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컨트롤러]는 필립 K. 딕의 원작소설을 영상으로 옮긴 9번째 작품입니다. 스티븐 킹이나 마이클 클라이튼처럼 헐리우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소설가이지만 필립 K. 딕의 작품 중 영화로서 성공한 케이스는 의외로 많지 않습니다. 지금에야 걸작 컬트물의 반열에 올라선 [블레이드 러너]이지만 개봉 당시 대실패작으로 낙인찍혔다는 것을 새삼 강조할 필요는 없을테고, [페이첵]이나 [넥스트] 같은 작품들은 흥행도 실패했지만 완성도마저 형편없는 작품들이 되었지요. 그나마 성공한게 [토탈 리콜]과 [마이너리티 리포트] 정도입니다.
따라서 필립 K. 딕 원작의 영화들은 매번 기대감을 불러일으키기는 하지만 실제 성공한 사례가 드물다는 점에 있어서 많은 부담감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필립 K. 딕 원작의 영화들은 원작소설의 설정만 따왔을뿐 이를 개작한 경우가 대부분이라 감독의 창조적 역량이 어지간히 높지 않다면 영화는 원작을 망쳤다는 평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앞서 언급한 세 편의 성공작들이 그나마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리들리 스콧이나 스티븐 스필버그, 폴 버호벤 같은 자기 색깔이 뚜렷한 감독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거든요.
이번 [컨트롤러]의 개봉소식을 접하면서 (사실 [컨트롤러]의 원제는 'The Adjustment Bureau'죠. 첨엔 뭔 영화인가 하고 한참을 해맸습니다 -_-) 자연스럽게 조지 놀피라는 이름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감독이자 각본가 제작자로서 사실상 [컨트롤러]의 모든 부분을 '컨트롤'하고 있는 이 사람은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은 아닙니다. 실제로도 이번 작품이 첫 연출작이고 이전에는 [본 얼티메이텀], [오션스 트웰브], [센티넬] 같은 작품의 각본에 참여했지만 타점이 썩 좋은 이야기꾼은 아닌 셈입니다. (제 생각엔 여지껏 딕의 원작영화를 만든 감독들 중에서는 가장 인지도가 낮은 인물일거에요)
ⓒ Universal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아마도 대다수에 관객에 있어서 [컨트롤러]에서 주목하는 부분은 '본 시리즈'와 그 밖에 다수의 작품들에서 비교적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맷 데이먼이 등장한다는 사실일겁니다. 맷 데이먼은 다재다능하죠. 조연이면 조연, 주연이면 주연, 장르와 비중을 가리지 않고 자기 몫은 제대로 해내는 몇 안되는 배우입니다. 그가 출연한 영화중에는 오락성있는 작품들도 있지만 과반수는 작품성에 무게를 둔 드라마일텐데 사람의 기억력이란 그리 믿을 만한게 못되는 것이,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자꾸만 그를 보면 액션 히어로인 제이슨 본이 떠오른단 말이죠. 이는 이 영화가 본 시리즈 같은 액션 스릴러일거라는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요인을 제공하기도 합니다.
이제 영화를 좀 살펴봅시다. 의외로 맷 데이먼이 맡은 주인공은 액션영화의 히어로와는 동떨어진 인물입니다. 정치가거든요. 장래가 유망한 상원의원 출마자 데이빗(맷 데이먼 분)은 선거일을 불과 며칠 앞두고 그만 학창시절 한 파티에서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엉덩이를 깠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결국 낙마합니다. 그러나 화장실에서 낙마연설을 연습하던 그의 앞에 신비한 여성(에밀리 블런트 분)이 나타나 둘은 한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통성명도 하지 못한 채 곧바로 헤어지게 됩니다.
영화는 두 남녀가 우연한 만남을 거듭하면서 서로가 운명의 상대임을 직감하는 강렬한 감정에 이끌리는 과정에서 이를 방해하는 초자연적인 기관 '조정국'이 개입하면서 흥미를 더합니다. 조정국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자유의지가 없으며 모든 일은 조정국의 설계대로 개인의 의지와는 달리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따라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죠. 따라서 원래대로라면 이 두 사람은 만나서도, 사랑에 빠져서도 안되는 겁니다. 하지만 데이빗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왜냐구요? 사랑에 빠졌으니까요. 원래 눈에 콩깍지가 쓰이면 아무것도 뵈는게 없는 법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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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트롤러]는 이렇게 사랑을 이루려는 남자와 이를 방해하는 조직과의 대결을 그린 영화입니다. 대부분의 필립 K. 딕 원작영화가 그러하듯 이 작품도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추격전이 등장합니다. 주인공은 어떻게든 여자를 만나기 위해, 그리고 사랑을 이루기 위해 조정국 요원들을 피해 달아나고 요원들은 이를 훼방놓기 위해 뒤쫓는 식이죠.
하지만 영화의 본질은 스릴러가 아니라 멜로입니다. 관객들은 이 점을 분명히 알고 감상에 임해야 해요. 폭력적인 장면이 거의 없고 죽는 사람도 없으며, 심지어 악당도 없습니다. 주인공이 느끼는 공포의 실체는 생명의 위협이 아니라 사랑을 빼앗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애초에 제이슨 본 시리즈 같은 액션 스릴러를 기대했다면 당연히 실망할 확률이 크죠. 다만 영화 자체만을 놓고보면 꽤나 흥미로운 해석이에요. 애당초 필립 K. 딕의 원작에서 이렇게 달달하고 말랑말랑한 멜로 코드를 뽑아낼 수 있는지가 의아해질 정도니까요.
겉포장은 꽤나 진지하고, 뭔가 좀 위협적이기도 하고 서스펜스도 느껴지는데, 내용을 보면 꽤나 흐뭇한 영화입니다. 심지어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도 고작 커플파괴에 써먹기 위해 온갖 훼방을 일삼는 교정국 직원들의 어설픈 실수들을 보노라면 인간적인 훈훈함과 코믹함마저 느껴집니다.
주인공들의 연기도 나쁘지 않습니다. 물론 이제 중년티가 팍팍나는 맷 데이먼은 액션물을 찍기엔 몸이 너무 불어난 것이 아닌가 싶을 만큼 안쓰럽지만 그래도 안정된 연기를 보여주고 있고, 최근 주가가 점점 오르고 있는 에밀리 블런트도 놀라운 무용솜씨를 선보이며 매력적이고 쿨한 히로인 역을 소화했습니다. 왕년의 '조드 장군' 테렌스 스탬프는 추격자 역할을 맡아 여전히 현역배우로서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지요.
아쉬움도 없진 않네요. 비록 남녀간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긴 했어도 굳이 긴장감을 완화시킬 필욘 없는데, 추격전의 묘미가 제대로 살아있지 못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그녀를 되찾기 위해 빗속을 질주하는 추격전은 정말 잘만 만들면 애절함과 안타까움도 묻어나오면서 동시에 아슬아슬한 스릴도 느낄 수 있는 -말하자면 [본 얼티메이텀]의 탕헤르 추격씬 같은- 명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는데, 감독의 한계가 이 지점에서 여실히 드러나더군요. 또한 깊게 들어가면 꽤 많은 사색거리와 담론이 나올 만한 소재임에도 영화가 지나치게 가볍고 클라이막스도 빈약한 느낌을 줍니다.
정리해 보죠. [컨트롤러]가 수작인가라고 묻는다면 글쎄..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잘 만든 데이트 영화입니다. 확실해요. 남자들은 약간 찜찜할지 몰라도, 여자들은 좋아할게 분명합니다. 그만큼 이 작품은 아주 순진하리만큼 사랑의 본질에 대해 이상주의적인 결말을 내놓고 있거든요. 저 또한 이러한 결말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는 꿈꾸는 자들을 위한 것이니까요. 영화마저 너무 현실적이라면 그거야말로 암울하잖아요.
P.S:
1.초월적 존재에 의한 통제, 그것이 디스토피아적인 형태로 표출된다면 알렉스 프로야스의 [다크 시티] 같은 작품이 나오겠지요.
2.2013년에 개봉 예정인 [유빅]이 과연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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