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전에 시골의사 박경철님의 트위터에 이런 글이 올라왔었죠. 어떤 청년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대를 끊겠다'고 한 얘기 말이에요. 이 글은 순식간에 퍼져나가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습니다. 사실 '대를 끊겠다'는 얘기의 의미는 '나는 아이를 가지지 않겠다'는 얘기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를 끊는' 행위의 본질이 구체적으로 언급되는 순간 망각했던 불편한 사실이 새삼 떠오르게 된 겁니다. 실제로 아이를 가지지 않는 부부들이 많아지면서 한국은 세계적으로도 손꼽히는 저출산 국가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건 심각한 문제에요. '가문'과 '핏줄'에 목숨을 걸었던 한국인들의 특성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렇지요.
우리가 지금 이 세상을 살고 있는 건 우리 부모님이 모두가 잘 살고, 부유하고, 넉넉했지 때문만은 아니지 않습니까? 부모님들은 어려운 가운데서도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가족을 부양한다는 책임을 당당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가 지금 숨쉬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 일을 이제 하지 않겠다는 겁니다. 가장 큰 이유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가난의 악순환, 혹은 결코 아름답다고만은 할 수 없는 이 사회의 모습, 이런걸 내 아이에게 넘겨주려니 점점 자신이 없어지는 건 사실입니다. 나 역시도 그게 두렵고 말이죠. 그러나 그게 후손을 위한 일인지, 아니면 단지 나 자신의 안도감을 위해 변명아닌 변명을 하고 있는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영화 [플라워즈]는 참 많은 걸 느끼게 해주는 작품입니다. 영화는 1936년, 갓 스무살을 넘겼을 법한 어린 처녀의 이야기를 흑백톤의 화면으로 시작합니다. 린(아오이 유우 분)은 여학교까지 나온 재원이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시퍼런 서슬에 주눅이 든 채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할 입장입니다. 상대 남자와는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상태죠. 급기야 린은 결혼식 당일 아버지와 심하게 다툰 뒤 집을 뛰쳐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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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이어 영화는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린이 낳은 아이들과 그 손자녀들의 삶을 교차편집으로 담아냅니다. 그들의 삶은 또 다른 고민과 행복을 낳고, 시간은 그렇게 속절없이 흘러가는 것이죠. 이렇게 3대를 아우르는 [플라워즈]의 내러티브는 특출나진 않지만 꽤 울림이 강합니다. 저도 오랜만에 눈가를 촉촉히 적시는 부끄러운 경험을 할 수 있었는데 아마 여성관객들이라면 원없이 감정의 정화를 경험할 수 있을거라 봅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이트용으로는 비추합니다)
서두에서 요즘 사람들의 출산기피에 대해 언급한 이유는 [플라워즈]의 기본적인 전제가 바로 '결혼과 출산'에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3대의 이야기이니 만큼 각 세대별로 조금씩 변화되는 결혼관과 여성의 위치를 엿볼 수 있는데, 사실 어느 시절이나 여성들이 고민하는 지점은 동일한 것 같습니다. 특히 아이를 낳는 면과 관련해서는 영화가 제시하는 관점이 분명하다고 볼 수 있어요. 아이를 낳고 대를 잇는 것은 곧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라는 점이죠. 그렇기에 자신의 삶을 포기하면서까지 아이를 낳으려는 어머니의 모습은 숭고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죽음을 직감하면서도 해맑게 웃는 나카마 유키에의 모습은 압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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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주연이라 할 것 없이 여섯 명의 여성들이 대부분 고만고만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데, 정말 일본영화에서 보기 드문 환상적인 캐스팅입니다. 아오이 유우를 비롯해 히로스에 료코, 타케우치 유코, 나카마 유키에 등 스타급 여배우들이 정말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고쿠센], [트릭]에서 확 깨는 코믹연기로 익숙했던 나카마 유키에의 정극 연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더군요.
영화를 보고 나면 하나 만은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인생은 좋은 가족을 만드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죠. 꽤 늦은 나이까지 결혼을 미루고 있는 내 자신에 대해 조금이나마 반성하는 시간이었네요. 참 아름다운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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