 사건의 조사를 위해 감시업무에 종사하던 해리 파머를 호출해 현장투입을 지시합니다.

새로운 부서에서 새 상관과 일하게 된 해리는 실수를 거듭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실마리로 Ipcress라고 쓰여있는 녹음테잎을 발견해 이를 토대로 사건의 진실에 접근해 가지요. 우여곡절끝에 과학자를 되찾는데 성공하지만 멀쩡해 보이던 과학자는 중요한 발표석상에서 그만 정신장애를 일으키고 맙니다. 과연 Ipcress란 무엇이며 과학자를 납치한 조직은 어떤 방법으로 과학자의 입을 막게 된 것일까. 사건이 미궁에 빠질 무렵 해리가 납치되어 감금되고 맙니다.

 

ⓒ Rank Organisation, The, Lowndes Productions Limited, Steven S.A.. All rights reserved.

 

[국제 첩보국]은 굉장히 지적이며 고급스런 풍미를 지닌 작품입니다. 007 시리즈처럼 볼거리나 오락적 요소는 보기 드물고 현장을 뛰어 다니며 사건을 풀어나가는 해리의 현장업무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요. 서스펜스의 농도는 말할 것도 없고 반전의 묘미도 탁월합니다. 무엇보다 해리 파머 역의 마이클 케인은 원조 007인 숀 코네리를 능가할만큼의 매력적인 스파이상을 구축하는데 성공합니다.

또한 [국제 첩보국]은 영국의 영화전문채널 필름4에서 선정한 ‘죽기전에 봐야 할 영화 50편’, 영국영화연구소 BFI에서 선정한 ‘20세기 훌륭한 영국영화 베스트 100’에 뽑히는 등 오늘날까지 엄청난 호평을 받음과 동시에 [베를린 스파이 Funeral in Berlin], [10억불의 스파이작전 Billion Dollar Brain]으로 이어지는 ‘해리 파머 트릴로지’를 완성하게 됩니다. 1980년대 이후 과도한 다작활동으로 급격한 슬럼프를 겪었던 마이클 케인은 1995년에 [베이징 익스프레스 Bullet To Beijing]을 통해 다시금 해리 파머로 컴백해 이듬해 [미드나잇 인 세인트 피터스버그 Midnight In St. Petersburg]까지 총 5편의 해리 파머 영화를 찍었을 정도로 그의 대표적인 캐릭터로 자리잡게 되었지요. 

 

ⓒ Rank Organisation, The, Lowndes Productions Limited, Steven S.A.. All rights reserved.

한편 감독인 시드니 J. 퓨리는 불과 32세때 이 걸작 첩보물을 연출했는데, 그가 촬영 첫날 보여준 일화는 꽤 유명합니다. 퓨리는 촬영 첫날 대본을 바닥에 붙여놓고 불을 붙입니다. 그리고는 ‘내가 생각하는 각본이란 이런 거요’라고 선언합니다. 이 사건은 영화대본이 배우들의 창의력을 제한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는 감독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었고 실제로 [국제 첩보극]은 감독이 큰 윤곽을 던지고 배우들이 즉흥적으로 그 장면을 채워나가는 식으로 촬영이 진행되었다고 하지요.

안타깝게도 시드니 J. 퓨리는 [국제 첩보국]만큼의 걸작을 또 다시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말론 브란도나 로버트 레드포드 같은 걸출한 스타들과 몇몇 작품을 만들긴 했지만 그리 큰 호평을 받지 못했고 결국에는 [아이언 이글], [슈퍼맨 4] 같은 그저 그런 오락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우게 되지요.

사실 국내에는 007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못하지만 첩보물 패러디인 [오스틴 파워]에서 마이크 마이어스의 안경 낀 그 모습이 누굴 오마주했는지는 굳이 말 안해도 알겁니다. 급기야 [오스틴 파워 3: 골드 멤버]에서 주인공의 아버지로 마이클 케인이 등장했을 때 왜 그렇게 빵터질 수 밖에 없는지는 이 영화를 보신 분들만이 알 수 있는 특권이라 하겠습니다.

P.S:

1.원작에서의 주인공은 사실 이름이 없습니다. 잠시 편의를 위해 해리라는 가명을 쓰긴 했지만 본명은 밝히지 않죠. 

2.원조 ‘제임스 본드’인 숀 코네리와 ‘해리 파머’ 마이클 케인이 함께 만난 [왕이 되려 한 사나이]는 그런 면에서 꽤 흥미로운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서 열손가락 안에 꼽습니다.

3.해리의 감금씬은 어딘지 모르게 [올드 보이]의 그것을 연상시키더군요.

4.다소 영국식 유머가 곁들어진 [국제 첩보국]과는 달리 속편인 [베를린 스파이]는 꽤나 하드보일드한 스타일이 가미되었습니다. 언제 기회되면 속편열전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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