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도가니]의 원작소설을 접한지도 벌써 3년이 지났습니다. 처음 이 소설을 접했을때의 찝찝하고도 더러운 느낌은 한동안 계속 되었지요. 별로 좋은 기억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작품이 영화로 나온다면 정말 감상하기 힘들거란 생각을 했었더랬습니다. 글로 접하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만약 이를 화면에서 직접적으로 보고 받게 될 정서적 충격은 몇배나 더할 테니까 말이죠.
영화는 가상도시 무진의 자애학원에 부임하는 한 교사의 이야기에서 시작됩니다. 거액의 후원금 명목으로 뒷돈을 대며 교직을 얻게 되었지만 어딘지 이상한 학교내의 진실을 알게 된 주인공은 인권단체의 간사와 함께 학교내의 거대한 권력에 맞서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만사가 어디 내맘대로 되던가요. 곧 이뤄질 것 처럼 보이던 정의의 실현은 점점 멀어져가고, 이내 좌절의 도가니에 빠져들게 됩니다. 사법당국과 경찰, 심지어 지역 기독교인까지 가세한 막강한 힘의 장벽은 법앞의 평등이라는 진실을 바라는 이들에게 너무나도 높은 것임을 실감케 합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도가니]는 실제 사건에 바탕을 둔 작품입니다. 사실 이 작품이 그토록 씻기 힘든 뒷맛을 남기는 건 상상만으로도 분노할만한 일이 우리가 숨쉬는 이 공간에서 실제로 일어났다는 점에 기인하는 바가 큽니다. 2005년에서야 밝혀진 광주인화학교 사건은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최약자에게 가해진 성폭력 사건이었기에 충격을 던졌지만 피의자 상당수가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는 점에서 더 큰 논란이 되었던 사건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 일은 죄질과 사건의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이슈화되지 못했지요.
ⓒ ㈜삼거리픽쳐스, ㈜판타지오, CJ 엔터테인먼트 All rights reserved.
이제 다시 영화로 돌아갑시다.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영화는 소설의 일정 부분을 각색하고 있습니다. 우선 설정에서 주인공 인호(공유 분)는 일찍 부인을 잃은 애딸린 홀애비로 묘사됩니다. 원작에서 부인과 통화하며 이런저런 갈등을 겪는 모습이 이번 작품에서는 어머니로 그 대상이 바뀌게 됩니다. 아마도 주인공이 몰린 상황을 보다 암울하고 극적인 방향으로 유도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인호의 과거사와 얽힌 트라우마도 영화판에선 삭제됩니다. 불필요한 디테일을 제거하는게 오히려 영화의 중심 줄거리를 부각시키는데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탓이겠지요. 영화가 한 줄기를 따라 심플하게 나가는 모습은 나쁘지 않습니다. 천인공노할 범죄가 저질러 졌고, 이를 덮으려는자와 밝히려는자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집니다. 법정스릴러의 요건에 부합하기엔 긴장도가 떨어지고 관객들의 감정에 너무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만 우리나라 사법제도의 수준을 생각하면 오히려 이런 어설픈 연출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다만 영화의 구석구석에는 정치적인 의도가 조금씩 스며있습니다. 사실 이 사건 자체가 사회를 좀먹고 있는 구조적 부패를 들추는 것이긴 한데, 사건의 당사자 관계(권력을 가진 지도층과 절대 약자의 구도)부터 시작해서 사건이 희석되고 무마되는 과정을 보노라면 뉴스나 신문지상에서 끊임없이 보도되고 있는 사건들과 상당히 유사한 패턴을 띄고 있지요. 영화는 자애학원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실제 말하려는건 이 세상 전부가 무진이라는 가상의 도시와 다를바 없다는 의도로 읽힙니다.
배우들의 연기로 넘어가보죠. 공유의 선택은 사실 좀 의외입니다. 댄디보이의 산뜻한 이미지를 구축했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 상당히 고통스런 캐릭터를 맡았어요. 아마 그가 작품속에서 이런 캐릭터를 소화한건 이번이 처음같은데 상당히 괜찮습니다. 뭐 본인이 군생활당시 원작을 읽고 직접 영화화를 권유했다니 스스로가 많이 애착을 가졌던 캐릭터였고, 또한 그에 따른 분석도 꼼꼼하게 했겠지요.
정유미의 연기는 항상 안정적입니다. 이쁘장하면서도 조금 털털한 이미지가 그녀의 특징인데 이런 자신만의 매력을 그녀는 항상 영리하게 이용할 줄 압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녀는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딱 선을 지키는 연기를 하며 조연의 역할을 충실히 보여주고 있어요. 단, 그녀의 연기력이 뛰어난지에 대해서는 조금 더 지켜본 후에 언급해야 할 것 같군요.
ⓒ ㈜삼거리픽쳐스, ㈜판타지오, CJ 엔터테인먼트 All rights reserved.
무엇보다 아역들의 연기가 좋습니다. 솔직히 영화의 소재가 소재이다보니 아무리 연기라 해도 아이들의 정신적인 트라우마가 염려되긴 하던데, 영화를 막상 보니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듯 합니다. 성폭력의 피해자임과 동시에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장애인을 연기한다는게 쉽지 않았을텐데 정말 똑소리나게 잘 해주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도가니]는 잘만든 영화입니다. 원작의 해석능력도 뛰어나고 연기도 좋고, 무엇보다 관객과 호흡하는 몰입도가 뛰어나지요. 그렇기 때문에 불편함도 큰 것이 사실입니다. 듣는것만으로도 괴로운 범죄현장을 직접 목격한다는 불쾌감과 충격, 그리고 알게 모르게 관객을 지배하는 죄책감이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을 압도합니다. 약자의 시선에서 지극히 현실적일 수 밖에 없는 결론으로 치닫는 영화의 마무리 역시 달갑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추천하고 싶지는 않아요. 아마도 정상적인 사고와 양심, 그리고 정의감을 가진 관객이라면 분노하게 될 테니까 말이지요.
P.S:
1.초반에 술취한 정유미가 시동도 걸지 않은 공유의 차를 들이받고는 되려 수리비 물어내라며 큰 소리를 치지요. 좀 억지스런 설정이다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가해자가 피해자인 냥 징징거리는 영화의 전체적인 내러티브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씬인것 같습니다.
2.범죄장면을 묘사하는 수위는 사실 도를 넘지는 않습니다만 정황이 정황이니만큼 너무도 견디기 힘들더군요.
* 참고 리뷰: 도가니 - 진실을 결코 개에게 던져줄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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