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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열전(古典列傳) No.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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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원작 '백경  Moby Dick'은 무려 700페이지가 넘는 대서사극입니다. 얼핏보기에는 고래잡이 선원들과 거대한 흰고래 모디빅의 사투를 다룬 작품쯤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백경]은 출간당시부터 지금까지 미국 문학사에 있어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형식을 취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여기에 포경업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과 고래의 생태에 대한 언급이 사실적으로 묘사된 부분은 멜빌 본인 스스로가 2년간 포경선에서 작살잡이로 생활했던 경험에 기초하고 있지요. 정작 소설은 멜빌의 당대에는 그 파격성으로 인해 크게 인정받지 못한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백경'은 텍스트에 담긴 상징성에 대한 해석으로도 많은 논란이 된 작품입니다. 어떤이는 포경선 피쿼드호의 운명이 멜빌의 생존 당시 노예제도의 존폐논란으로 국가적 분열에 이르렀던 정치적 담론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모비딕과 에이합 선장으로 대변되는 인간과 자연의 갈등에 대한 투쟁을 다룬 작품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고, 여튼 다양한 시각에서 이처럼 많은 접근법이 존재하는 소설도 드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이 처음으로 영화화 된 건 1930년 로이드 베이컨 감독의 [모비딕]이라고 흔히들 알고 있습니다만 정확히는 1926년 밀라드 웹의 무성영화 [바다의 야수 The Sea Beast]가 최초의 작품입니다. 그리고 1930년판 [모비딕]은 [바다의 야수]의 유성영화판 리메이크인 셈이지요. 이 두 작품은 멜빌의 원작에서 등장인물과 플롯을 가져오긴 했으나 원작에 충실한 작품은 아닙니다.

두 작품 모두 에이합이 주인공이긴 하지만 멜빌의 소설속에는 언급되지 않는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이를테면 에이합 선장이 원작과는 달리 매우 핸섬하고 로맨틱한 영웅적 인물로 묘사된다는 점, 그리고 두 다리가 모두 성하다는 점, 역경을 딛고 집으로 돌아와 사랑하는 연인과 재회의 기쁨을 만끽한다는 점 등 모든 면에서 소설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멜로영화가 되어 버렸지요. (두 작품 모두 존 베리모어가 에이합 역을 맡았습니다)

이후 여러차례 멜빌의 소설이 영화화되었지만 영화사적인 의미로 볼때 가장 각색이 잘된 작품으로 평가받는 것은 1956년 존 휴스턴 감독의 작품 [백경]입니다. 이 작품이 눈에 띄는 이유는 우선 '거장'이라는 칭호를 가져간 두 인물의 이름을 볼 수 있기 때문인데요, 바로 감독인 존 휴스턴과 메이플 목사 역으로 출연한 오손 웰즈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여러 공통점이 존재합니다.

두 사람 모두 감독이면서 배우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는 것, 헐리우드에서도 괴짜, 혹은 촬영장의 독재자로 알려진 인물이었다는 점 등이 그것이지요. 오손 웰즈가 영화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시민 케인]을 발표한 바로 그 해에, 필름느와르의 장르적 원형을 제시한 존 휴스턴의 [말타의 매]가 개봉되었다는 것도 우연이라기 보다는 숙명적인 느낌을 받는 대목입니다. 한편 오손 웰즈는 [백경]의 출연료를 가지고 자신이 제작을 맡은 연극 '백경'에 투자했습니다. (이 연극에서는 명배우 로드 스타이거가 에이합 역을 맡았습니다)

ⓒ MGM Home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사실 존 휴스턴은 [백경]을 만들기 위해 여러 제작사를 전전해야 했는데 그 이유는 원작의 내용이 너무 어둡고 여배우가 전혀 등장하지 않아 멜로코드가 전무하다는 점 등 흥행에 있어서 불리한 요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유일하게 제작에 관심을 보인 워너측에서는 한가지 조건을 달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스타급 배우를 기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선택된 인물이 바로 그레고리 펙입니다.

원래 존 휴스턴은 저명한 배우이자 자신의 아버지인 월터 휴스턴을 에이합 역으로 기용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월터 휴스턴의 사망으로 이 계획은 불발로 돌아가지요. 많은 사람들이 그레고리 펙의 캐스팅 사실에 우려를 표명했는데, 실제로 펙은 여러차례 그에게 들어온 악역 제안을 거절한 바 있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그동안 맡아온 정의로운 이미지를 훼손시킬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지요. 본인 스스로도 자신이 에이합 역에 캐스팅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합니다.

ⓒ MGM Home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소설 '백경'의 이야기는 크게 네 개의 플롯으로 나뉩니다. 내레이터를 맡은 이슈마엘의 이야기, 실질적인 주인공인 에이합 선장의 이야기, 포경업에 대한 고찰, 그리고 모비딕의 추적과정이 그것입니다. 존 휴스턴은 원작에서 포경업과 고래의 생태에 대한 언급을 대폭 축소하는 한 편, 이슈마엘의 비중을 줄이고 모비딕을 추적하는 과정에 무게를 싣습니다. 이슈마엘과 퀴퀘드가 만나 피쿼드 호에 상선하는 초반부와 고래잡이 광경을 보여주는 중반부의 전개까지는 솔직히 좀 지루한 감이 없지 않지요.

그럼에도 [백경]은 원작의 철학적이고 모호한 내용들을 영화적으로 각색하기 위해 분투한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보입니다. 일각에서는 [백경]이 그렇게까지 잘만든 작품이 아니라는 의견을 보이기도 하는데, 사실 영화적 재미만을 따진다면 [백경]은 결코 썩 흥미진진한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어려운 텍스트를 지닌 원작을 이 정도의 수준으로 영화화시켰다는 것에 오히려 더 높은 점수를 주어야겠지요.

영화는 후반부로 흐를수록 긴장감을 더해 갑니다. 모비딕에 대한 분노를 불태우는 에이합과 그의 복수에 동참해 무모한 사냥에 이끌리는 선원들의 모습은 망망대해에서 벌어지는 선상의 광기어린 모습을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침내 모비딕이 등장해 사투를 벌이는 피쿼드 호의 선원들과의 처절한 대결은 50년대라는 시대적 특수성을 감안할 때 꽤나 훌륭한 특수효과로 이루어진 박진감을 자랑합니다.

ⓒ MGM Home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특히 인상적인건 마지막 에이합의 최후입니다. 모비딕에 매달려 끝까지 작살로 공격을 멈추지 않다가 결국 고래와 함께 로프로 칭칭 감겨 바다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은 굉장히 큰 임팩트를 전달합니다. 숨이 끊어진 에이합의 손목이 까딱까딱 움직이는 것을 보고 '선장이 우리에게 오라고 손짓한다!'며 중얼거리는 선원들의 대사가 아직까지 기억나는군요.

이 클라이막스의 장면에서 그레고리 펙은 미니어처를 사용한 특수효과로 처리할 줄 알았었는데, 막상 촬영이 개시되자 존 휴스턴 감독은 펙을 실제 크기로 제작된 고래 모형에 매달아 그대로 물속에 처박았다고 합니다. 덕분에 펙은 상당히 마음이 상해서 휴스턴과 한동안 냉전상태를 유지했다는 미확인 루머도 있습니다만 이듬해인 1957년, 두 사람이 멜빌의 또다른 원작 '타이피 Typee'의 제작을 논의했던 것으로 보아 이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 같고, 실은 이것보다 나중에 펙이 자신을 에이합 역으로 캐스팅한 것이 휴스턴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라 제작사의 압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크게 실망한 것이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과정에서 펙은 휴스턴이 자신을 속였다고 믿게 되었고, 두 사람은 끝내 두 번 다시 얼굴을 보지 않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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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려진것과는 달리 개봉당시에 평론가들은 그레고리 펙의 연기에 대해 그리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펙 자신은 매우 불쾌하게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른 뒤에야 스스로도 자신이 그 당시 에이함 역을 맡기에는 너무 젊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역할을 맡을 당시 펙은 38세였죠. 원작에서는 58세로 묘사됩니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후대의 많은 사람들은 [백경]에서 그레고리 펙이 보여준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에 대해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지요. 사실이지 소설을 보면 원작 속 에이함의 캐릭터를 펙이 매우 잘 이해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 MGM Home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지금 보기에는 다소 엉성하긴 해도 [백경]은 원작소설의 실사화라는 어려운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작품 중 단연 독보적인 존재입니다. 특히 CG가 없던 시절 수작업으로 완성한 거대 고래와의 사투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모범이 되었지요. 훗날 [죠스]로 해양 어드벤처 영화의 새로운 원형을 제시했던 스티븐 스필버그 또한 [백경]에 대한 오마주로서 퀸트 선장이 극 중 [백경]의 한 장면을 감상하는 씬을 넣으려고 했습니다만 그레고리 펙이 자신의 연기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거절해 결국 이 장면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P.S

1. 존 휴스턴과 오손 웰즈는 라이벌이자, 친구로서 오랜 관계를 유지해 왔습니다. 괴작이 되어 버린 [카지노 로열 (1969)]의 감독을 맡았던 존 휴스턴은 다시 한번 오손 웰즈를 르쉬프 역으로 등장시키지요. 반면 오손 웰즈 역시 생애 말년에 메달렸던 [바람의 저편 The other side of the wind]에 존 휴스턴을 출연시킬 예정이었습니다만 결국 완성되지 못하고 맙니다.

2. 개인적으로는 [백경]의 B급 컨버전이 [올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죠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아류작이긴 합니다만 스토리적인 기반은 [백경]에 [프랑켄슈타인]을 살짝 첨가한 느낌이랄까요.

3. 유일하게 선장에게 반기를 드는 일등 항해사 스타벅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커피프랜차이즈인 '스타벅스'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원래는 배이름인 피쿼드가 먼저 고려되었습니다만 이것이 반려된 후에 선택된 이름이지요.

4. 애니메이션으로는 데자키 오자무 감독의 [백경전설]이 있습니다.  

5. 이 작품은 1998년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제작한 TV용 영화로 리메이크 됩니다. 여기서 그레고리 펙은 오손 웰즈가 맡았던 메이플 목사 역으로 까메오 출연하고 있으며, 에이합 선장은 [스타트렉]으로 알려진 패트릭 스튜어트가 맡았습니다. 누가 더 연기를 잘했느냐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립니다. 그레고리 펙은 신비스럽고 카리스마적인 에이합을 보여준 반면, 패트릭 스튜어트는 에이합의 광기를 더 잘 묘사했지요.

ⓒ American Zoetrope, Nine Network Australia, USA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6.2010년에는 괴작전문 어사일럼에서 원작의 무대를 현대로 옮긴 [모비딕 2010]으로도 만들어졌습니다. 소개할 기회가 된다면 당연히 괴작열전으로 가겠지요. [죠스]를 패러디한 저 포스터의 센스라니.. -_-

ⓒ The Asylum. All rights reserved.


7.'백경'의 새로운 리메이크작에는 티무르 베프맘베토브 감독이 지명되었습니다. 조만간 새로운 모비딕을 볼 수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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