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도 요시후미 감독의 사후, 확고한 후계 체제를 구축하지 못해 애니메이션 명가의 자리가 흔들리기 시작한 스튜디오 지브리의 고민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사실상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한 [게드전기]의 미야자키 고로의 자질 문제만이 아니다. [모노노케 히메]에서의 은퇴선언 후 본의 아니게 현역을 떠날 수 없었던 미야자키 하야오도 점점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지브리식 인어공주를 표방한 [벼랑위의 포뇨]는 모처럼 어린이의 눈높이로 돌아온 지브리표 동화였지만 제작기간 내내 표절문제에 시달린데다 이전같은 임팩트를 주지 못했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호소다 마모루 감독을 놓친건 스튜디오 지브리의 가장 뼈아픈 실수였을 것이다.
이제 더는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스튜디오 지브리는 승부수를 던졌다. [고양이의 보은]의 모리타 히로유키나 [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을 감독한 키타로 코사카 등 지브리 출신의 검증된 인재들을 뒤로 한 채 신인인 요네바야시 히로마사에게 지브리의 사활이 걸린 [마루 밑 아리에티]를 맡긴 건 솔직히 놀랄 만한 사건이다.
[마루 밑 아리에티]는 이미 영화로도 만들어진 바 있는 영국의 아동문학가 메리 노튼의 'The Borrowers'를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마루 밑에 살고 있는 소인국 소녀가 요양차 방문한 소년과 유대감을 갖게 된다는 설정의 본 작품은 몇가지 점에서 기존 지브리 애니메이션과는 차별성을 보인다. 주인공 아리에티가 10Cm의 소인이라는 것 외에는 판타지적인 설정이 전무한 이례적인 작품인데다 스케일도 소박하다. 등장인물간의 갈등요소도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이처럼 [마루 밑 아리에티]의 '튀지 않는' 성격은 그간 역동적이면서도 스케일이 큰 지브리표 애니메이션을 즐겨온 관객들에게 다소 밋밋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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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가족애와 자연친화적인 주제의식은 이번에도 유효하며 진취적 성향의 히로인이 등장하는 것이나 꾸준히 일관성을 유지해 온 지브리 특유의 작화 스타일도 여전하다. 비록 스케일이 크진 않지만 소인의 관점에서 바라본 이야기의 특성 때문에 디테일의 묘미는 한층 강화되었다. 극 초반 아리에티가 아버지와 함께 생활에 쓰일 필수품 몇가지-그래봤자 각설탕 하나와 티슈 한 장 정도-를 '빌리기'위해 마루 위의 인간세계로 침투하는 광경은 흡사 [인디아나 존스]의 모험을 보듯 짜릿하면서도 경이로운 상상력의 발현이다.
물론 [마루 밑 아리에티]의 진정한 매력은 이같은 소소한 감각적 재미가 아니다. 잔잔하지만 작품속에 녹아있는 여러 가지 주제의식은 진지하면서도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데, 멸종의 위기를 마주하면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으려는 아리에티의 가족과 번창하는 인류의 구성원이지만 선천적으로 약한 심장때문에 죽음을 직시하는 소년 쇼우의 절묘한 대비는 오늘날 공존과 자멸의 선택문제에 직면한 인류와 자연을 멋지게 은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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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적인 부분에 있어서 [마루 밑 아리에티]는 도저히 흠잡을 구석이 없다. 정통 셀 애니메이션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화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최첨단 CG가 넘볼 수 없는 아날로그적인 감성을 그대로 전달한다. 지브리의 오랜 동반자 히사이시 조 대신 음악감독으로 새롭게 합류한 프랑스 출신의 세실 코벨이 선보이는 음악은 [마루 밑 아리에티]를 돋보이게 만드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다. 아마도 애니메이션에서 음악적 요소가 이토록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을 듯.
모험적인 요소가 부족한 극의 특성 상 관객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듯 하나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벼랑위의 포뇨]에서 노쇠해가는 미야자키 감독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접해야 했던 팬들이라면 [마루 밑 아리에티]를 통해 이제 막 도약의 날개짓을 시작한 신예 감독의 싱싱한 활력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비록 [마루 밑 아리에티]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손을 완전히 떠나지 못한 (그는 이 작품에서 각본을 맡았다) 작품이지만 그럼에도 후계 체제에 대한 지브리의 불안감을 어느 정도 해소해주는 감성적인 수작이다.
P.S: 아아... 이 작품을 보고나니 인형의 집을 갖고 싶어졌다. 이 나이에 참 주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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