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요리책 - 엘르 뉴마크 지음, 홍현숙 옮김/레드박스 |
종교라는 이름의 허울아래 온갖 악행이 신의(神意)로 포장되어 자행되던 중세 유럽의 역사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문학장르와 영화속에 좋은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그 중 상당수는 비밀결사나 수수께끼의 고문서 등 다분히 역사의 그림자속에 숨어있던 미스테리로서 다뤄지고 있는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나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천사와 악마] 같은 작품들이 이에 속한다.
이제 소개할 엘르 뉴마크의 [비밀의 요리책] 역시 15세기 베네치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팩션으로서 금서와 종교적 금기, 정치적 이해관계 등이 얽히고 섥힌 중세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린 작품이다. 흥미롭게도 [비밀의 요리책]은 거리의 소매치기에서 견습 요리사로 발탁된 루치아노라는 소년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이 된다는 것인데, 아직 세상 만물의 이치를 채 깨닫지 못한 주인공의 관점에서 어른들의 뒤틀어진 욕망을 묘사한다는 점이 독특하다.
인류의 역사는 언제나 억압과 탄압속에 이루어져 왔다. 그리고 항상 현재의 역사속에서는 억압하는 자가 이긴것처럼 보이지만 결과를 놓고보면 억압을 견디고 진정한 가치와 진리를 수호한 사람들의 승리였듯이, [비밀의 요리책]은 중세시대 종교적 광기에 의해 탄압받고 사라질 운명에 처한 인류의 위대한 지식을 보존하는 요리사의 숙명과 그 후계자의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펼쳐 놓는다.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듯 생생하게 말이다. 작품속에 등장하는 군침도는 요리 장면이나 당장이라도 악취가 날것같은 뒷골목의 음침한 분위기까지, 서술의 디테일은 상당히 훌륭하다.
금을 만들 수 있는 고대의 연금술에서부터 불로장생의 비법이 담겨있다는 '비밀의 책'을 쫓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모습들은 오늘날 '암흑기'로 표현되는 중세시대의 광기에 대한 절묘한 은유다. 오히려 견습수녀 프란체스카와의 사랑을 이루게 해줄 묘약의 제조법이 비밀의 책에 담겨있을거라 믿는 루치아노의 욕망은 그 중에서도 가장 순수하다. 결국 그 순수함을 지닌 루치아노만이 광기의 시대를 현명하게 살아남는 최후의 승자가 되는건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일게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성장소설에 가깝다.
한가지 문제라면 [비밀의 요리책]은 무려 656페이지에 달하는 장편으로서 독자에게는 다소 부담스런 분량의 책이라는 점이다. 물론 작품의 재미로 인해 이러한 부담도 크게 느껴지지는 않지만 막연히 중세 미스테리 소설일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에겐 아쉽게도 딱히 장르를 규정하기에는 모호한 작품의 성격으로 인해 초반부의 전개부분에서 지루함을 느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중반부터 탄력을 받은 듯 스피디하게 전개되는 이야기들은 독자들의 흥미를 붙들기에 충분한 매력을 지녔다. 오히려 급작스럽게 마무리되는 결말이 아쉽게 느껴질 정도다.
P.S: 중세를 배경으로 다루다보니, 가톨릭의 전통적 교리에 대한 부정적 시각도 다뤄지고 있으며 다분히 (이단이라 불렸던) 그노시스 학파의 교리를 긍정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등장하는데 이는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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