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5월 5일이면 화형식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그러나 무식함의 극치였던 퍼포먼스 속에 사라진 수많은 한국의 만화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속에 불길이 치밀어 오르지만 그나마 추억의 한켠에 자리잡고 있는 몇몇 만화들이 아직 보존되어 있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그 중에는 걸작의 칭호가 아깝지 않을만한 작품들이 더러 있는데, 박수동 화백의 [번데기 야구단]은 명랑만화의 포맷을 끌어온 야구만화 중 단연 최고의 걸작이라 할 것이다.
이상무의 독고탁 시리즈나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 등 야구만화의 홍수 속에서도 유독 [번데기 야구단]은 해학과 유머, 그리고 감동의 코드로 독보적인 존재감을 행사해 왔다. '이것이 야구다!' 아마 [번데기 야구단]을 탐독했던 애독자라면 이 통쾌한 카타르시스의 명대사를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 박수동. All rights reserved.
2009년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는 대한민국 명작만화 리메이크 사업의 일환으로 첫번째 작품인 [번데기스]를 선보였다. 김경호 작가가 펜을 잡은 [번데기스]는 30년전 동네 야구단의 전설로 남았던 번데기 야구단의 후일담을 담아 많은 올드팬들의 기대를 모았다. 화훼 기능 장식사가 된 1루수 장대, 택시운전수인 3루수 먹물, 초등학교 교사인 2루수 물꽁, 실직자가 되어 노숙을 하고 있는 주장 뻔 등 성인이 된 번데기 야구단원들이 다시 모여 프로로 진출하는 스토리 자체는 분명 신선한 감이 있다. 원작이 학업과 가난한 집안 형편에 시달리는 아이들의 애환을 동시에 담아냈다면, [번데기스]는 성인이 된 아이들의 또다른 현실적 고충을 충실히 반영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번데기스]는 아이디어만 좋았던 실패작이다. 원작의 개성있는 캐릭터들을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평면적인 이야기들, 무의미한 원작의 오마주와 재탕을 거듭하며 네이버 웹툰으로 연재내내 악플에 시달리며 별다른 화제를 이끌어내지 못한 채 종결되고 말았다. 리메이크라는 기획 자체가 어느 정도 원작의 정서를 공유하고 있는 독자층에 한정된다는 특수성을 고려하더라도 [번데기스]는 원작의 촘촘하게 짜여진 에피소드와 정겨운 서민 삶의 현장감을 포착하는 맛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흉내만 내고 있을 뿐이다.
ⓒ 2009 김경호. All rights reserved.
애초에 만화원작의 가치를 높히고 캐릭터 시장의 활성화를 유도한다는 의도로 계획된 명작만화 리메이크 사업의 다른 작품들인 [번개기동대 2009], [로봇빠찌], [진진돌이 에볼루션]도 마찬가지로 구관이 명관이라는 진리를 확신시켜 주며 좋은 반응을 얻는데는 실패했다. 이같은 실패의 원인에 대해 웹툰이라는 매체 자체가 리메이크 작품을 기대하는 독자층과 맞지 않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만화 전문가의 분석도 읽은 적이 있지만 어찌되었건 줄줄이 실패한 리메이크 만화의 사례는 원작의 공감대를 얻는 요소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닐까. 팬의 입장으로 바라는 건 리메이크 보다는 미처 다 복원되지 못한 고전 걸작들의 귀환이 더 절실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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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데기스 - 김경호 지음/보리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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