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계에는 캐릭터로 승부하는 작품이 거의 없다. 기껏 생각나는게 강우석 감독의 [공공의 적]에 나오는 강철중 정도랄까? 류승완 감독도 회심의 캐릭터 프랜차이즈인 '다찌마와 리'에 도전했다가 겨우 두 번만에 (메이저 영화로는 단 한방에) 기권하지 않았는가. 울궈먹기에 대한 관객들의 거부감에서인지 아니면 특정 캐릭터를 시리즈화 하는 것에 대한 노하우가 없어서인지는 몰라도 여튼 참 빈약하다.
캐릭터 프렌차이즈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예를 들어보자. 1980년대 근육질 스타로 전성기를 누렸던 실베스터 스탤론. 시대가 바뀌고 노쇠함에 따라 액션스타로서의 입지가 흔들리기 시작한 그는 급기야 [어쌔씬]에서의 주조연관계가 뒤집힌 영화 [스파이키드 3D]에서 안토니오 반데라스에게 혼쭐나는 악당역을 맡는 등 한물 간 배우로서의 끝이 보이는 듯 했다. 그러던 그가 회심의 역전타를 두차례 연속으로 터트리게 되었으니, 바로 [록키 6]와 [람보 4]. 썩어도 준치라도 자신의 옛 시절을 떠올리게 할 록키와 람보만큼 든든한것도 없었을터, 그는 이 상황을 잘 이용해 다시금 노장 액션스타로서의 영광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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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스 윌리스나 아놀드 슈왈제네거도 마찬가지. [다이하드 4]의 존 맥클레인이나 [터미네이터]의 사이보그는 두 사람에게 있어 뗄라야 뗄 수 없는 스크린 속 분신과도 같다. 지금은 탈세로 3년간의 징역형을 살고 있는 웨슬리 스나입스도 B급 영화를 전전하다 그렇게 되었지만 언젠가 그가 다시 메이저로 복귀한다면 그것은 [블레이드 4]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만큼 캐릭터 영화는 매우 효과적이면서도 중요한 전략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심형래 감독은 작품의 완성도는 어떻든간에 캐릭터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다져온 배우다. 아니, 그런 설명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그는 명실공히 한국영화계에서 가장 많은 작품들에서 단일 캐릭터를 맡은 배우다. 일단은 그것만으로도 영구라는 캐릭터와 배우 심형래에 대해 점수를 줄 필요가 있다.
1986년 김주희 감독의 작품 [여로]에서 심형래는 처음으로 '영구'라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코미디가 아닌 정극 장르로 다소 신파조의 스토리를 지닌 이 작품 속의 영구는 바보라기 보다는 정신지체 장애인에 가까운 슬픈 캐릭터로 묘사된다. 많은 사람들은 영구의 시작이 이랬다는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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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흘러 1980년대 후반 KBS 2 TV의 코미디 프로 '유머 1번지' 중에서 '여로'라는 패러디 코너에 심형래는 자신이 연기했던 영구를 다시 등장시킨다. 여기에서는 원작 영화의 무게감을 버리고 오로지 영구를 바보로 희극화하는데 주력하는데 이것이 대성공을 거두면서 심형래는 단숨에 바보 이미지를 가장 잘 구축한 코미디언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리고 그가 다시 스크린에서 '영구' 캐릭터로 등장하게 된 것이 전설적인 감독 남기남 사단의 1989년작 [영구와 땡칠이]다. 뉴코아나 동서울 극장 등 서울지역 2류 상영관에서 개봉한 이 작품은 서울 관객만 64000명이 넘는 기록을 세우며 흥행에서 대성공을 거두며 영구 시리즈의 시작을 알린다. [영구와 땡칠이] 시리즈는 이후 [영구와 땡칠이 2: 소림사 가다], [영구와 땡칠이 3: 영구 람보], [영구와 땡칠이 4: 홍콩할매귀신] 등 총 4편까지 제작되었지만 그밖에 비 정규 시리즈로 제작된 영구 프렌차이즈 영화는 엄청나게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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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와 황금박쥐], [영구와 공룡 쮸쮸], [영구와 흡혈귀 드라큐라], [영구 홀로 집에 1,2], [영구와 우주괴물 불괴리] 등 '영구'라는 이름이 타이틀에 쓰인 작품만도 10여편에 달하며, [심비홍], [가보면 알거야] 같은 작품들에서도 심형래가 연기하는 캐릭터는 여전히 '영구'다. 오죽하면 그가 감독을 데뷔한 이래 자신이 설립한 프로덕션의 이름도 '영구아트무비'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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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가 배우로서의 삶을 접고, [용가리], [디 워]로 본격 장르물 감독에 도전했을 때의 찬반논란은 지금도 생생하다. 아마도 바보 역할로 인기를 얻은 그가 비충무로 출신 감독으로 세계 시장을 공략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이 느꼈던 감정은 그리 편치 않았을 것이다. 물론 작품의 완성도 또한 그러한 논란의 중심에 있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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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가 신작을 내놓을 예정이다. [라스트 갓파더]. 제작 초기부터 말론 브란도의 초상권을 놓고 시끌벅적했던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뒷골이 땡겨오지만 예고편을 보니 오히려 흥미가 급증했다. 영구의 컴백. 그렇다. '띠리리리리리~'하며 바보스런 춤을 추던 그가 영화계의 메카 헐리우드의 나라에 발을 디뎠다. 출연 배우 중에는 로버트 드 니로 이전 마틴 스콜세지의 페르소나로 왕성한 성격파 배우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하비 케이틀도 있다. 엄청나다. 남기남 사단과 김청기 사단의 코흘리게용 영화로 스타가 된 그가 이제는 정말 헐리우드 배우들을 데려다가 한국적 캐릭터 프렌차이즈의 영구 시리즈에 출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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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역할을 맡아 거의 30년이 넘도록 바보 이미지를 구축해 온 심형래 감독에게 있어 영구는 단순한 영화 캐릭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어쩌면 감독으로서의 심형래보다 배우로서의 심형래가 관객들에게는 더 친숙하고 더 대중적인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번 작품에서 그가 감독겸 배우로서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영구를 얼마나 잘 이용했느냐에 따라 영화가 개봉된 이후의 양상도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어린 시절 그의 바보연기를 보고 자란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돌아온 영구의 모습에 그저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그것이 글로벌 무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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