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블사의 편집자 겸 스탠 리가 구태의연한 히어로물의 반복적인 생산에 권태감을 느낄 무렵 기획된 '판타스틱 포'의 성공은 꺼져가던 그의 창작의욕에 불을 지폈다. '토르', '인크레더블 헐크', '엑스맨' 등 마블사의 대표적인 캐릭터들은 비슷한 시기에 동시다발적으로 완성된 작품들 속 주인공이다. 이와 더불어 스탠 리는 또 하나의 작품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그가 새 작품의 모델로 삼기로 한 인물은 헐리우드의 전설적인 제작자이자 사업가, 모험가, 발명가, 플레이보이로 유명한 하워드 휴즈였다. 실제로 이 작품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사업가에 공학에 관한한 천재적인 지식을 지녔고 바람둥이기질이 다분한 슈퍼히어로로 설정되었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바로 '아이언맨'이다.
스탠 리 외 3명이 공동으로 작업해 1963년 "Tales of Suspense"에 발표한 '아이언맨'의 주인공 토니 스타크는 현실속 하워드 휴즈와 너무나도 닮아있었다. (실제로 원작 속 토니 스타크의 부친 이름은 '하워드' 스타크다) 다른 슈퍼히어로들과 '아이언맨'이 달랐던 점은, 토니가 '헐크'나 '스파이더맨' 같은 초인적인 능력을 소유한 자가 아니라 '배트맨' 같이 보통의 인간이었다는 점이었는데, 부모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고 장비에 의존하는 점에 있어서는 브루스 웨인과 공통점을 가지지만 히어로적인 태생과 성격면에서는 분명한 차별성을 지닌다.
ⓒ Warner Bros. Pictures/Miramax Films. All rights reserved.
대표적인 점으로서 토니 스타크는 부모의 죽음으로부터 파생된 트라우마가 그의 슈퍼히어로적 기질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그가 슈퍼히어로인 아이언맨이 된 결정적 모티브는 바로 반공주의적인 성향에 근거한 것이다. 원작에서 토니는 자신이 설계한 신무기의 성능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베트남에 시찰을 나갔다가 베트콩에게 납치된다. 베트남의 군벌 왕추는 부비트랩을 건드리는 바람에 토니의 몸속에 박히게 된 파편들을 제거해주는 조건으로 신무기 개발을 도와줄 것을 제안한다. 토니가 이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다. 바로 베트남을 탈출하는 수단을 만들기 위해 왕추가 제공하는 연구시설을 확보하려는 것. 이 과정에서 그는 포로로 잡혀있던 호 인센 교수의 도움으로 아이언맨의 시험작을 완성, 왕추의 조직을 붕괴시키고 미국 헬기 조종사 짐 로스를 만나 탈출에 성공한다.
ⓒ 1963 Marvel Comics. All rights reserved.
이와 같은 아이언맨의 탄생배경은 당시 베트남전에 개입한 미국의 시대상을 반영한 것인데, 그 당시 마블에서 발표했던 작품들, 이를테면 ‘판타스틱 포’, ‘인크레더블 헐크’의 주인공들이 냉전시대 과학기술의 경쟁에서 비롯된 부작용으로 탄생된 것을 생각할때 ‘아이언맨’의 탄생 역시 이러한 냉전의 영향력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기 아이언맨은 철저하게 미국의 군수산업에 대한 정당성을 역설하는 주제의식을 반영하며 미국의 냉전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선천적 한계를 보여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토니 스타크의 개인적인 고뇌에 무게중심을 옮겨가면서 한때 알콜중독에 빠지거나 조울증, 그리고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실로 불완전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영화 [아이언맨]은 이런 원작 코믹스의 후기 속성을 좀 더 반영하고 있다.
[아이언맨]의 실사화 계획은 지금으로부터 무려 20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 유니버셜 스튜디오는 [아이언맨]의 실사화를 처음으로 계획하게 되는데, 이때 감독으로 거론되었던 인물은 B급 호러무비의 거장 스튜어트 고든으로서 이 당시 [아이언맨]은 저예산 영화로 제작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 계획은 실현되지 못했다.
6년이 흘러 유니버셜은 20세기 폭스사 측에 판권을 인계했다. 그리고 이듬해 한창 인기정상을 달리고 있던 니콜라스 케이지를 주연으로 한 [아이언맨]의 제작이 고려되기도 했으나 별 성과없이 무산되었고, 1998년 톰 크루즈가 이 영화의 제작을 맡고 직접 주연을 하는데 관심을 나타냈는데, 소문만 무성하던 [아이언맨]의 본격적인 제작이 가시권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다. 시나리오 작가 제프 빈타와 스탠 리는 영화화를 위한 각본 작업에 착수했고 1999년, 천재감독 쿠엔틴 타란티노가 실사판 [아이언맨]의 각본, 감독을 겸임해 이 프로젝트에 첫발을 디뎠다.
하지만 여전히 진전은 없었다. 폭스사에서 제작에 큰 열의를 보이지 않고 미적거리는 사이 판권은 뉴라인 시네마로 넘어가버렸다. [아이언맨]의 시나리오는 다시 세 명의 작가에 의해 완전히 재구성되었고, 이때 고려된 설정은 스탠 리의 또다른 창조물 닉 퓨리(S.H.I.E.L.D의 에이전트)가 아이언맨과 같이 등장하는 것이었다. 2001년에는 원작의 열렬한 팬인 조스 웨든이 뉴라인 측으로부터 감독 제의를 받았고 마침내 [아이언맨]은 제작에 들어가는 듯 보였다.
ⓒ 20th Century Fox Television/Marvel Enterprises. All Rights Reserved.
그러나 이번에도 실제적인 진척이 없었다. 또다시 지연된 이 프로젝트는 2004년 닉 카사베츠 감독가 전격 기용되면서 또한번 영화화를 시도하지만 2년이 지나도록 별 성과가 없자 마침내 뉴라인 시네마는 판권을 마블 측에 넘기고 만다. 마침내 2006년, 자사의 캐릭터 판권을 회수한 마블 스튜디오는 직접 영화를 제작하기로 하고 존 파브루 감독과 계약을 하게 되는데, 사실 파브루는 그 당시 또다른 슈퍼히어로 영화 [캡틴 아메리카]의 감독으로 내정된 상태였다. 그러나 평소 '아이언맨'의 열광적인 팬이었던 존 파브루는 [캡틴 아메리카]의 제작을 포기하고 [아이언맨]에 합류하기로 결심한다. 비로소 [아이언맨]이 주인을 만난 것이다.
파브루 감독은 [아이언맨]이 여러 작품들의 특징을 한데 모은 영화로 만들길 원했다. 쉽게 말하자면 그는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스타일로 만든 [슈퍼맨]같은 영화를 원했는데, 여기에 '톰 클랜시' 소설의 느낌과 '제임스 본드' 시리즈를 넣고, 그리고 [로보캅]과 [배트맨 비긴즈]를 뒤섞은 작품이 바로 존 파브루식 [아이언맨]의 특징이다.
원래 [아이언맨]의 원작은 토니 스타크가 베트콩들에 납치되어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프로토 타입의 아이언맨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설정이었다. 이후 '아이언맨'은 미국의 군수사업과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라는 중요한 테마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실사판 [아이언맨]은 최근 세계의 정황에 맞추어 중동지역의 게릴라들에게 납치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는 '아이언맨' 코믹스 자체가 시대에 맞춰서 베트남전에서 걸프전으로, 다시 아프가니스탄으로 배경을 변화시킨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영화에서의 전개과정은 원작을 약간씩 변형시키는 선에서 원작과의 적절한 합의점을 찾은 듯 하다. 메인악당인 오바다이아 스테인은 원작에서 적대적 M&A로 스타크 인더스트리를 집어 삼켜 토니를 수렁으로 빠뜨리는 인물이지만 영화판에서는 토니의 부친과 함께 스타크의 회사를 창업한 인물로서 토니와 친분이 깊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러나 그의 야심만큼은 원작과 유사하며 후에 '아이언 몽거'의 제작을 위해 아이언맨의 설계도를 입수해 자신이 직접 아이언 몽거가 되는 과정은 원작과 흡사한 플롯을 지녔다.
ⓒ Marvel Enterprises/Paramount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아이언맨]에서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토니 스타크 역의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다. 그는 자신이 토니 스타크를 연기할 수만 있다면 [아이언맨]을 몇편이고 찍겠노라고 공언할만큼 원작의 열성적인 팬이었다. 실제로 그가 한때 약물과용으로 교도소를 들락거리며 폐인의 나락까지 갔던 점에서 보자면 원작 속 토니 스타크의 캐릭터와 절묘하게 부합되는 인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예상대로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는 이번 [아이언맨]에서 토니 스타크 그 자체라고 할만큼 완벽한 싱크로를 이룬다.
리처드 도너의 [슈퍼맨]이래, 고뇌하는 영웅이라는 테마는 팀 버튼의 [배트맨]과 샘 레이미의 [스파이더맨], 브라이언 싱어의 [엑스맨]으로 꾸준히 계승되어 온 설정이다. 이번 [아이언맨] 역시 고뇌하는 히어로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그는 납치사건을 계기로 군수사업의 폐혜를 실감하며 도덕적 회의감에 빠져든다. 물론 토니 스타크는 마냥 심각한 인물은 아니다. 그에게는 다른 히어로가 갖추지 못한 특유의 유머감각과 경박스런 이미지를 함께 지닌 유쾌한 캐릭터다. 아마도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본인의 이미지와 오버랩되는 토니 스타크의 매력은 한동안 아이언맨 시리즈를 지탱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될 듯 하다.
블록버스터의 관건인 비주얼의 스케일면에 있어서도 [아이언맨]은 합격점을 줄 만하다. CG로 표현하지 못할 것이 없는 오늘날 [아이언맨]은 시대적으로도 타이밍을 잘 타고난 작품이라 말할 수 있는데, 프로토 타입에서 마크2, 마크3로 변모해가는 아이언맨 수트의 실험과정이나 아이언 몽거와의 박진감 넘치는 대결씬은 그간 다른 히어로물에서 보여준 액션보다 훨씬 강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 Marvel Enterprises/Paramount Pictures. All Rights Reserved.
안타깝게도 [아이언맨]은 같은해 개봉된 또 한편의 슈퍼히어로물 [다크 나이트]의 예술적 완성도에 눌려 초반만큼의 화제성을 유지하지 못한 불운을 겪었다. 하지만 이는 반대로 유독 전편보다 나은 속편이 많았던 슈퍼히어로물의 전례들(이를테면 [슈퍼맨 2 도너컷], [스파이더맨 2], [엑스맨 2], [다크 나이트], [인크레더블 헐크] 등)을 상기시키며 속편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키우는 계기를 마련한 셈이기도 하다. 이제 2010년의 본격적인 블록버스터 시즌의 포문을 열 [아이언맨 2]에 이어 영화사상 가장 거대한 슈퍼히어로 프로젝트가 될 [어벤저스]에 이르기까지 아이언맨의 스크린 활약상은 계속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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