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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열전(古典列傳) No.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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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제1회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자 태권도는 전국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같은해 MBC 라디오에서는 태권도를 소재로 한 어린이 연속극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를 매일 15분씩 방영하면서 큰 인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1976년에는 김청기 감독의 [로보트 태권브이]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태권도 열풍을 이어가기에 이르지요. 휴전 이후 '세계적인 자국 문화'에 목말라 하던 한국민에게 있어서 태권도라는 국기(國技)의 글로벌화는 그만큼 민족문화의 자부심을 느끼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로보트 태권브이]에서 주인공 훈이가 세계태권도선수권대회에 참가하는 장면이 나오는 것도 우연이 아닌 셈이지요.

[로보트 태권브이]의 흥행성공은 곧이어 2편인 [로보트 태권브이: 우주작전]의 성공으로 이어졌고, 이에 한국 애니메이션계는 다시 한번 중흥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로보트 태권브이]의 기획을 맡았던 김일환은 애니메이션판 [마루치 아라치]의 상품성을 내다보고는 이 작품의 감독을 맡아줄 인물로 임정규 감독을 지목합니다. 태권도와 어린이 애니메이션의 조합이라는 이 기막힌 아이템을 놓고 보면 라디오 연속극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의 애니메이션화는 상당한 매리트를 지닌 것이었지요.

ⓒ (주)로보트 태권브이. All Right Reserved.


여기서 잠깐. 많은 사람들이 김청기 감독은 기억해도 임정규 감독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들이 많은데요, 임정규 감독은 [홍길동]을 제작,배급한 세기상사 출신의 1세대 애니메이터로서 용유수, 박영일, 김청기 감독과 함께 한국 애니메이션사의 황금기를 이끌었던 인물입니다. 더욱이 그는 [로보트 태권브이] 1,2편에서 원화를 담당했던 실력파 애니메이터였지요. 이 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또 설명할 기회가 있을겁니다.

이 무렵 김일환은 [로보트 태권브이]의 성공 후 독자적인 프로덕션인 황금동화를 설립하게 되는데요, 당시 관계법상 영화제작을 허가받지 못한 제작사는 극장용 애니메이션을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삼도필름을 통해 제작에 착수하게 됩니다. 한편 임정규 감독은 자신이 깊이 관여했던 [로보트 태권브이] 3탄 [수중특공대]의 제작에서 하차하고 서울동화를 떠나 황금동화 쪽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지요.

ⓒ (주)로보트 태권브이. All Right Reserved.

임정규 감독이 참여하지 않은 [로보트 태권브이: 수중특공대]. 1.2편과는 달리 스토리의 확장에 한계를 드러낸 작품으로 전편들과는 다른 느낌이 역력하다. 이 작품은 1977년 여름, 임정규 감독의 데뷔작 [마루치 아라치]와 흥행대결을 벌이게 된다.


원래 '마루치 아라치'는 김진희가 원안을 맡고 민병권이 각본을 썼지만 임정규 감독은 라디오 드라마의 각본을 그대로 영상화 시키기엔 너무 서술적인 부분이 많다고 판단, 시나리오 작가인 송길한을 영입해 각색을 시도합니다. 그렇다보니 [마루치 아라치]는 원작에 비해 여러 설정들이 바뀌게 되었지요. 그럼 일단 줄거리를 보실까요?

등산을 왔다가 길을 잃은 장박사와 양사범은 산속에서 이상한 동굴을 발견하게 되는데요, 그곳에서 살고 있는 마루치와 아라치를 만나게 됩니다. 이 소년, 소녀는 자신을 길러주고 수련시켜주신 할아버지가 '파란해골 13호'라는 괴한에게 목숨을 잃을 뒤 둘만 남아 산속에서 살아온 것이었지요. 자초지종을 들은 장박사는 이들을 데려와 양사범의 지도하에 태권도를 연마시켜 기량을 향상시키도록 마련해줍니다.

한편 파란해골단이라는 범죄조직을 만들어 하수인인 팔라팔라를 이용해 태권도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마루치를 공격하는 한편, 핵물리학의 대가인 장박사를 납치해 광속엔진의 원천기술을 훔쳐내려는 계획을 세웁니다. 첫 번째 결전에서는 파란해골단의 괴수로봇 해룡에게 패해 마루치가 실종되지만 인어 아가씨인 유리의 도움으로 살아나 파란해골 13호에 대한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됩니다.

ⓒ 김진희/ 블루미디어. All Right Reserved.


이렇듯 [마루치 아라치]는 사부의 죽음과 복수라는 고전 무협물의 중심 플롯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데요, 복수의 대상이 질투에 눈먼 라이벌 무도인이 아니라 인간의 불멸성을 연구하던 과학자로서 스스로 몸을 버리고 머리만을 남겨놓은 '파란해골 13호'라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이는 당시 기준으로 볼 때 대단히 진보적인 설정이라 말할 수 있는데 파란해골 13호가 상징하는 것이 진보된 과학의 결정체이고, 이를 응징하는 것이 산속에서 야생의 상태로 생존해 온 마루치와 아라치라는 점에서 문명과 자연의 충돌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작품 속의 텍스트가 당시 어린이들에게 얼마만큼 큰 설득력을 지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마루치 아라치]는 개봉당시 16만명의 관객을 불러 모으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임정규 감독이 빠진 [로보트 태권브이: 수중특공대]와 [마루치 아라치]가 흥행대결을 펼쳤다는 점인데요, [수중특공대]는 55000명의 관객에 그치며 사실상 [마루치 아라치]에 판정패 하게 됩니다. 이후로 김청기 감독 사단은 실패의 원인이 로봇물인 태권브이의 한계에 있다고 판단, 슈퍼히어로를 등장시킨 [황금날개 123]을 제작하게 되지요.

하지만 [마루치 아라치]의 우수한 상업성에도 불구하고 지금보면 몇가지 헛점들이 눈에 띕니다. 인어 아가씨나 설인의 등장은 비교적 포스트 모던한 설정을 지닌 작품의 성격에 맞지 않게 설화적 요소를 지나치게 깊숙히 들이밀은 것이라 하겠지요. 가장 큰 맹점은 스토리에 있는데요, 주인공 마루치, 아라치와 파란해골 13호의 원한관계를 설정하는 부분에서 왜 파란해골 13호가 마루치의 할아버지를 살해해야 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모티브가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파란해골단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지구정복과 더 나아가 우주정복이라는 원대한(그러면서도 뻔한) 계획임에도 이것이 마루치, 아라치의 할아버지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 김진희/ 블루미디어. All Right Reserved.

[태권동자 마루치 아라치]에서 마루치 보다 더 눈여겨 봐야 할 캐릭터는 여성인 아라치다. 태권도복을 입고 있는 마루치와는 달리 아라치는 당시로선 획기적인 디자인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있으며 심지어 이 옷차림으로 거침없는 발차기를 구사한다. 아마도 한국 만화사상 가장 진보적인 여성 캐릭터가 아니었나 싶다.


아마도 이는 오리지널을 각색하는 과정에서의 오류라고 여겨지는데, 원작에서는 파란해골 13호가 태백산의 해골기지를 짓기 위해서 마루치와 아라치의 부모를 살해하는 것으로 나와 있지만 애니메이션에서는 살해대상이 할아버지로 바뀌면서 그 이유에 대한 부분이 사라진 것으로 추측됩니다. '마루치 아라치'의 관람객들 중 상당수가 이미 라디오 드라마를 청취한 팬들이었음을 감안해서 관객들 스스로가 자연스럽게 그 이유를 떠올릴 수 있을거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 부분은 나중에 임정규 감독님을 만날 기회가 있다면 직접 물어보고 싶습니다)

[마루치 아라치]에게 부여할 수 있는 큰 의미는 바로 이 작품이 표절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몇 안되는 순수 슈퍼히어로물이라는 점입니다. 물론 캐릭터의 디자인에 있어서 [로보트 태권브이]의 원화를 담당한 임정규 감독의 솜씨인지라 여기에서 크게 자유로울 수는 없었었습니다만 설정만큼은 독창성이 뚜렷한 작품이지요. 게다가 당시 캐릭터의 작명이 똘이, 철희, 훈이 등 비교적 성의없게 이뤄졌던 것에 반해 마루치, 아라치는 작명에 있어서도 무척 신경을 쓴 흔적이 역력합니다. 우선 마루치의 경우 머리, 혹은 정상을 뜻하는 고유어 '마루'에 '어떤 사람'이란 접미어 '치'를 합성한 이름이며, 아라치는 아름답다를 의미하는 아라에 역시 치라는 접미어를 붙여 만든 이름으로(일각에서는 주몽신화의 알을 의미하는 '아라'와 '치'가 붙어 신성을 받은 여자를 의미한다는 설도 있다) 의미로서나 발음으로나 꽤 멋진 작명센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무튼 임정규 감독의 장편 데뷔작 [마루치 아라치]는 한국 애니메이션사에서 한 획을 그은 걸작이 되었습니다. 훗날 MBC에서는 TV 애니메이션 자체제작 시대를 맞이하여 이를 다시금 TV용으로 리메이크하게 되는데요, 제목은 [태권동자 마루치]로서 뒤에 '아라치'가 빠지게 됩니다. 여기에서는 메인 악당인 파란해골 13호가 빠지고 대신 팔라팔라가 주적으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되었습니다. 태백산을 찾은 마루치, 아라치가 전 인류의 로봇화를 꿈꾸는 팔라팔라를 만나 박쥐로봇과 일전을 벌인 뒤 목화성에서 온 메이 사령관과 손을 잡은 팔라팔라의 일당에 맞서 싸운다는 줄거리로서 마루치와 아라치의 연령대가 낮아졌고 이들의 능력치도 일반적인 인간이 아닌 초인적인 능력을 보유한 캐릭터로 변모되었죠.

ⓒ 김진희/ MBC. All Right Reserved.

1988년, 올림픽 개최를 즈음해 자체 제작 TV 애니메이션이 정책적으로 장려되자 MBC에서 리메이크를 시도한 [태권동자 마루치]. 주제곡은 오리지널과 똑같지만 파란해골 13호 대신 팔라팔라가 메인 악당으로 등장하면서 개사되었다. 원작과는 달리 주인공들의 연령대가 좀 더 낮아진 듯 하나 능력치는 훨씬 강력해져서 오히려 현실감이 떨어진다.


라디오 드라마에서 애니메이션으로 이어진 [마루치 아라치]는 충무로 키드 류승완 감독에 의해 실사판으로도 제작될뻔 했습니다만 제작자의 허가를 얻지 못해 애초에 기획했던 [마루치 아라치]가 아닌 [아라한 장풍 대작전]으로 변경되면서 영화의 색채가 다소 변한 감도 없지 않습니다. 뭐 그만큼 마루치 아라치가 가진 네임벨류는 지금까지도 유효하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이 이야기는 속편열전의 다음 작품으로 연결됩니다.


본 리뷰는 2010.9.10. Daum의 메인페이지에 선정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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