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편열전(續篇列傳) No.22
1980년대 말엽 홍콩영화계는 오우삼, 주윤발로 대표되는 홍콩 느와르가 폭발적인 성장을 거듭하면서 수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하며 한국에서 바바리코트와 성냥으로 상징되는 훗가시 문화를 전파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신 영웅주의의 발로는 실은 과거 무협영화의 현대적 리모델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들은 검을 쓰는 대신 쌍권총을 쓰지만 그 이면에 있는 캐릭터의 구축은 강호의 의리를 부르짖는 무협물과 크게 다를바가 없었지요.
그래서일까요. 1990년대 초반 홍콩 느와르의 쇠퇴와 함께 찾아온 한 편의 영화는 홍콩영화의 흐름을 다시금 원점으로 되돌려 놓습니다. 전영공작실을 통해 전통 무협영화의 부활과 SFX 테크놀로지의 결합을 시도해왔던 서극의 [황비홍]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죠. [소림사] 이후 반짝 뜨다가 사라진 한물간 배우라고 인식되던 무술스타 이연걸의 화려한 재기를 알린 이 작품은 왕우, 이소룡, 성룡의 계보로 이어져 오던 무술영화에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자취를 남기게 됩니다.
ⓒ Golden Harvest Company, Film Workshop. All rights reserved.
사실 실존인물인 황비홍을 다룬 영화는 꽤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갑니다. 1940년대에 청 말기의 민간영웅담을 영화화한 황비홍 시리즈가 처음으로 제작됨으로써 무협영화가 이후 하나의 장르로 형성됩니다. 이후 90여편에 이르는 황비홍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정창화 감독의 [황비]나 너무나도 유명한 원화평 감독의 [취권]과 [인자무적] 등은 모두 황비홍을 등장시킨 무술영화였지만 정작 영화팬들에게 황비홍을 각인시킨건 바로 서극의 작품이었지요. 그간 소년의 모습으로 기억되던 이연걸이 보여준 사부로서의 품위있는 이미지와 카리스마는 기존의 성룡이나 관덕흥, 유가휘 등의 선배들이 연기한 그것과는 매우 차별적인 것이었습니다.
특히나 [황비홍]이 보여준 신무협영화의 경향은 기성 무협영화의 원형에 홍콩느와르로 채득된 시각적 우아함의 장점을 극대화 시킨 것이라 하겠는데, 어떤 이는 와이어 액션으로 퇴색된 서극식 무협영화의 등장에 인상을 찌부리기도 했지만 결국 [황비홍]의 성공은 서극이 그간 꿈꿔왔던 퓨전 무협물의 결정체인 [동방불패]라는 걸작의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한편 [황비홍]의 수입사는 57만 달러라는 헐값에 영화를 들여왔다가 예상치 못하게 영화가 대박이 나는 바람에 속편인 [황비홍 2]를 수입하는 과정에서 업자간의 경쟁이 과열되어 수입사 중 하나인 대종필름에서 전작의 3배에 해당하는 150만 달러까지 가격을 부르자 사회적 지탄을 받게 되었고, 여론을 의식한 문화부에서는 이례적으로 ‘수입업자들의 과다경쟁을 막는다’는 차원에서 수입추천을 불허하는 초유의 상황으로 치닫습니다.
한겨례신문 1993.1.9. ⓒ 한겨례. All rights reserved.
영화팬들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황비홍 2]를 마냥 기다려야 했고, 결국 이듬해 우진필름에서 수입한 [황비홍 3]가 먼저 개봉되는 황당한 사태가 벌어지고 맙니다. [황비홍 2]의 수입불허로 인해 발을 동동 구르던 대종필름은 이 같은 조치에 발끈해 문화부를 상대로 소송을 재기하였지만 결국 뒤늦은 개봉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되었지요.
이렇듯 국내에서도 많은 사연을 가진 [황비홍 2]는 이연걸이 출연한 이른바 [황비홍] 3부작 중에서도 가장 높은 완성도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그 이유는 다소 중화주의의 매너리즘에 빠진 1,3편과는 달리 유독 2편에서만 자국역사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엿볼 수 있으며, 액션의 강도에 있어서도 가장 화끈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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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전작과는 달리 이 작품에서는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적, 즉 백련교를 등장시켜 썩어빠진 중국정부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를 높힙니다. 특히 백련교도와 황비홍의 대결을 담은 이 작품의 백미는 무엇보다 백련교도를 일당백으로 제압한 뒤 뒤이어 벌어지는 견자단과의 1:1 듀얼씬인데, 훗날 [영웅]에서 다시 만나긴 합니다만 전성기때의 기량을 선보인 이 두 고수의 대결장면은 홍콩영화사상 기념비적인 명장면으로 남게 됩니다. 라이벌 관계를 의식한 두 사람의 출연은 실제 촬영장에서도 팽팽한 긴장감을 감돌게 했다는 후문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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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전작에 등장했던 주요 배우들–장학우, 원표, 정칙사-이 이번엔 전부 빠졌는데, 오히려 원표대신 아관 역으로 합류한 막소총의 경우 황비홍의 제자로 어설픈 무술을 구사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는 기존의 원표라는 배우가 가지고 있던 무술고수의 이미지보다 훨씬 더 아관이란 인물의 원형에 더 가까운 캐스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이연걸과 너무나도 좋은 앙상블을 보여주었던 관지림은 여전히 사랑스런 모습이었지요.
하지만 조금 아쉬운 부분도 있습니다. 영화상으로 티가 안나게 최대한 트릭을 쓰긴 했지만 실은 이연걸이 아닌 대역이 등장한 액션씬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작에서도 이연걸은 웅흔흔이라는 배우가 발차기 장면의 대역을 맡은 바 있는데, 그 때 실력을 인정받아 [황비홍 2]에서 비중이 높은 악역으로 캐스팅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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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이연걸이 골든 하베스트와의 계약문제로 촬영을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촬영기일의 압박으로 인해 서극은 울며 겨자먹기로 웅흔흔을 다시 한번 이연걸의 대역으로 이용하기로 합니다. 때문에 일부 장면에서는 웅흔흔 혼자 자신과 이연걸 모두의 역할을 해야 했는데, 말하자면 웅흔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하는 촌극이 벌어지게 된 겁니다. 편집신공과 앵글의 조작으로 교묘히 감추긴 했습니다만 역시나 티가 안날 순 없는 것이지요.
[황비홍 2]는 시리즈 중 유일하게 주제곡을 성룡이 부른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사실 귀에 익은 주제가 ‘남아당자강’은 원래 [황비홍]의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이 아니라 작자를 알 수 없는 전통음악 ‘장군령’에 가사를 붙인 음악으로서 고전 홍콩영화들을 보면 종종 흘러나오는 멜로디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황비홍] 이후에는 [황비홍]의 전용 사운드트랙처럼 각인되어버렸지만요.
비록 한국에서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홍콩에서는 엄청난 흥행에 힘입어 [황비홍 3]가 제작되었고, 서극과 이연걸의 환상적인 호흡을 자랑했던 [황비홍] 트릴로지가 완성됩니다. 이후 불화를 일으킨 두사람이 갈라서고 황비홍의 타이틀롤은 [방세옥]에서 이연걸과 대결을 벌였던 조문탁에게 넘어가고, 이연걸은 [황비홍 철계투오공]이라는 짝퉁 황비홍 영화에 출연하는 등 서서히 시리즈의 몰락이 시작됩니다만, 지금까지도 [황비홍 2]는 전작을 능가하는 속편으로서 무협영화팬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P.S: [황비홍 2]의 수입이 늦어지자 이 작품에 대한 궁금증이 켜져만 갔습니다. 한 영화 잡지에서는 이러한 갈증(?)을 조금이라고 해결하고자 [황비홍 2]에 대한 내용을 기사로 내보낸 적이 있지요. 해당 기사에서는 오프닝씬을 서술하면서 "전편에서 엄진동과의 대결을 회상하면서 영화는 시작된다"는 식의 내용을 써 놨습니다. 근데 막상 수입된 [황비홍 2]에는 그런 장면 개뿔도 없었습니다. -_-;;; 백련교 교주의 쇼잉이 오프닝에 등장하거든요.
그럼 이게 기자의 상상력이었는가? 많은 의문 속에 진실은 나중에야 밝혀집니다. 당시 홍콩영화의 판본은 인터네셔널판, 홍콩판, 대만판, 중국판, 일본판 등 상당히 많은 수의 판본이 있었습니다. 과거 한국에서는 지방상영 프린트와 개봉관 프린트가 차이나는 경우가 많았었는데, 딱 그런 식이었지요. 이 기사에 사용된 건 어떤 프린트였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존재하는' 장면이었던 겁니다! 기자님, 의심해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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