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편열전(續篇列傳) No.20
거대괴수물의 효시라고 할 수 있는 1933년작 [킹콩]은 무수한 컨버전을 통해 다양한 작품들에서 등장합니다. 사실상 '미녀와 야수' 이야기의 헐리우드식 컨버전인 [킹콩]은 다른 유사 괴수물과는 달리 여인을 지키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는 거대한 유인원의 모습을 부각시키며 비교적 동정적인 시각으로 괴수를 묘사하고 있지요. 내러티브도 매력적이지만 특수효과에 있어서도 선구자적인 위치에 있는 작품으로서 킹콩과 T렉스가 격돌하는 장면을 연출한 윌리스 오브라이언의 스톱모션은 기술적으로도 거의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 RKO Radio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메리안 C. 쿠퍼와 함께 전편의 공동감독을 맡았던 어니스트 B. 쇼드색은 [킹콩(1933)]의 대성공에 힘입어 같은해 속편 [킹콩의 아들]을 내놓게 됩니다만 흥행과는 별개로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는 못합니다. 아류작이 범람하기 전에 터트려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제작기간이 워낙 촉박했고, 어디까지나 전작의 후광에 전적으로 의존한 탓에 '해골섬에서 만나게 된 킹콩의 아들'이라는 소재만으로는 명백한 한계가 있었지요. 이후 킹콩은 먼나라 일본으로 가서 고지라, 로봇 킹콩과 싸운다거나 [킹콩의 대역습]같은 한국산 킹콩으로 리메이크 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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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킹콩]의 오리지널 계보로 분류할 수 있는 작품은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서두에 언급한 1세대 원조인 [킹콩(1933)]과 2세대인 1976년 존 길러민 감독의 리메이크작, 그리고 3세대에 해당하는 피터 잭슨의 [킹콩 (2005)]입니다. 아마 1990년대 이후의 세대라면 피터 잭슨의 [킹콩(2005)]이 익숙하겠지만 저와 비슷한, 그리고 그 이전 세대의 분들이라면 1976년작이 더 깊이 뇌리에 남아있으리라 봅니다. 오리지널인 1933년작은 국내에 정식으로 들어오지 못한 관계로 [킹콩(1976)]이 리메이크인지조차 모르는 분들이 많았으니까요.
"나에게 있어 오리지널 [킹콩(1933)]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라는 존 길러민의 발언에서도 느껴지듯 [킹콩(1976)]은 당시 미국 영화계에서 상당한 관심을 모은 작품이었습니다. 원작이 워낙 레전드급의 명성을 지녔기 때문에 판권을 둘러싼 파라마운트와 유니버셜간의 경쟁에서부터 캐스팅 과정, 그리고 킹콩을 실물크기로 재현할 것이라는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의 립서비스에 이르기까지 매시간 화제의 중심에 올랐었지요. (카를로 람발디가 제작한 실물크기의 킹콩로봇은 실제로 제작되었지만 막상 영화상에서 선보였던건 릭 베이커의 킹콩 슈트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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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1976)]은 제작비의 3배 이상을 거둬들이며 흥행에 성공했지만 리메이크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원작의 아우라를 뛰어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오리지널이 지녔던 박진감 넘치는 액션이나 서스펜스의 밀도가 떨어졌다는 비판과 함께 이 영화로 데뷔한 제시카 랭은 '소리만 꽥꽥지르는 멍청한 금발미녀'라는 혹평으로 데뷔작을 장식해야 했지요. 물론 슈트메이션 기법을 사용해 보다 유연해진 킹콩의 몸동작이나 원작보다 드라마적인 요소를 강화해 여주인공 대런과 킹콩과의 에로틱한 긴장감 및 킹콩의 죽음에 대한 관객들의 감정이입을 끌어올린 점 등은 높은 점수를 줄만합니다. 저 역시 킹콩의 심장뛰는 소리와 함께 막을 내리는 엔딩을 보면서 꽤나 마음이 짠했던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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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죠스가 죽었을때 울지 않았다." 제작자 디노 드 로렌티스는 [킹콩(1976)]의 개봉을 앞두고 흥분된 목소리로 자신의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원숭이가 죽을때는 사람들이 울음을 터트릴 것이다. 지식인들도 킹콩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심지어 오리지널 [킹콩]을 사랑했던 팬들도 우리 작품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실제로 존 길러민의 [킹콩(1976)]이 오리지널에 비해 호평을 이끌어낸 작품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킹콩의 인간적인 감수성을 이끌어 내는데는 어느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존 길러민이 원작을 나름내로 재해석하려 했다는 의미이며, 이는 오리지널에 대한 애착과 오마주로 가득했던 피터 잭슨의 작품과도 다른 지향점을 지닌 것이었다. 존 길러민은 원작처럼 1930년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아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배경으로 영화를 바꿔놓았다.
여튼 [킹콩(1976)] 리메이크는 디노 디 로렌티스에게 있어 흥행성 높은 프렌차이즈라는 확신을 주게 되었고, 그는 10년을 주기로 [킹콩]의 속편을 만들것을 계획합니다. 속편에서 특히 신경을 쓴 부분은 바로 킹콩의 재현이었는데요, 이번 작품에 등장하는 킹콩은 총 3마리, 파이버 글래스와 라텍스(당시로서는 하이테크 소재라고 호들갑을 떨었던...), 그리고 말의 꼬리털을 사용한 킹콩의 제작기간은 무려 7개월이 소요되었습니다. 또한 존 길러민 감독과 크리쳐 제작자 카를로 람발디, 음악의 존 베리 등 전작의 메인 스탭이 거의 그대로 돌아와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되지요.
[킹콩 2]의 제작비에 대한 기록은 분명치가 않다. [킹콩 2]의 국내 홍보사에 따르면 전작의 2배에 해당하는 5천만 달러의 제작비가 소요되었다고 구라를 쳤는데, 사실상 5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넘긴 건 이보다 3년 뒤인 1989년 제임스 카메론의 [어비스]가 사상 최고의 제작비를 갱신하면서 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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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DB에서는 이보다 훨씬 적은 액수인 1천만 달러로 기재되어 있으며, 월간 'SPY'지 1989년 8월호에서는 [킹콩 2]의 제작비가 2100만 달러라고 주장한다. 제작비에 얼마가 들어갔든지 [킹콩 2]의 북미흥행수익은 고작 4백만 달러 선에 불과했다.
[킹콩 2]는 전편에서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추락한 킹콩이 혼수상태에 빠져있다가 수혈을 위해 보르네오섬에서 공수한 암컷 레이디콩의 피를 받아 인공심장을 달고 부활한다는 내용으로 시작됩니다. 건강을 되찾은 킹콩은 레이디콩과의 알콩달콩한 연애를 즐기며 2세인 베이비콩까지 얻게 되지만 결국 탐욕스런 인간들과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벌이다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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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물로서는 이례적으로 괴수의 로맨스를 다뤘다는 점에서 다소 의외성을 보여줍니다만 [킹콩 2]의 내러티브는 생각처럼 그리 튼튼하지가 않습니다. 영화는 킹콩과 레이디콩이 벌이는 사랑의 도피행각을 중심으로 킹콩의 가족애라는 테마를 부각시키는 한편, 인간커플인 힝크와 미첼의 멜로라인을 병행해 보여주는데, 연출의 스타일이 1970년대 수준에 머무르고 있어서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입니다. 사실 존 길러민은 1970년대 [킹콩(1976)]을 비롯해 [타워링], [나일 살인사건] 등 굵직한 흥행작들을 만들며 거장의 반열에 오를뻔한 인물이지만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급격한 쇠락과 함께 [킹콩 2]를 끝으로 메이저 영화계에서 퇴출당하게 됩니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대표적인 감독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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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킹콩]에 관여하게 된 것에 대해 아주 좋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건 전설적인 작품이니까요. 이것이 전설이 되지 않을리가 없습니다. 실패하든지 않든지 이건 여전히 [킹콩] 영화잖아요." 영화의 개봉직전 'Starlog'와의 인터뷰에서 린다 해밀턴은 자신이 [킹콩 2]의 히로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이미 [터미네이터]로 스타덤에 오른 그녀는 [킹콩 2]를 통해 다시한번 박스오피스 정상에 도전했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이 작품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설'이 되었다. 과연 지금도 린다 해밀턴은 이 영화를 좋게 생각하고 있을까?
오리지널 [킹콩]에서 이어저 내려온 '미녀와 야수'의 플롯 자체를 탈피한 점은 [킹콩 2]가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독창적인 작품이라는 사실을 의미하지만 안타깝게도 너무나 진부한 플롯, 그리고 10년전에서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특수효과의 조악함으로 인해 팬들에게 외면당하고 말지요. 당해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는 이 작품을 최악의 특수효과 부문에 노미네이트 시킵니다. 라즈베리의 설립자 존 윌슨이 내놓은 공식 가이드북 'THE OFFICIAL RAZZIE® MOVIE GUIDE'에서도 최악의 영화 100선 가운데 포함되었지요.
결국 10년만의 야심찬 속편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실패작으로 기록되었고, 10년마다 한편씩 속편을 내놓겠다는 드 로렌티스의 야심도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아마도 [킹콩 2]가 성공했더라면 1996년에는 베이비콩이 어른이 된 모습을 볼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뭐 어쨌거나 이렇게 끝난 [킹콩]의 역사는 2005년 피터 잭슨의 [킹콩(2005)]으로 부활하게 되었고, 다시금 오리지널 [킹콩]의 향수로 돌아가주었으니 그나마 다행이랄까요. 피터 잭슨이 속편을 내놓는 우를 범할리는 없겠습니다만 문제는 이런 주옥같은 작품이 나온다는 거 아니겠습니까?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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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1.국내에서도 북미지역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개봉되었습니다만 [아웃 오브 아프리카], [에이리언 2], 성룡의 [용형호제], [미션] 등의 대작들과 경쟁하는 통에 고작 12만명 정도의 관객에 그칩니다. 문제는 전편보다 조금 수위가 높아진 잔혹성 때문에 킹콩과 전차부대의 전투씬이 뭉탱이로 잘려나갔다는데 있었지요. 나름 심의기준을 맞추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고 생각되는데 결과는 뭐... 그나저나 이 당시 극장가는 정말 치열한 경쟁을 벌였었군요. 이 중 최고의 승자는 [미션]이었습니다.
2.앤드류 박사 역의 피터 마이클 고츠는 이 영화의 로열티로 '3센트'짜리 수표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수표를 환전하지 않고 [킹콩 2]의 포스터와 함께 스테플처리해서 걸어놓았다고 합니다.
3.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킹콩 2]의 로튼토마토 신선도는 0% 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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