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개봉한 영화 [로빈 후드]의 리뷰를 블로그에 올렸더니, 리들리 스콧의 감독판 DVD나 블루레이를 기다린다는 답글이 달렸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감독인데, 왜 굳이 감독판이라고 하는 별도의 판본을 기대하게 되는 것일까? 실제로 DVD나 블루레이 등 부가판권시장에 출시된 영화들을 보면 디렉터스 컷(Director's cut)이라 불리는 감독판 영화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영화의 편집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눠진다. 처음 작업이 스크립트에 나와있는 장면들을 중심으로 대충 필요없는 필름을 자르고 영화 본편에 쓸 만한 장면들을 추려내는 러프컷(Rough cut) 단계. 두 번째가 편집자의 입맛에 맞추어 필름을 줄여나가는 에디터스 컷 단계다. 크래딧을 보다보면 에디터 Editor, 즉 편집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되는데 바로 에디터가 관여하는 단계가 이 단계다. 굳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있는데도 편집자를 따로 두는 것은 편집만을 전문으로 하는, 즉 영화를 보다 상품성있게 끼워 맞추는데 정통한 전문스탭의 손길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가 파이널 컷인데, 이 과정에서 사운드 트랙의 사용이나, 재편집, 심지어는 재촬영의 여부도 결정하게 된다.
사실상 영화의 완성은 파이널 컷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라해도 과언이 아닌데, 많은 경우 감독의 관리하에 편집이 이루어지거나 또는 제작자나 제작사의 중역들의 지시에 의해 편집이 진행되기도 한다. 특히 세계 영화의 중심인 헐리우드에서는 편집권에 대한 부분이 민감해서 예산이 커질수록 스튜디오의 개입이나 참견이 커지기 마련이다. 감독의 권한, 즉 편집에 관여할 수 있는 파워를 확보하기가 그 어느 나라보다 힘든 곳이 헐리우드다.
따라서 헐리우드 영화 시스템에서는 편집권을 둘러싼 갈등이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일례로 [아바타]의 제임스 카메론은 감독 데뷔작 [피라냐 2]를 둘러싼 제작과정에서 부당한 해고를 당한 뒤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발편집을 거친 버전이 미국내에 상영되는 것을 막기 위해 몰래 편집실에 들어가 미국버전의 편집 작업을 마치기도 했다. 이러한 수모로 인해 카메론은 자신이 감독한 영화의 제왕적인 통제력에 대해 유독 집착하게 되었다.
ⓒ Brouwersgracht Investments/ Chako Film Company. All rights reserved.
그렇다면 극장에서 상영한 영화는 모두 감독판이 아니라는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비록 영화의 완성단계에서 외부의 입김이 많이 작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스티븐 스필버그를 비롯한 이른바 거장들, 그리고 인디영화급의 소규모 작품들에서는 감독들의 편집권이 보장되는 편이다. 별도의 '감독판'이라는 타이틀을 달지 않더라도 감독의 의도대로 편집된 영화가 최종 상영본으로 나왔다면 그 영화는 순수한 감독판이라고 볼 수 있다. 일례로 [다크 나이트]의 경우 극장에서 상영한 작품 자체만으로도 완성도가 매우 높은 영화인데, 이것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의도가 그대로 반영된 감독판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는 별도의 감독판이 출시될 확률은 전무하며 또 나와야 할 필요도 없다.
감독판이라고 해서 모두 극장 상영본보다 훌륭하다고도 볼 수 없다. [시네마 천국]의 경우 1시간 가량이 추가된 감독판은 극장판의 여운을 오히려 감소시킨 나쁜 경우다.극장 개봉당시 혹평을 받았던 [엘렉트라]의 경우는 3분 정도가 추가되었지만 영화의 완성도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 Cristaldifilm/ Les Films Ariane. All rights reserved.
[진주만]은 마이클 베이 감독의 작품 치고는 이례적으로 감독판 DVD가 발매되었는데, PG-13 등급의 극장판과는 달리 R등급의 하드고어적인 요소가 대폭 추가되어 어떤 것이 나은것인지를 판가름 하기가 모호하다. 반전이 인상적인 [나비효과]는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극장판과 어두운 결말로 끝나는 감독판의 성격이 워낙 달라 호불호도 명확히 갈린다.
한편 극장 상영본과 많은 차이를 보이면서 완성도를 향상시킨 작품들은 다음과 같다.
ⓒ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All rights reserved.
이처럼 많은 판본을 가진 작품도 드물다. 극장 상영본과 워크프린트, 감독판, 파이널 컷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판본들은 제각기 다른 느낌으로 매니아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중에 공개된 파이널 컷은 필름 리마스터링을 거침과 동시에 미흡했던 장면들을 보정 및 추가촬영하는 등 정성을 쏟은 작품으로 손꼽힌다. 극장판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엔딩에 있는데, 사랑의 도피로 끝을 맺은 극장판의 해피엔딩과는 달리, 감독판은 주인공의 나레이션과 해피엔딩씬을 통채로 날려 버려 오히려 러닝타임이 대폭 줄었지만 작품이 주는 메시지를 훨씬 명확하게 만들었다.
ⓒ 20th Century Fox Home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전설의 레퍼런스급 '감독판'이 된 작품. 극장 개봉당시 이렇다할 큰 반향을 불러모으지 못한 것에 비해 40여분이 추가된 감독판 DVD는 영화 자체가 달리보일 만큼 정교한 완성도를 갖춘 작품으로 탈바꿈했다. 다소 헐렁했던 이야기의 얼게를 꽉차게 만든 감독판으로 서두에 언급한 [로빈 후드] 감독판을 기대하는 이유도 바로 리들리 스콧이 참여한 감독판의 위력을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 Warner Bros. Entertainment Inc. All rights reserved.
영화사와의 마찰로 인해 중도에 하차한 리처드 도너 감독이 후임으로 영화를 완성한 리처드 레스터 감독의 극장판에서 상당부분을 삭제, 엔딩을 바꾸고 몇몇 우스꽝스런 슬랩스틱씬을 빼고 말론 블란도의 등장씬을 추가해 1편과의 연계성을 강화했다. 그러나 이미 세월이 한참 흐른 후에 제작된 감독판이어서 기존의 러프컷에서 남은 자투리 필름 및 테스트 필름을 활용하는 바람에 12분 가량이 줄어들었으나 도너컷에 대한 팬들의 만족도는 상당히 높은 편이다.
ⓒ 20th Century Fox Home Entertainment. All rights reserved.
영화 개봉당시 폭스사 간부들로부터 영화가 너무 길다는 이유로 편집을 강요당해 힘겨운 싸움을 했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이 잘려나간 13분의 필름을 원상복구시킨 궁극의 감독판. 주인공 리플리의 인간적 고뇌 및 그녀가 에이리언의 알과 접촉한 혹성 LV-426(아체론)으로 되돌아가게 되는 계기에 설득력을 부여했다.
ⓒ 1991 Studio Canal Image S.A. All rights reserved.
사실 [터미네이터 2]의 경우는 극장상영본 역시 감독판이라 할 수 있다. 단, 이 경우에 카메로는 미리 두 가지 버전의 엔딩을 따로 찍어 시사회를 통해 좀 더 나은 평가를 얻은 버전을 극장에 걸었는데, DVD에는 몇가지 추가씬을 덧입힌 '확장판' 개념의 감독판을 새로 선보인바 있다. 두 버전 모두 제임스 카메론의 의도대로 만든 버전이지만 터미네이터 시리즈를 2편으로 종결하길 원했던 카메론의 의도대로라면 확장판의 엔딩이 원래의 결말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관객들은 왜 [터미네이터 3]는 억지스러울 수밖에 없는 작품인지 깨닫게 된다.
위에서 알 수 있듯 감독판이라는 이름하에 완성도 높은 편집본을 내놓는 건 제임스 카메론이나 리들리 스콧 같은 몇몇 거장들에 한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DVD나 블루레이가 보급된 오늘날 감독판은 분명 영화를 즐기는 또하나의 기쁨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문제는 감독의 진짜 의도를 존중해주는 영화계의 시스템일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헐리우드의 잇단 러브 콜에도 불구하고 편집권을 보장해주는 한국의 시스템이 아직은 더 마음에 든다고 밝힌바 있다. 그만큼 창작성이 중요시되는 영화의 편집에 있어 감독의 의도가 반영되는 것은 필수적이라 하겠다. 오늘날 무수한 감독판 영화들이 존재하지만 요즘은 단순한 상술에 의해 그저 말뿐인 감독판 영화들도 적지 않으므로 관객들의 세심한 판단이 꼭 필요함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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