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에는 치명적 스포일러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미치겠다.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까. 이제부터 하게 될 이야기가 좀 매니아스럽긴 해도 [에반게리온: 파]를 보고난 지금, 올해 극장에서 본 가장 인상깊은 작품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해졌다. [에반게리온: 파]. 이 작품이야 말로 준비된 걸작으로서 전혀 손색이 없는 애니메이션계의 [다크 나이트]다.
'사골게리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써가며,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을 재진열하는 것 마냥 방영된지 10년이 지난 [에반게리온]을 울궈먹는 가이낙스의 행태에 대해 말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에반게리온: 서]가 정교한 리테이크에 의해 탈바꿈한 수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 관객들 사이에서 'TV판과 달라진 것이 없다'며 볼멘소리를 한 것이 이해는 간다. 적어도 '리빌드(재구축,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천박한 그 누군가들이 환장하고 좋아라하는 재건축의 의미가 되겠다)'라는 관점에서 볼 때 전작인 [에반게리온: 서]는 '파격'보다는 '안전'을 택한 모습을 보여준 듯 싶었다.
ⓒ Khara/ GAINAX. All Rights Reserved.
그러나 반면에 [에반게리온]에 대한 남다른 식견과 애정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 [에반게리온: 서]는 그야말로 전율을 불러 일으키는 거대한 교향악의 서곡과 같은 작품이었다. 결코 한번 본 정도로는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촘촘히, 그리고 교묘히 감추어진 변화의 조짐은 [에반게리온: 서]의 전반에 넘칠 정도로 준비되어 있다. 만약 필자가 말한 이 변화를 알아챌 단계까지 온 관객이라면, [에반게리온: 파]에 대한 기대치는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만큼의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라 본다.
그렇다. [에반게리온: 서]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그저 [에반게리온] 이후의 별다른 히트작 하나 없이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 하던 가이낙스의 오타쿠들이 알량한 재탕 의식으로 만들어낸 '리모델링' 개념의 허접한 작품이 아니었다. 제작진들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집요하고, 철저하게 '리빌드'를 의식하며 새로운 부지를 확보해 놨고, 이제 그들이 이뤄놓은 과거의 건물인 [에반게리온]을 부수어내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에반게리온: 파]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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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파]를 논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스포일러를 남발할 수밖에 없기에 만약 기회가 된다면 마음껏 작품속 내용들을 속 시원히 까발리는 이른바 '스포일러용' 리뷰를 별도로 쓸까 한다. 본 리뷰는 아직 작품을 접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 최소한의 정보만을 가지고 작품을 소개하는 입문용 리뷰 정도로 봐주길 바란다. (그럼에도 스포일러를 피하면서 본 글을 쓴다는건 거의 고문에 가깝다)
사실상 전편인 [에반게리온: 서]가 '리빌드'의 개념으로는 2% 부족한 양상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본격적인 리빌드의 시작은 언제부터라고 봐야 할까? 정답은 [에반게리온: 서]의 엔드 크레딧이 모두 끝나고 등장하는 '차회예고'부터다. 불과 30초 남짓한 이 예고편이 그토록 중요했던 이유는 단 한가지. 오리지널 TV판에 등장하지 않았던 신 캐릭터 '마리'의 등장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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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에반게리온: 파]는 지금까지의 TV판은 모두 잊으라는 듯 프리타이틀 시퀀스부터 마리와 에반게리온 가설 5호기를 등장시키며 사뭇 파격적인 진행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더욱 당혹스러운 사실은 무려 두 개의 사도가 영화가 시작된지 불과 10분내에 소멸되는 대단히 빠른 템포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런 빠른 템포에 발맞추어 기존의 세계관을 허무는 속도도 엄청나다. 바보 삼총사에게 싸대기 세대를 날리며 까칠한 성격을 만천하에 알렸던 아스카는 이번엔 해상에서의 우스꽝스런 조우장면을 버리고 간지나는 공중낙하와 동시에 사도와 맞서는 다이나믹한 공중전으로 첫 등장을 알린다. 이름도 소류에서 시키나미로 바뀌었다. 소류(항공모함의 이름)에서 시키나미(구축함의 이름)로의 변화라.... 그 의미에 대한 상상은 영화를 직접 본 여러분의 판단에 맡긴다. 단언하건데 [에반게리온: 파]를 통틀어 가장 큰 캐릭터의 변화를 겪는 캐릭터는 아스카다! ⓒ Khara/ GAINAX. All Rights Reserved.
그렇다고 신지와 레이의 캐릭터가 발전이 없다는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뿐, [에반게리온: 파]가 지닌 파격성의 중심에는 스토리의 변화보단 캐릭터의 변화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두드러진 캐릭터의 성장이 자리잡고 있다. 음침하고 우울한 성격파탄자들의 징징거림에서 지극히 정상적이며 (심지어 사랑의 감정까지도 느끼는!) 희망적인 전조들이 이곳저곳에서 감지된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예상을 깨고 첫장면부터 등장하는 신캐릭터 마리의 경우, 그 등장씬이 생각처럼 많지 않음에 관객들은 의아해 할지 모른다. 아니, 사실상 마리라는 캐릭터에 대한 존재감은 이상하리만큼 희미하다. 이에 대해 약간 첨언하자면, 원래 '신극장판'의 기획당시 마리의 캐릭터는 그다지 비중있게 다뤄질 캐릭터가 아니었다. 단지 지나가는 행인1의 수준, '에바 가설 5호기의 파일럿은 이렇게 생겼다'는 정도로 넘어가는 캐릭터였으나, [에반게리온: 서]의 폭발적인 반응 이후 '파격'의 초점에 마리가 자리잡을 수밖에 없음을 제작진은 간파했다. (이 말인 즉슨 기획 초기만 하더라도 [에반게리온: 파]의 파격성은 지금과 같은 수준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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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대로 된 대사 하나 없이 넘어갈 뻔한 마리는 무려 사카모토 마아야가 성우로 가세하면서 비중을 키웠다. (그녀의 비중이 [에반게리온: 급(혹은 Q)]에서 얼마나 커질런지는 미지수이지만 적어도 지금보다는 비약적으로 커질 확률이 크다) 캐릭터의 성격도 대폭 수정되었다. [에반게리온: 서]의 예고편에서 느껴진 (다소 레이쪽에 가까운) 신비스런 분위기가 [에반게리온: 파]에 오면서 (아스카쪽에 가까운) 명랑,열혈쪽으로 급선회한것도 이러한 제작노선의 변화 때문이다. (실제 [에반게리온: 서] 예고편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마리의 동일한 시퀀스가 [에반게리온: 파]에서도 등장하지만 두 장면의 느낌은 완전히 다르다. 확실하진 않으나 아마도 [에반게리온: 파]쪽의 장면은 리테이크를 해 미세한 표정변화 등의 수정을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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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이런 사실을 전제로 영화를 다시 본다면 [에반게리온: 파]의 파격성이 오로지 마리라는 존재와 맞물려 일어나고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놀라 자빠질 만큼 변화된 아스카(아~ 완전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ㅠㅠ)나 에반게리온 초호기가 각성에 이르게 된 계기, 그 밖의 모든 중요한 변화에는 반드시 마리의 존재와 직간접적인 연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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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에반게리온을 처음 접한 사람들이 보기 쉽도록 만들겠다'던 제작진의 약속과는 달리 기존의 매니아들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명쾌한 해석을 내놓지 않은 채 다음 작품으로 공을 떠넘기는 제작진의 전술은 정말이지 야속하기 이를데 없다. [에반게리온: 파]가 올해 최고의 애니메이션이면서도 국내에서 대중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에반게리온: 파]의 변화는 분명 엄청난 사건이지만 무수한 떡밥만을 뿌려놓은채 절정의 순간에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그 절정의 충격은 한번에 받아들이기에 숨이 가쁠 정도로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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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야 할 것 같다. [에반게리온: 파]를 한번이라도 보고 싶어했거나 봐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체없이 극장으로 달려가라. 자막의 번역도 꽤나 만족스러운 편이며, 대형 디지털 화면으로 느끼는 신작화의 우월함, 그리고 극장용 스피커에서 뿜어내는 사운드의 박력은 최고다. 무엇보다 전작에서의 클라이막스인 야시마 작전이 무색할 만큼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액션씬 또한 명불허전. [에반게리온: 파]의 파격과 변화가 기존 팬들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배신에 가까운 충격일지언정, 창조를 위한 파괴는 정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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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게리온: 파] 국내판 예고편 (네이버 공식 블로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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