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전시대의 산물인 첩보물이 유효했던건 1980년대까지 였습니다. 굳이 007 제임스 본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60,70년대 절정을 이뤘던 스파이물의 추억은 지금으로선 한물간 퇴물처럼 느껴지지요. 그나마 제이슨 본 시리즈 같은 작품들은 액션의 리얼리티에 초점을 맞춘 새로운 장르형식으로 21세기 첩보물의 트렌드를 형성하긴 했지만 존 르 카레의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경우가 좀 다릅니다. 이건 정말로 클래식한 냉전시대 첩보물이거든요.
실제로도 존 르 카레의 원작은 영국 정보부 MI6 내에서 구 소련의 이중간첩으로 활동했던 킴 필비 사건을 토대로 한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다니엘 크레이그가 나오는 007 영화처럼 외피만 살짝 바꾼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라는 얘기죠. 이 작품은 온전히 구시대의 유산인 셈입니다.
게다가 소설의 퍼즐은 꽤나 복잡합니다. 차라리 제이슨 본처럼 몸으로 떼울만한 캐릭터라도 등장하면 각색이 수월할텐데 존 르 카레의 소설은 진실에 도달하는 여정의 난이도가 무척 높습니다. 따라서 2시간 남짓한 극장 영화로 만들기에는 그리 좋은 소재가 아닙니다. 이미 1979년 영국의 BBC에서 알렉 기네스를 주연으로 기용한 7부작 미니시리즈가 나온 적은 있습니다만 작품의 길이나 시대적인 배경을 봐서라도 이번에 나온 작품은 불리한 점이 더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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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토마스 알프레드손 감독은 제법 묵직한 스파이물을 내놓았습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감독의 전작인 [렛 미 인]처럼 차갑고 건조하지만 섬세합니다. [미션 임파서블]이나 007 무비에서 보여주는 첩보원들의 세계가 판타지라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진짜 스파이의 세계를 보여줍니다. 삶에 찌들고, 때론 지친 한숨을 내쉬는 고독한 스파이들의 모습은 정말로 리얼해 보입니다.
영화는 주로 사건에 연루된 남자들의 내면에 초점을 맞춥니다. 일종의 심리드라마처럼 말이지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액션 활극이나 짜릿한 서스펜스를 기대했다면 대략 낭패입니다. 이 영화는 은퇴한 스파이의 걸음걸이처럼 느릿느릿 진행되며 임팩트가 전혀 없이 사건과 복선들을 나열하고 있어서 자칫 플롯을 따라잡지 못하면 남은 시간이 굉장히 지루해지기 쉽습니다. 소설에 비하자면 영화는 평이하게 풀어낸 셈이지만 그래도 만만찮게 복잡한 편이니까요.
제이슨 본 시리즈에 익숙한 요즘 관객들에게는 이 영화가 맞지 않을 확률이 큽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영화는 고전적인 연출 기법을 보여주는 클래식한 정통 첩보물입니다. 존 르 카레나 프레데릭 포사이스 원작의 수많은 작품들이 영화화 되던 그 시절의 향수가 물씬 풍겨서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만족스러웠지만요.
P.S: 배우들의 연기를 깜박했네요. 뭐…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인공 스마일리역의 게리 올드만은 정말 좋은 연기를 펼칩니다. 최근 [셜록]으로 인기 수직상승 중인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여전히 앤디 가르시아랑 헷갈리는 마크 스트롱의 캐릭터도 좋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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